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로마 - 튀르크 전쟁의 초기 경과
게시물ID : history_45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름없는여자
추천 : 1
조회수 : 1122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2/06/04 17:51:56
로마-튀르크 전쟁의 초기 경과
1047 - 8년경, 바그다드의 유력한 튀르크 제후 중 하나인 토그룰의 가신인 쿠툴미쉬가 디야르바키르 토후국을 공격하다가 패배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쿠툴미쉬는 퇴로가 차단되는 바람에 갇히게 되었으며 그 결과 무사히 퇴각하기 위해서는 로마 제국의 바스파루칸 지역을 경유해야 했습니다. 쿠툴미쉬는 어쩔 수 없이 바스파루칸의 총독에게 연락을 취해 ‘군기를 엄정하게 유지하며 통과할 것’을 약속하며 길을 열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디의 경우나 마찬가지로 남의 영토를 제지 없이 넘나드는 타국의 군대에 대한 경계심이 있었던 까닭에 바스파루칸 총독은 이 요청을 거절하고 군대를 소집해 통로를 차단하려 합니다. 결국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움직여야 함을 알게 된 쿠툴미쉬는 즉각 자신의 군을 정비해 바스파루칸 군대를 빠르게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총독을 사로잡은 후 바스파루칸을 빠져나가 타브리즈로 귀환하였습니다. 바스파루칸 총독은 타브리즈에서 노예로 매각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냥 당사자들이 덮고 넘어갔다면 로마 제국과 튀르크 인들과의 전쟁이 대규모로 발전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쿠툴미쉬는 공공연하게 바스파루칸 지방의 풍요로움과 제국군이 자신들에 대해 보인 태도를 선전하면서 귀환하였고 이 소식을 접한 토그룰벡은 마침내 제국을 공격하기로 결정합니다. 먼저 맹인 하산이 이끄는 선발군 2만 명의 튀르크 군이 제국을 침공하였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아르메니아-이베리아의 메디아 市를 점령하는 것이었습니다. 대 셀축 튀르크와 로마 제국의 첫 조우 바스파루칸의 총독인 아로니테스는 즉각 아니의 총독(이베리아 관구의 총독일지도?)이자 유능한 장군인 카타칼로노스 케카우메노스 장군에게 연락을 취해 양쪽의 군관구 병력을 합치기로 하였습니다. 카타칼로노스 장군은 즉각적인 공격보다는 계책을 써서 적을 섬멸하기를 권하였고 마침내 이 계획안으로 작전이 기획되었습니다. 메디아 근처의 스트라그나 강(오늘날의 카르스 강인지 아님 아라스 강인지, 그것도 아님 전혀 다른 강인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근처 지역에 진을 친 제국군은 모든 물자와 보급품을 포함한 진채를 모두 버리고 전략적 지점에 매복하였습니다. 하산의 군대는 비어있는 제국군의 진채를 확인하자 로마군이 두려움에 도망갔다고 생각하였으며 곧이어 물품을 노획하느라 대형이 흩어졌습니다. 바로 그 때 진영 주변에 매복해있던 제국군이 즉각 이들을 들이쳤으며 총대장 하산은 물론이고 총병력 20,000명 대부분이 궤멸 당하였습니다. 의심의 여지없는 대승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 셀축의 주인인 토그룰의 조카인 이브라힘 이날이 10만에 달하는 병력을 끌고 옴으로써 더욱 급박한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카타칼로노스 장군은 제국군은 근년의 승리로 사기가 하늘을 찌를 뿐 아니라 중무장한 병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이에 기반한 전술을 사용하는데 반해 튀르크 인들은 주로 보병이 많고 기병도 경기병이 상당하며 편자가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말들에 고창증(鼓脹症)이 나타날 것이므로 정면으로 회전을 벌여 격퇴하자고 주장했습니다만 아로니테스 장군은 요새와 거점을 강화하고 모든 것을 요새 안으로 후퇴시키며 전력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이에 관해 당시 황제인 콘스탄디노스 9세(1042-1055)에게 전략의 선택을 요청하였고 이민족의 많음과 제국군의 부족함 때문에 사카르토벨로 군이 도착할 때까지 대기하라는 명을 받습니다. 이들은 그러한 전략 하에서 지역의 주민과 재물들을 요새 내부로 옮기도록 지시하였으며 자신들은 군대를 거느리고 개방된 지역인 우트루라고 알려진 평원(오늘날의 Basean 평원)에 머무른 채로 황제에게 적이 근접하고 있음을 보고했습니다. 뭐? 10만? ㅎㄷㄷ 일단은 버텨봐! (사진은 콘스탄디노스 9세와 조에 황후의 모자이크) 이들의 상당한 규모에 아로니테스와 카타칼로노스를 비롯해 주변 지역의 많은 군대가 모이기 시작했고 그 때까지는 튀르크 군을 최대한 피하며 응전하지 않았습니다. 이브라힘의 군대는 잠깐 제국군을 추격했으나 제국군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접근이 불가능한 지역에 진을 치자, 곧이어 이 지역의 군사적, 상업적 중심지인 쎄오도시오폴리(오늘날 터키의 에르주름 市) 요새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 요새는 난공불락의 견고한 요충지였으므로 이브라힘의 군은 쎄오도시오폴리는 지나치고 더 부유하고 인구도 많지만 요새화는 되어있지 않은 아르체(혹은 아르젠) 市로 향했습니다. 