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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군의 포풍 자바이칼 전선군의 공세 종결 8월 12일과 13일 사이에 플리예프가 지휘하는 소련-몽골 기병-기계화 집단은 내몽골 사막지대를 내달려 돌로노어와 칼간으로 하루 당 100킬로미터를 진군했습니다. 플리예프는 그의 부하들이 사막 지대에서 겪을 식수, 식량, 고온건조한 기온을 염려해야 했습니다. 8월 14일에 기병 기계화 집단은 돌로노어에서 저항하는 소규모 만주국군 기병대를 섬멸하고 돌로노어를 점령했습니다. 그 후속으로 제17군이 진군하여 성공적으로 대싱안링 산맥을 넘어 플리예프 기병-기계화집단이 우회한 일본군 병력등르 타오판신에서 사로잡았습니다. 8월 14일에는 자바이칼 전선군의 전 병력이 대싱안링 산맥을 넘어와 만주와 내몽골로 쏟아져 왔습니다. 제6 근위전차군, 제39군, 제36군은 만주 서부의 관동군 방어를 완벽히 박살내 버렸고 후속으로 제53군이 제2파로 쏟아져오며 만주국의 요지인 장춘과 수도인 심양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습니다. 말리노프스키는 부하들의 성공을 축하하면서 자바이칼 전선군의 공세 목표를 심양, 장춘은 물론이고 칼간, 츠이펑, 치치하얼을 8월 23일까지 점령하라고 명령했습니다. 8월 15일, 기병 기계화 집단은 계속해서 내몽골 사막을 건너며 몽강자치정부군의 제3,5,7 기병사단을 칸바오에서 상대해야 했습니다. 기병 기계화 집단의 선견대인 제27 차량화여단이 앞장서서 이 기병들을 격퇴시켰습니다. 이틀 간의 전투 끝에 기병 기계화집단은 1,635명의 포로들을 잡고 도시를 점령했습니다. 8월 18일에 소련-몽골군은 칼간을 향해 넘어서 계속 진군했습니다.
일본이 8월 15일에 항복하고 관동군도 8월 18일에 항복을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관동군은 칼간 북쪽의 요새 지대에 틀어박혀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8월 21일까지 기병-기계화 집단은 이 헛된 저항을 쓸어버리고 만리장성을 넘는 퍼포먼스를 합니다. 그리고 베이징으로 행진하면서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 팔로군과 합류합니다.
두 대인배의 만남에 대륙의 기상이 뿜어져나옵니다. 제17군은은 치흐펑으로 진격, 식수 부족과 태양과 모래에 시달리면서 일본군 108사단의 저항을 쓸어버리고 치흐펑을 8월 17일에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산해관과 핑추안, 링관을 손에 넣으며 요동반도로 진격, 발해만에 도달했습니다. 제53군은 8월 15일에 제17군과 제6 근위전차군의 틈을 매꾸면서 카일루를 확보하기 위해 진격했습니다. 진격은 방해받지 않았고 9월 1일에 제53군은 카일류, 차오양, 푸신, 그리고 Gush anbeitseifu를 점령했습니다. 53군 선견대는 요동만의 칭쳐우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제6 근위전차군도 8월 15일에 진격을 계속하며 일본군 제63, 117사단과 만주국군 기병들을 상대했습니다. 제7 근위기계화군단은 장춘 동쪽으로 진격하고 제9 근위기계화군단과 제5 근위전차군단은 심양 남쪽으로 진격했습니다. 이 두 축선에서의 진격은 100킬로미터에 이르는 틈을 발생시켰습니다. 8월 16일 제5 근위전차군단과 제9 근위기계화군단의 선견대가 각각 퉁랴오와 카이퉁을 확보했습니다. 두 기동군단은 심양 외각의 모든 교통, 통신 시설들을 점령해 심양을 사실상 마비시켰습니다. 8월 21일, 제6 근위전차군 병력들은 무력화된 심양과 장춘으로 돌입해 점령했습니다. 연료 부족으로 인해 새로 생긴 목표인 뤼순은 기차와 수송기를 타고 가서 점령해야 했습니다.
장춘 시가지를 행군하는 소련군 기갑장비들 심양 비행장에서 내리는 소련 보병들 뤼순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는 소련군들 자바이칼 전선군의 공세는 전반적으로 시간표를 양호하게 맞추며 진행되었습니다. 전선군이 목표로 한 모든 지역들은 8월 18일 이전에 전부 손에 넣었습니다. 이 시간에는 포로 처리 시간, 일본군 무장 해제 시간, 그리고 점령 지역의 임시적인 행정체계 설립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자바이칼 전선군의 8월 19일까지의 진격도 자바이칼 전선군의 성공은 산맥을 넘어 기계화부대를 기동시킨 대담한 작전과 관동군의 경직된 대응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관동군은 소련군이 대싱안링 산맥을 넘어올 것이라는 생각은 그들의 대응 시나리오에서 예상하지 않았었고 이는 결국 소련군의 산맥 기동으로 말미암은 기습으로 인해 제107 사단과 제80 독립혼성여단은 심리적, 물리적 마비 상태를 겪으며 우회당하고, 포위당하고, 포위망에 갖혀 차차 섬멸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 부대는 나름 끈질기게 저항하면서 제117 사단이 만주 중부로 퇴각할 시간을 벌어주기는 했습니다. 게다가 험지 기동을 통한 소련군의 여러 문제들(예상보다 더 빠른 유류 소비, 병사들의 체력 고갈)을 이용한 관동군의 수비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일본군 제119 사단은 재빨리 대싱안링 산맥에 만들어 둔 요새 지대로 기동하여 소련군의 진격을 끈질기게 저지하는 데 성공하며 험지 방어의 모범사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모든 힘은 관동군을 압도하며 혼란에 빠진 관동군 사령부를 마비시키고 극동전략방면군 사령부와 전선군 사령부의 고위 사령관들, 고위 참모들을 흡족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만주 서부의 험한 지형을 극복한 자바이칼 전선군의 결정적인 공세는 험지에서의 기동작전의 모범적인 교과서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