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18일 당초 예상을 깨고 민감한 정치현안에 대해 짧게 언급했다. 야당의 협조가 없으면 내년도 예산안과 민생법안 등 국회 처리에 차질이 생겨 국정운영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꼬인 정국을 풀기 위해 '작은 성의'를 보이는 데 그쳤다.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사건 특검과 국정원 개혁 특위에 대한 부정적 입장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협상을 넘겨받은 새누리당은 '특검 불수용, 특위 수용'이란 진전된 입장을 제시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특위만 수용은 동문서답'이라고 거부하며 '양특' 수용을 압박했다.
◆민감한 정치현안, 정치권에 공 떠넘겨
박 대통령은 대치 정국을 풀기 위해 직접 해법이 아닌 간접 해법을 선택했다. 정치적 결단을 통해 1년여 동안 국정운영의 발목을 잡아온 국정원 정국을 매듭 짓는 것을 포기하고 정치권에 미뤘다. 박 대통령은 현재 재판과 수사가 진행 중인 국정원 사건과 국정원이 추진 중인 개혁안 작업에 정치권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인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이 그런 문제로 대립과 갈등을 지속하고 있어 여야 합의를 통한 해결을 차선책으로 제시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그러면서도 야당의 대야 협상 입지를 제한했다. 이날 시정연설에서 국정원 사건의 선(先) 검찰·법원 처리·국정원 자체 개혁안 마련, 후 국회 논의 등 기존 입장을 재확인하며 선을 그은 것이다. 이에 중압감을 느낀 새누리당은 국정원 셀프 개혁안이 조만간 나오는 것을 감안해 부담이 작은 특위 설치를 제안했다. 청와대 이정현 홍보수석은 여야 합의와 관련해 "특정 사안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 아니다"고 의미를 축소했다.
박 대통령의 소극적 대처는 정국 해법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민주당의 강경 대응을 불러 국정원 정국을 둘러싼 정치권의 갈등이 장기화하는 역효과를 낳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강창희 국회의장이 뒤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취임 후 처음으로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면서 여야의 협조를 당부하고 있다. 남제현 기자
◆정기국회 내 법안·예산안 처리 암운
민주당은 대여 투쟁 강도를 높여나갈 태세다. 당장 19일부터 시작되는 대정부 질문, 법안과 예산안 심사 등에서 여당에 파상공세를 펼 분위기다. 국정원 사건에 대한 박 대통령의 부정적 입장이 여당의 '특검 거부' 가이드라인이 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전병헌 원내대표는 시정연설 뒤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연설에) 특검과 특위, 민생공약 실천 의지가 전혀 없었다"고 비판했다. 특위 수용이란 여당의 유연한 분위기에도 야권이 강력 반발하면서 정국은 당분간 싸늘해질 가능성이 높다. 야당이 요구하는 특검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면 여야 대치의 출구는 찾기 쉽지 않을 전망이다. 민주당은 정의당, 무소속 안철수 의원과 함께 추진하는 특검 법안을 매개로 야권연대를 공고히 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강경한 대여 투쟁으로 민생법안과 예산안 처리가 불투명해졌다. 김 대표는 "정부예산안은 공약·민생·지방포기, 재정파탄 예산이며, 박 대통령이 강조한 대부분의 법안은 슈퍼부자와 재벌에게 특혜를 주는 법안"이라며 "정부 제출 법안과 예산안을 꼼꼼히 살필 것"이라고 말했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의 거취 및 황찬현 감사원장 임명동의안 처리와 연계할 방침도 분명히 했다. 감사원장 인준이 여야 격돌의 1차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