김관주는 유폐된 영조의 계비인 경주 김씨(慶州 金氏) 정순왕후의 친정 오라비로 외척세력의 중심 인물이었다. 정조의 친위쿠데타 이후 겨우 목숨만 건진 채 멀리 서북지방에 유배당한 김관주는 분을 참지 못하고 역모를 위한 거사를 착실히 준비해 갔다. 김관주는 그 동안 몰래 빼돌려 놓았던 막대한 재산을 이용하여, 자신의 가신들로 하여금 인적이 드문 산간오지의 폐광산을 사들이게 하고 광원 모집을 명분으로 수천 명의 유랑자들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하였다.
농업기술의 발달로 인해 적은 노동력으로 광작이 가능해 지고 부유해진 일부 부농들에 의한 토지겸병이 가속화되자 소작인들은 토지에서 쫓겨나 유랑민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숙식을 제공하고 임금도 후하게 준다는 꼬임에 앞다투어 광산으로 몰려든 이들이 수천 명에 달한 것이었다. 모집된 광원들은 엄격한 통제 속에 집단 거주생활을 하며 체력증진과 기율강화를 명분으로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또 김관주는 기존의 군사 조직인 오군영의 몇몇 장수들을 매수하여 거사에 필요한 병력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들은 장용영의 설치로 상대적인 박탈감을 품고 지내던 터에 변방으로까지 밀려나오자 정조의 개혁에 상당한 불만을 보이던 자들이었다. 김관주는 국경 너머 청나라 사냥꾼들과도 접촉하여 돈을 주고 다량의 화승총과 폭약들을 사들여 무기확보에도 공을 들인다.
병력과 무기 등 거사를 위한 물리력이 어느 정도 확보되자 김관주와 역모세력 일당은, 정조의 친위 쿠데타에 의해 제거된 노론 벽파의 잔당들과 내통하여 영조의 이복동생인 연령군의 손자에게 은밀한 접근을 시도하였다. 역모세력들은, 왕실의 종친임에도 불구하고 궁핍한 생활을 영위하던 그에게 왕위를 보장한다는 유혹과 거금으로 매수하여 일부 종친들을 역모에 가담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여기에다가 영국인들의 활발한 조선진출을, 서양 오랑캐와의 통교로 치부하며 극도의 거부감을 보이고 있던 영남지역의 일부 강경 보수 유림세력들까지 포섭하여 자신들의 지지세력으로 확보하는 등 정치적 사전 정지작업에도 열을 올렸다. 대역모의를 위한 거사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김관주는 야음을 틈타 무장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유배지를 탈출하여 반란군의 근거지에 도착했다.
김관주는 스스로를 척양(斥洋) 대원수라 칭하고 오천 명에 달한 반란군의 무리에게, 영국 오랑캐를 이 땅에서 몰아내고 새 세상을 만들자고 선동하고 마침내 출병을 단행하여 평양성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새벽 무렵 평양성 입구에 도달한 반란군은, 미리 매수된 평양병사 일당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고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평양성을 단숨에 점령해 버렸다. 평양성의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도처에 관망하며 잠복 중이던 반란 세력들도 일시에 거병하여 서북지역 일대를 점령하고 평양성으로 합류를 시도하였다.
평양성에 합류한 반란군의 병력은 모두 일만 명에 달하게 되고, 기세가 오른 김관주는 한양으로의 진격을 명하였다. 정조의 급진적 개혁에 불안을 느끼며 숨죽여 지내며 곳곳에 포진되어 있던 수구세력들은 반란군의 도성 진격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반란군은 출병 보름만에 개성까지 점령하는 개가를 올리게 되었다. 목용검은 서둘러 화성에 주둔하고 있던 장용영의 일만 군사를 지휘하여 임진강 일대에 도읍 방위를 위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장용영의 군사들이 기습적으로 임진강을 도하하여 반란군에 대대적인 맹공을 퍼붓자, 매수되어 급조된 반란군은 일거에 무너지고 혼비백산하여 도주하기에 급급했다.
김관주 등 반란의 지도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삼천 정도의 패잔병의 무리를 수습하여 정주성으로 도망하여 농성에 들어갔다. 뒤쫓아간 진압군은 반란군이 성문을 굳게 닫고 필사적으로 저항하자 병력 손실을 줄이기 위해, 임진강에서 포로로 잡은 광부들을 동원하여 성 밑으로 땅굴을 길게 파고 폭약을 매설하여 폭파시킨 후 단숨에 성내로 진입하여 반란군의 잔당들을 완전히 제압하는데 성공하였다.
김관주 일당의 반란이 진압된 후 이에 가담했던 노론잔당과 외척일파가 대규모의 숙청을 당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 동안 일련의 개혁 과정에서 걸림돌로 작용하던 봉건 수구세력들이 뿌리까지 제거되어 정조와 유신주체들은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 작업을 더욱 가속시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18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