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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역사소설] 대한제국 200년사- 2. 정조유신(正祖維新)
게시물ID : history_460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2013년체제
추천 : 28
조회수 : 125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6/05 17:49:03
정조유신(正祖維新) 


화성행차 기간 중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동원해 우의정 심환지를 우두머리로 하는 수구세력인 노론 벽파 일당을 대거 처단하고 28년만에 꿈에 그리던 아버지의 복수를 갚은 정조는 한양으로 돌아온 후 이들 노론 벽파 일당의 강력한 후견자 노릇을 해오던, 할아버지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정순왕후를 사도세자를 무고해 죽게 한 책임을 물어 궁궐 깊숙히 유폐시켜 버렸다. 


이로써 자신의 정치적 반대세력을 대거 제거하고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정조는, 조정의 최고 핵심기관인 의정부를 파격적으로 구성하여 기존 권문세가의 세도를 대폭 위축시켜 나갔다. 정조는 영의정에 멀리 영양부사로 가 있던 노론출신인 박지원을, 좌의정에 규장각 검서관으로 있던 서얼출생인 박제가를, 우의정에는 병조참지로 있던 남인계열인 약관의 정약용을 전격 기용하고 육조와 사헌부 등 조정의 요직에도 실학적 학풍을 깨친 신진 인사들을 대거 등용시켜 나갔다. 


이후 정조는 이들 개혁세력의 조언을 수용하여 노론세력의 대지주들이 세습하며 장악하고 있던 토지를 대거 환수해 농민들에게 나눠주고, 특정인에게만 한정되었던 상권도 자유롭게 개방하여 기득권 층의 경제적 입지도 축소시켜 나갔다. 이러한 경제 개혁으로 평민의 경제력이 향상되고 조세수입도 늘게되어 국고를 비축하게 되었다. 또한 평민 출신에게도 능력에 따라 관직에 등용될 수 있도록 하는 등 일련의 사회적 개혁을 통해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1800년) 


무리한 정치 일정 속에 오랜 숙환이었던 정조의 종기가 악화되자, 좌의정 박제가는 몇 해 전 북경을 방문했을 때 그 곳에서 사귄 영국인 의사 켄싱턴을 데려와 정조의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정조의 병세를 진단한 켄싱턴은 종기의 고름을 짜내고 썩은 살을 도려내 새 살을 돋게 하면 쉽게 완치할 수 있다고 정조에게 외과수술을 권유하였다. 기존의 궁중의들은 군왕에게 칼을 들이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극구 반대하나, 극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한 정조는 켄싱턴에게 수술을 할 것을 명하게 되고, 켄싱턴은 10년 이상 궁중의들의 온갖 처방으로도 악화되기만 해온 고질병을 간단한 수술로 완치시켜 내었다. 


영국인 의사 켄싱턴(Kensington)은, 학창시절에 이탈리아인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쓴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을 읽은 후 꾸준히 동양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 오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라비아의 대상인들을 따라 실크로드(Silk road)를 거쳐 청(淸)제국에 건너와 북경에 머물러 있던 터였다. 켄싱턴은 세상의 가장 동쪽 끝에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사신들이 북경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스스로 찾아가, 청국에 사절단을 수행하고 온 명석하고 호기심 많은 조선의 젊은 선비 박제가를 만나 의기투합하고 교류를 나눠온 사이였다. 기적 같은 서양의학의 효능을 직접 체험하고 덕분에 목숨까지 건진 정조는 켄싱턴에게 왕실 주치의로 일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켄싱턴은 이 때까지 유럽세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동양의 숨겨졌던 신비의 나라 조선에 점점 매력을 느끼게 되어 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궁궐에서 지내게 되었다. 



켄싱턴은 또 정조의 요청으로 자신의 모교인 옥스포드(Oxford)대 출신의 영국인 과학기술자들을 한양으로 대거 초청해 금은을 하사하고 조정의 자문 역할을 맡아 하도록 조치하였다. 정조는 북학파들의 건의에 선진 과학문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창경궁 인근에 최초의 근대적인 대학인 조선대를 설립해 전국의 능력 있는 인재를 뽑아 각종 선진문물과 영어 등 외국어를 배우도록 하였다. 


영국 정부는 동인도회사를 통해 이러한 켄싱턴의 조선에서의 활약을 보고 받고, 장기적으로 조선을 중국진출의 교두보로 확보하는 한편 일본 진출에 성공한 네덜란드를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으로, 일단 영국에 우호적인 감정을 갖게 된 조선 조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하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영국 국교인 성공회(聖公會) 교단도, 천주교를 앞세운 프랑스의 아시아 잠입을 견제하기 위해 정부의 이러한 결정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나섰다. 


영국은 당시 미국의 독립으로 아메리카 대륙 진출이 막혀버린 상황에서 새로운 시장을 찾고 있던 터였고, 인도 진출 이후 눈앞에 둔 거대한 중국 시장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까지 건재했던 청왕조(淸王祖)의 쇄국정책에 밀려 중국 시장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았고 게다가 나폴레옹의 집권 이후 프랑스와 전쟁이 발발하여 유럽의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멀리 동아시아까지 군사력을 동원하는 일도 어렵게 되자, 당시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조선을 교두보로 하여 간접적인 진출을 꾀하게 된 것이었다. 


영국 정부는 켄싱턴과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대규모의 기술자문단을 파견하여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변화들을 불러일으켰다. 선진 농업기술이 도입되고 방직, 방적기가 보급되자 의식(衣食)문제가 혁명적으로 변화되어 나갔다.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던 증기기관이 보급되어 대규모 공장이 건립되었고 또 원료인 석탄이 필요하게 되자 광업과 아울러 제철업도 발달하게 되었다. 


광공업의 발달은, 농촌의 분화로 발생한 유랑민 등 잉여 노동력을 흡수하여 잠재적인 사회불안 요인도 제거하는 부수적 효과를 동반하게 되었다. 농업과 공업의 발달로 인해 발생한 잉여농산물과 섬유제품의 유통으로 상업도 활발히 전개되고 금융업도 따라서 급속하게 성장하게 되었다. 


또한 한양에 근대적인 병원을 개설하고 학교를 세워 아직까지 서양의 문물에 거부감을 보이던 백성들의 호응을 조금씩 얻어내게 되었다. 자문단과 같이 입국한 성공회 신부들은 일부 천주교인들이 조상의 제사를 거부하여 화를 불러일으킨 점을 참작하여 전통윤리와 상충되지 않는 범위에서 선교활동을 전개하여 원주민들과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전술로 점차 일반 교인들을 늘려 가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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