이브라힘(위 지도의 아브라함은 오기입니다;;)이 이끄는 두 번째 침입 당시 아르체는 아르메니아의 도시들 중에서도 가장 크고 부유하였으며 많은 상인들이 물건을 적재해두는 장소로 수많은 물류 창고의 집산지였습니다. 때문에 원래 가장 크고 부유했던 쎄오도시오폴리를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당시 주민의 숫자는 약 70,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아르체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숫자와 용기를 믿고 바로 근방에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인 쎄오도시오폴리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약 6일 동안 튀르크의 대군에 맞서 항전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카타칼로노스 장군은 조속히 남진해서 아르체를 구원하자고 아로니테스를 설득했으나 아로니테스 장군은 당시 황제인 콘스탄디노스 9세(1042-1055)에게 주청하여 제국의 동맹군인 사카르토벨로(조지아)의 총사령관, 리파리테스가 지원군을 거느리고 합류할 때까지 머무르게끔 했습니다. 그 동안 카타칼로노스 장군은 자신의 군대를 최대한 빨리 집결시키고 정비하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리파리테스 장군을 독촉하는 서신을 보내어 꾸물대지 말고 쉬지도 말고 속행하라고 했습니다만 결국 이 시간을 보내버리는 바람에 끝내 아르체 시를 구원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아르체 함락과 카페트론 전투 아르체 시의 주민들은 거리마다 바리케이드를 쌓았으며 지붕 위에 올라 적들을 공격하는 등 끝까지 항거하였습니다. 한편 이브라힘은 제국군이 빠르게 집결하여 자신의 군대를 향하여 진격 중이라는 정보를 접하였고 후방에서 공격당할 것을 우려한 까닭에 아르체 시의 재보를 약탈할 시간도 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대신 도시를 불태워버리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당대 아르메니아의 상업과 산업의 중심지였던 아르체는 모조리 재로 변하였습니다. 이 화재는 너무나 거대하여 가히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대화재와 쌍벽을 이룰 정도였습니다. 아르체 공방전과 이후 대화재로 죽은 주민의 숫자만 14,000명에 달했으며 죽지 않고 포로로 끌려간 이의 수도 대단하여 당시 아시아의 노예 시장이 아르체 출신의 여성들과 아이들로 가득 찼다고 기록되었을 정도였습니다. 이미 너무 늦어버린 차였지만 제국군과 사카르토벨로 연합군 5만의 군대는 이브라힘 10만 군대의 후방으로 진입하였습니다. 마침내 양쪽은 아르체 시로부터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카페트론의 너른 평야에서 조우하였습니다. 튀르크 군은 조우 당시 매우 대형이 혼란스러운 상태였으며 당연히 이 때 바로 공격했다면 전투를 빨리 종결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합군 총사령관이 된 리파리테스는 토요일을 불길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선뜻 공격을 하지 않으려 했으며 로마군이 전투 준비는 하나 공격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는 정보를 접한 이브라힘은 서둘러 군을 재규합하며 전투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리파리테스 장군은 중앙을 맡았고, 케카우메노스 장군은 우익을, 아로니테스 장군은 좌익을 맡았습니다. 튀르크 인들도 마찬가지로 대형을 형성했습니다. 이브라힘은 케카우메노스에 맞서며 좌익을 맡았고 다른 튀르크 장군인 코라산테스는 아로니테스에 맞서 우익을 맡았습니다. 중앙의 리파리테스 군에 맞서는 이는 이브라힘의 이복동생, 아스판 살라리오스였습니다. 전투가 시작될 즈음은 어느덧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압도적으로 무장하고 훈련되어 있으며 사기가 고강하던 제국군은 튀르크 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좌익의 카타칼로노스 장군과 우익의 아로니테스 장군은 새벽녘까지 적을 추격하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중앙의 리파리테스 장군은 자신의 조카가 전사하자 상심하였으며 전력으로 돌격하다가 말이 부상당하면서 낙마하였고 곧이어 포로가 되었습니다. 제국군은 불가리아, 페체네그 인들을 상대로도 선전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림은 1014년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불가리아 군의 패배를 묘사한 14세기 연대기 삽화) 카테프론 전투는 9월 19일 새벽의 추격전을 끝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좌익과 우익의 군대는 무장을 해제하고 신에 대한 승리의 찬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중군 또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적을 쫓았을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끝내 리파리테스 장군은 귀환하지 않았으며 이에 병사들은 상당수가 낙심하고 자신들의 지휘관에게 이에 대해 묻는 등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어찌되었든 적이 더 이상의 작전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짐에 따라 각 사령관은 자신의 관할 지역으로 귀환하였습니다. 