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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하나의 결과가 있었을 때 그 원인을 한 가지로 한정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 지금 만나러 갑니다(이치카와 다쿠지) 中
그 아이를 처음 본 건 강남에서였다. 거의 매주 소개팅을 하던 나는 특별히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같은 게 없는 상태였다.
될놈될 안될안이라지.
보통 만나서 커피를 한 잔 하고 한 시간쯤 얘기를 하다 헤어진다.
될놈 될이면 서로 집에 가는 길에 다음 번에 만날 약속을 잡을테고, 안될안이라면 만난 첫날에 같이 모텔에 들어가게 된다해도 다음날이면 남보다 더욱 못한 사이가 되겠지.
주선자가 약속시간을 너무 저녁 때로 잡아준 탓인지 아니면 그애의 첫인상이 마음에 든 탓인지
"저녁 드셨어요? 아직이면 뭐 좀 먹으러 갈래요?"
소리가 내 입에서 나오다니. 말해 놓고 나도 놀랐다.
첫 만남은 카페여야 하는데... 내 주머니 사정으론 처음 본 여자와 밥은 꽤 큰 사치인데...
그래도 뱉은 말에 책임은 져야 했고, 우리는 커리집으로 갔다.(왠지 가격대가 만만하면서 처음보는 여자랑 같이 갈 만한 장소라고 생각되었다. 뭘 파는지도 잘 모르지만..)
그 애와의 두 번째 만남은 건대에서였다. 일요일 오후 같이 커피를 마시고 건대 호수 산책을 제안했다.(본인은 산책광이다)
"저 백화점 들러서 뭐 좀 살게 있어서요."
"어? 그럼 같이가요"
오늘은 그만 빠이빠이 하자는건가 싶긴 했다.
"아니예요. 다음에 뵈요"
역시 그랬다.
그래 내가 그래도 수백번의 소개팅이 낳은 빅데이터가 있지. 차였구나 하면서 혼자 건대호수에서 맥주를 한 캔 하며 속도 없는 카톡을 보냈다.
'쇼핑 잘 하시고 집에 잘 들어가세요^^'
그러면 그렇지. 답장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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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3개월쯤 지난 어느 가을.
건대 먹자골목에서 우연히 그 애를 다시 만났다. 너무 반가웠지만 아는 첫 하기가 쑥스럽기도 하고 그애가 맞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
핸드폰에서 그 애의 전화번호를 찾으며 친구 손에 이끌여 술집으로 들어갔다. 전화번호가 있을리 없다. 나 싫다는 여자 전화번호
보통 지운다.
술집에 들어가서 부랴부랴 그 애 전화번호를 어떻게든..(어떻게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단 급하기는 했던 것 같다.)
알아내서 문자를 했다.
“형, 이 술집이 그렇게 헌팅이 잘 된대”
하는 친구 얘기는 뒷등으로만 조금 들었다.
“너 지금 건대야?ㅋㅋ”
“와 ㅋㅋㅋㅋ오랜만이네 오빠도 건대야?”
얘가 살짝 취한 것 같다. 3개월 전 만날 때만 해도 서로 호칭이 없던 사이였는데, 아니 어쨌거나 얘는 전화번호를 바로 지우는 타입은 아닌가보다.
“어어 친구랑 노는데 너랑 똑같이 생긴 애가 있길래 ㅋㅋ 잘 지냈어?”
“ㅋㅋㅋ나랑 많이 닮았나보네 오빤 잘 지냈음?”
그러고보니 얘 언제부터 나한테 말을 놓고 있는거지? 하는 생각과 함께 조금 용기를 내 보았다.
“너 내일 뭐하냐?”
“할거 없음 얼굴이나 보자. 간만에”
언제가 1일이라는 얘기는 없었지만 우리는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가끔 회사 앞에서 일 마치는거 기다렸다가 같이 지하철을 타기도 했고, 같이 여행을 가기도 하고, 서로 동네투어도 했다.
둘 다 제법 애주가였어서 같이 적당히 취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지긋지긋했던 3년여에 걸친 소개팅 인생이 드디어 끝나나보다 싶었다. 내 컴컴한 반지하 자취방도 우리에겐 천국이었고 심지어 차창밖에서 불어오는 공기마저도 다 우리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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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커플은,
정말 별 것도 아닌 일로 다투기도 하고 그게 이별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연말 분위기엔 다소 의아했던 어떤 영화,를 상영중이던 크리스마스 이브, 우리는 만난지 두 달여 만에 처음으로 말다툼을 했다.
“왜 나 안깨웠어?!”
“난 원래 자는 사람 깨우는거 싫어해.”
도대체 왜 지각한 사람이 더 화를 내고 있는건지... 정작 난 “괜찮아. 앞에 광고 시간 있잖아.” 하며 달래고 있었는데
일종의 그 애 나름의 투정이나 애교같은거였을거라 뒤늦게 와서야 생각해본다. 시간 약속을 중요하게 여기는 나로서는 그 투정을 잘 받아줄 만큼 마음이 넓지도, 받아줄 방법도 몰랐을거고.
그 뒤로 며칠 후 우린 그 애 집앞에 있는 이자카야에서 서로 답도 없는 토론을 했다.
“연인은 싸울 수 있다.”
“아니다. 연인끼리는 늘 좋기만할 수 있다.”
“연인은 싸워야 하고 그건 당연한거고 잘 싸우는 방법을 아는게 중요하다.”
“아니다. 싸움이란건 얼마든지 피할 수 있고, 꼭 다투는 과정이 아니더라도 서로 안맞는 부분을 맞출 수 있는 과정은 많다.”
그런 토론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날 건대의 어느 술집에서 만났을 때 난 더 이상 내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아이는 더 이상 내게 웃어주지도 않았고, 내가 하는 말에 대답도 단답형.
“너 오늘 컨디션 좀 별로인거 같아.”
“아냐 안그래”
대충 이런 힘든 대화의 반복. 나로서는 견디기 힘든 분위기였다.
“오늘 피곤해보여. 오늘은 일찍 들어가고 주말에 보자.”
“응”
그 뒤로 난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고,
그 애로부터의 연락도 없었다.
우리 이별의 이유는 뭐였을까.
잠을 안 깨운거?
내가 싸움으로부터 도망만 다녀서?
아니면 그저 단순히 어느날 내가 더 이상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아서?
‘여름날’ 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이별의 이유는 지구에 유통기한이 있기 때문일수도 있단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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