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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군의 포풍 - 1부 제39군의 포풍 - 2부 제 39군 부사령관 G.K 코즐로프 중장은 제94 소총병군단에게 소규모 일본군 초소들을 쓸어버리고 하일라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8월 11일 저녁에 야전군 선견대가 하일라얼 남쪽에서 들이칠 동안 군단의 주력이 Dunda-Khana에서 12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Bualuto로 진격했습니다. 그런데 하일라얼이 소련 제36군에게 우회당하자 제94 소총병 군단은 더 이상 하일라얼에 붙잡혀 있을 필요가 없게 되자 제94군단은 새 목표를 갱신했습니다. 군단 소속인 v. N. 쿠쉬나렌코 소장의 제221 소총병사단은 대싱안링 산맥 동쪽의 부차적인 일본군 저항 거점들을 쓸어버리면서 태흐르쑤 강과 태흐르치 강의 계곡을 통해 루순 트시히로 가는 길인 Tagan-Dabe를 장악했습니다. 제358 소총병사단은 남쪽으로 진군해 할룽 아산 요새지대를 공략하는 제124 소총병사단과 합류해 요새지대를 진압하게 되었습니다.
제39군 병력들이 일본군을 요새 지대에서 끌어내는 동안, 제124 소총병사단은 8월 10일에 요새 지대로 직접 치고들어가 8월 10일에 일본군 제90 연대를 박살냈습니다. 그날 아침에 D.M. 렐레코프 대령의 제622 소총병 연대가 할힌골을 넘어서 할흐 강 북쪽의 일본군 전초부대를 괴멸시켰습니다.
여기서 소련군의 대 요새 전술의 좋은 전례가 된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90연대 1대대 1중대 소속인 일본군 병사 9명이 마나 울라 산 북서쪽 고지에 설치된 사방으로 4개의 총안이 달린 토치카 하나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토치카는 고지에 위치한데다가 주변을 철조망으로 둘러싸고 중기관총 2정을 주 화력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타라와 전투에서의 일본군 토치카. 이런 건축 양식이 아니었나 합니다. 렐레코프 대령은 이 성가신 토치카를 제거하기 위해 소속 대대 병력 중 1개 대대는 토치카의 남서쪽으로 1개 대대는 남동쪽으로 이동시킵니다. 연대 소속 76밀리 포와 45밀리 포들이 토치카 주변에 화망을 형성하면서 각 대대에서는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돌격조를 짰습니다. 포격으로 토치카의 일본군의 시야를 가리는 동안 5명의 결사대가 몰래 토치카 사면으로 접근해 철조망을 제거하여 장애물을 없앴습니다. 그리고 남쪽과 남동쪽에서 소련군은 대전차포를 토치카를 향해 직사로 발사하며 일본군이 대전차포 포격에 대응사격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본군이 남쪽과 남서쪽에 정신이 팔리자 남서쪽에서 돌격하는 소련군 돌격조의 침투를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경악한 일본군은 기관총 총구를 소련 강습조에게 돌렸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소련군 보병들은 이미 토치카 주변에 파놓은 참호에 뛰어들어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일본군과 백병전을 벌였습니다. 일본군의 아홉 병사는 모두 끝까지 싸우다 죽었고 소련군의 피해는 고작 부상자 4명이었습니다. 소련군은 이 전훈을 분석하여 이와 같은 방법을 활용해 일본군 요새들을 하나 하나 점거해 나갔습니다. 8월 10일과 11일 동안 124 소총병사단은 요새 지대 깊숙히 뚫고 들어갔고 일본군 요새들과 초소들을 체계적으로 제거해 나갔습니다. 잠깐 북쪽으로 진군로를 돌려 사단은 이얼수와 아샨에 12일날 도착했습니다. 그날 저녁에 일본군은 아샨의 남동쪽과 북동쪽에서 역습을 가해 왔지만 124 소총병사단은 이 역습을 간단히 막아내고 되려 일본군을 우챠오커우로 몰아냈습니다. 일본군 제107 사단이 지키던 요새 지대의 대부분의 중요 장소들은 전부 124 소총병사단에게 넘어왔고 124 사단이 뚫어놓은 진군로를 따라 제5 근위소총병군단이 솔룬 남서쪽으로 들이치기 시작했습니다. 8월 12일에 제5 근위소총병군단과 제113 소총병군단은 울란 호 북쪽에서 동쪽을 향한 진격을 완수하고 솔룬과 테포씨 남서쪽의 구릉지대에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제5 근위소총병군단의 선견대가 하일라얼로 향하는 철도망을 장악하고 일본군 1개 대대 병력을 태우고 솔룬으로 향하던 일본군 열차를 우연히 만나 신나게 떄려부셨습니다. 솔룬으로 가는 길이 열리자 예상하지 못한 지형상의 난점이 군단을 솔룬에서 재집결하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울란 호와 다른 강들의 계곡들이 솔룬으로 가는 길과 철도 라인을 막고 있던 것입니다. 소련군 차량들은 강 주변의 늪지에서 벗어나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습니다. 이 상황은 소련군 병력들을 울란 호 일대에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소련군 공병들이 죽을힘을 다하고 다른 병과 병력들이 공병들을 도와서 길을 개척해서야 이 난감한 상황이 그나마 해결될 수가 있었습니다. 솔직히 제39군의 진격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제대는 2개 공병여단인거 같습니다.