이브라함은 간신히 추격군을 피하고 자신의 이복 동생과 합류하였습니다. 카테프론 근처의 오코미 요새로 퇴각한 이들은 자신들이 잡은 이베리아인 포로들 가운데 적군의 중군 사령관인 리파리테스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브라함은 자신의 행운에 기뻐하며 5일을 행군하여 이란 고원의 레로 옮겨갔으며 여기서 페르시아의 술탄이 된 토그룰에게 전투 결과를 보고합니다. 토그룰은 이에 기뻐하면서도 동생의 전공 때문에 이를 제거할 핑계를 잃어버린 것은 아쉬워했습니다. 콘스탄디노스 황제는 동맹국인 사카르토벨로의 장군을 잃고 싶지 않았으므로 토그룰에게 많은 재화를 선사하며 포로를 귀환시켜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혹자는 토그룰이 아무런 대가 없이 다만 튀르크에 맞서지 말 것을 종용하며 리파리테스를 풀어주었고 토그룰의 이런 너그러움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콘스탄디노스 황제가 콘스탄디누폴리의 모하메드 모스크를 수리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양 세력 간의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일은 힘들었습니다. 토그룰 술탄이 사절로 파견한 세리포스란 이는 황제의 궁정에서 거만하게 굴면서 ‘제국이 술탄에게 조공을 바쳐야 한다’는 망언을 일삼았으며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 순간부터 로마 제국과 대 셀축 튀르크는 전면전이 시작되었으며 콘스탄디노스 황제는 페르시아 접경 지역의 방비를 강화하는데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술탄 토그룰이 이끄는 군대가 직접 만지케르트 요새로 진격한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대 셀축 술탄 토그룰의 공격(진격로는 매우 불확실합니다) 토그룰 술탄의 군대가 만지케르트로 접근한 것은 핀란드의 역사학자 Pinlay에 의하면 1050년경이었고 일반적으로 위키 등을 통해 알려져 있는 정보로는 1054년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군대에는 거대한 발리스타가 있었는데, 이것은 일찍이 바실리오스 2세(963-1025)가 비틀리스라는 고을(상기 지도의 왼쪽 아래에 있는 지명)에 배치해 둔 것이었습니다. 당시 만지케르트 요새를 방어하던 바실리오스 아포카페스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대형 발리스타는 위험할 수 있었는데 제국군에 있는 한 갈리아 인이 서신을 전달하는 것처럼 위장해 발리스타에 접근한 다음 세 개의 가연성 물질이 담긴 병으로 그것을 파괴했습니다. 그럼에도 적군은 물러날 기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튀르크 군의 알칸이라 하는 장군은 토그룰 칸에게 기습으로 요새를 함락할 것을 제안했으며 이에 따라 야간 기습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아포카페스 장군은 이것을 예상하고 각종 기계로 성벽 방어를 강화시켰으며 공병 무기도 많은 돌과 거대한 화살이 준비되었습니다. 철이 박힌 기둥들도 공격군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방어군은 격전지 뒤에서 은폐하도록 조치되었습니다. 알칸은 궁시 일제 사격이 끝나자 몰래 성벽으로 접근하였으며 적을 속인 것을 인해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군대가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 시작하자 돌, 화살, 기둥, 끓는 역청과 발연통의 폭풍우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용감한 병사들은 당황했으며 나머지는 뒤로 물러났습니다. 야습군이 주춤하는 순간이 바로 수비군이 출격하는 신호였습니다. 알칸은 짧은 교전 뒤 포로가 되었으며 곧이어 참수되어 그 목은 성벽 위에 올려졌습니다. 토그룰 술탄은 만지케르트를 점령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제국의 변경을 방위하는 요새의 방위선을 돌파하는 일을 단념한 채 페르시아로 귀환하였습니다. 이렇듯 1040년대 말과 1050년대 초에도 제국군의 방위는 굳건하였고 평원의 야전으로 2배에 달하는 군대를 쉽게 격파할 수 있는 강력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물론 중무장 전술의 탁월한 효과 발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중무장 전술이 이점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을 최대한 찾으려 했고, 또한 효과적인 지방 방위 정책과 우수한 장성진의 협조 시스템이 아직까지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측면은 튀르크 전쟁의 뒤를 잇는 1차 페체네그 전쟁과 러시아 전쟁에서도 잘 나타났습니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