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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발견된 고구려비 제작시기 추정
게시물ID : history_742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세머리매
추천 : 4
조회수 : 691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01/31 18:06:43

 

  이 글을 제가 지난 22일 작성해서

  다른 게시판에 올렸던 글인데

  신문기사 중에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지만 저와 비슷하게 추정하는

  여호규씨 등 연구자도 있는 것 같아 올려봅니다.

  기사를 보니 여호규씨는 비문 뒷면에 명단이 있지 않을까 추정하던데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해보았었습니다.

  물론 아직 추정일 뿐입니다.

  장수왕 시기에 세웠다는 기사도 있었지만 저는 광개토호태왕 시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새로 발견된 고구려비의 제작 시기에 대하여

 

 

 

 

세머리매

 

 

http://www.ccrnews.com.cn/102784/90919.html

 

 

 

1 □□□□世必□天道自承元王始祖邹牟王之创基也

  

2 □□□子河伯之孙神□□□□荫开国辟土继胤相承

  

3 □□□□□□烟户以□河流四时祭祀然□□偹长烟

  

4 □□□□烟□□□□□富足□转卖□□守墓者以铭

 

5 □□□□□□□□□太□□□□□王神□□与 东 西

  

6 □□□□□□追述先圣功勋弥高悠烈继古人之慷慨

  

7 □□□□□□□□自戊□定 律教□发令□修复各於

  

8 □□□□立碑铭其烟户头廿人名□示后世自今以后

  

9 守墓之民不得□□更相转卖虽富足之者亦不得其买

  

10 卖□□违令者后世□嗣□□看其碑文与其罪过

 

 

 

(아래는 한 중 언론의 기사 주소)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01/16/0200000000AKR20130116186200005.HTML?did=1179m

 

 

http://news.xwh.cn/news/system/2013/01/14/010319191.shtml

 

 

 

 

지난 2012년 7월 발견되어 1월 4일 중국문물보를 통해 알려진 새로운 고구려비의 건립시기에 대하여 대체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하 광개토호태왕) 또는 장수왕 시기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추측된다.

 

 

현재 중국학자들 사이에서는 두 가지 의견이 엇갈리고 있고 김태식 황윤정 기자의 연합뉴스 16일자 기사에는 장수왕 시기로 추측 보도하면서 장수왕이 비의 건립 주체가 아니라고 해도 광개토호태왕릉비의 건립시기에 가까운 시점에 이 비를 세운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에 발견된 비석 또한 광개토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역대 고구려 왕가의 공동묘지인 지금의 지안시 우산하 고분군 앞에다가 광개토왕비를 건립하면서, 또 다른 왕가의 공동묘지인 지금의 마선구 고분군 앞에다가 그 축소판으로 세웠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설혹 이 비석을 장수왕이 세우지 않았다 해도, 광개토왕비가 건립되던 시점(414년)에서 가까운 어느 때에 비슷한 목적으로 세운 것으로 평가된다.”

 

 

이에 대하여 글쓴이는 비의 건립 시기를 광개도호태왕 때로 보고 있으며 이에 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광개토호태왕릉비문을 살펴보면 본래 고구려에는 고구려 왕릉의 무덤가에는 비석이 없었으며 광개토왕은 자신이 데려온 한, 예 220호(집)에게 수묘를 담당하도록 하였는데 장수왕이 새로 온 이들이 법을 모를까 염려하여 새로 110호를 추가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기존에 광개토호태왕의 한, 예 220호의 편성단위는 10호씩 2조가 한 단위가 되어 한 릉의 관리를 맡거나 11호씩 2조가 한 단위가 되어 한 릉의 관리를 맡는 것으로 보는 대체로 두 가지의 견해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 비문을 보면 연호두 20인의 이름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각 릉의 관리 단위가 20호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광개토호태왕은 총 220호가 20호씩 11곳의 릉의 관리를 하도록 지시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 비를 장수왕 때의 것으로 본다면 각 비당 30호두의 이름이 새겨져야 할 것이므로 이것은 광개토호태왕의 가르침을 새긴 비라고 해야 옳다. 따라서 이 비의 건립시기가 광개토호태왕릉비보다 늦거나 비슷한 시기라는 것은 견해는 옳지 않다. 김태식 기자는 이전부터 릉마다 비를 세웠다는 견해에 반대해 왔기 때문에 위 내용의 기사를 작성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광개토호태왕릉비는 광개토호태왕의 사망 후 414년에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비가 광개토호태왕의 가르침에 따라 장수왕이 세운 것이라고 하면 광개토호태왕이 수묘에 대한 자신의 가르침을 전한 직후에 사망하고 장수왕이 광개토호태왕비를 건립하기 전 이 비를 건립한 것이 되는데 광개토호태왕이 수묘 220에 대한 가르침을 전한 직후 사망했다는 것도 확률적으로 높아 보이지 않으며 설혹 그랬다 해도 상중에 장수왕이 이 비의 건립을 지시할 만큼 시급한 일이었는지도 의심스럽다. 더구나 당시에는 광개토호태왕릉비의 제작에 골몰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글쓴이의 추측으로는 이 비의 건립 시기는 광개토호태왕 시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된다. 다만 현재 비문으로 보면 구체적인 20두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데 배면에도 판독은 불가능하지만 문자의 기록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고 하므로 배면에 있었거나 앞 비문에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이는 어디가지나 아직은 가능성일 따름이기 때문에 이 비석은 혹 각 릉 곁에 세운 비가 아니라 한 구역 전체에 세운 일종의 대표비의 가능성도 있다고 추측된다. 다만 이러한 경우에도 비의 건립시기가 광개토호대왕 시기라는 추측에는 변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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