어느 군대건 공병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공병찬양 이 정체 상황은 소련군 병력들이 10킬로미터나 되는 지대에 늘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단 선견대들은 하루에 40~80 킬로미터를 넘게 진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8월 12일 오후 제5 근위소총병군단은 솔룬 남서쪽에서 집결하고 군단 선견대인 제44 전차여단과 제19 소총병사단, 제17 소총병사단을 앞세우며 솔룬 시로 돌입했습니다. 제44 전차여단과 제17 소총병사단이 솔룬 시가지에서 일본군을 정리할 동안 제19 소총병사단은 솔룬 남서쪽의 철도망을 장악했습니다. 그날 저녁, 대대적인 항공지원과 포격지원이 솔룬에 떨어진 이후에 제5 근위소총병군단 병력들은 도시의 심장부를 장악했습니다. 도시를 지키던 일본군 제107사단 소속 제178연대와 제2 만주국군 기병사단은 도시 북서쪽을 통해 퇴각하면서 소련군을 향해 계속해서 반격을 시도했지만 별 성과를 얻지 못한 채 격퇴당해야 했습니다. 소련군은 솔룬 남쪽으로 이동해 테포씨로 향하는 철도를 장악했습니다. 같은 날, 제5 근위소총병군단의 제2 선견대인 제735 돌격포연대는 1개 포병대대, 제7 대전차대대, 제508 자주포대대가 소속되어 있는 제45 포병연대를 대동하고 테포씨 서쪽으로 진격했습니다. 선견대는 테포씨 마을에 진입하자마자 솔룬에서 탈출하던 일본군 차량화 병력들을 박살내고(호랑이를 겨우 피하니 사자가 기다리고 있는 격) 일본군 유류 창고를 접수했습니다. 735 돌격포연대는 솔룬에서 본대와 합류하고 철도를 따라 도망가는 일본군 병력들을 추격하며 섬멸했습니다. 제5 근위소총병군단이 테포씨를 확보할 동안 제44 전차여단과 제17 소총병사단은 8월 13일에 솔룬 역을 장악했습니다. 제19 소총병사단은 제61 근위소총병연대와 508 돌격포대대를 이끌고 솔룬 서쪽의 치니잉커우 역을 장악했습니다. 그곳은 하필이면 일본군 107사단 소속 병력들이 재집결하기로 되어 있던 장소였습니다. 그 무렵 제124 소총병사단은 12일과 13일 동안 우챠커우를 지나 도시 외각의 일본군 요새 지대를 우회하면서 흐시커우 동쪽의 철로를 따라 진격했습니다. 그 도시의 일본군 제90연대외 제117연대는 동쪽과 서쪽에서 밀려오는 소련군의 대공새를 이틀 동안 받아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일본군 제107 사단은 8월 15일에 산맥 북서쪽에서 축출당하고 겨우 재집결한 후 소련군을 향해 반격을 가했지만 보잘것없는 성과만 나오고 말았습니다. 제5 근위소총병군단이 솔룬을 점령해 일본군 107사단을 절단할 동안 야전군 선견대인 제61 전차사단과 제113 소총병 군단은 울란 호 계곡 따라 진군하여 하일라얼, 쿠에일리우호를 지나 왕예먀오로 쇄도했습니다. 그런데 만주의 험한 지형 때문에 차량들의 연료소비가 예상보다 급증함에 따라 제39군 전체의 유류 보급 상황에 적신호가 걸렸습니다. 선견대에 비해 본대가 뒤쳐지기 시작하자 류드니코프 상장은 소속 모든 제대의 지휘관들과 참모들에게 최대한 연료 소비를 줄일 방법을 찾아보라 명령하고 전 군의 진격 속도를 10킬로미터 내외로 유지하라 명령했습니다. 8월 14일에 제44 전차여단은 솔룬에서 북서쪽으로 6킬로미터 지점에서 가해진 일본군의 역습을 가볍게 막아 냈으며 제5 근위소총병군단의 다른 병력들은 솔룬 남쪽에서 들어오는 엇비슷한 규모의 일본군 공세를 역시 가볍게 격퇴했습니다. 제124 소총병 사단과 제19 소총병 사단이 밖아넣은 쐐기는 솔룬 서쪽으로 향하는 회랑을 열었고 그 회랑으로 제61 전차사단과 제113 소총병군단이 돌입하여 왕예마오 북서쪽의 일본군과 교전했습니다. 15일, 제 39군의 선견 병력들은 왕예마오를 장악했습니다. 다음 이틀 동안 제5 근위소총병군단과 제113 소총병군단은 왕예마오에 입성했습니다.
왕예마오에 입성하는 소련군 병력들 솔룬과 왕예마오가 소련의 손에 떨어지자 관동군의 할룽-아르샨-우챠커우 요새 라인은 완전히 무너져버렸습니다. 소련군은 일본군 107사단의 퇴각로를 차단하기 시작했고 107사단이 다른 일본군 제대와 만주 중심에서 합류하는 것을 틀어막았습니다. 산맥 북서쪽에서 소련 제124 소총병사단이 일본군 107사단을 몰아낼 동안 후방에서 온 제221 소총병사단이 요새지대 소탕에 성공하였습니다. 제39군이 일본군 107사단의 잔존병력 소탕을 끝낼 동안 I.I. 포포프 중장의 제94 소총병군단은 2개의 축선을 통해 만주 중심으로 진격하다가 일본군 제10 방면군 사령관인 호우린 대장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소련군 제36군이 하일라얼로 진격하며 제10 방면군 병력들을 쫓아내고 제39군 또한 진격해 옴에 따라 진퇴양난의 지경에 놓인 호우린 대장은 항복을 결정한 것입니다. 그날, 94 소총병군단 소속 제358 소총병사단은 할룽-아르샨 요새지대 남쪽으로 진군해 8월 14일에 제124 소총병사단, 제221 소총병사단과 합류하여 일본군 소탕 작전을 지원했습니다. 모든 퇴각로가 다 끊겨버린 제107 소총병사단은 일본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계속 저항하다가 차례차례 소탕되었고 결국 8월 30일에야 일본군 패잔병들은 치치하얼 남서쪽의 차일라이에서 항복했습니다. 제39군은 6일 동안 일본군 요새지대를 우회하고 박살내고 무력화시키면서 왕예마오까지 쾌속진군을 하며 확실하고 완벽한 승리를 달성해 냈지만 사령관 류드니코프와 제39군 장교들은 행복하고 싶은데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나하면 자바이칼 전선군의 작전계획에서는 제39군이 고작 이틀만에 작전을 완수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39군은 3배나 늦은 시간에 작전을 완수했습니다. 이는 만주의 험한 지형과 엉망진창인 도로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었지 관동군의 저항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계속 썼다시피 제39군은 정말 생고생을 하며 대싱안링 산맥과 만주의 늪지, 계곡을 건너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새 지대 공략에 필요한 중(重)야포들이 후방에 뒤쳐져버려 요새지대 소탕에 제대로 된 화력지원을 받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게 되었습니다. 한편 관동군 제44군은 대본영과 관동군 사령부에서 짠 시나리오대로 '소련군은 대싱안링 산맥을 넘지 못하고 요새 라인을 정면돌파 할 수밖에 없다. 그쪽 입장에서도 그게 최선이다.'라는 가정 하에 방어계획을 세워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39군은 험한 대싱안링 산맥을 넘어 일본군 요새 지대를 우회하고 제107 사단, 제2 기병사단을 완전히 무력화시켜버리며 관동군의 허를 제대로 찔러버리고 말았습니다.
야뽄스키 이새퀴들 우리 소비에트의 함정에 걸려들었구나. 바실레프스키와 말리노프스키가 세운
제39군의 대담한 산맥 기동은 후속한 문제들에도 불과하고 하루 당 평균 40킬로미터의 진격을 달성해 냈고 제39군의 진격은 제6 근위전차군이 밖아넣은 쐐기와 더불어 만주 서부에서 소련군을 막아낼 수 있으리라는 관동군의 희망을 산산조각 내버리는 데 성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