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난의 변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홍무제 주원장의 이야기부터 해야 하는데, 주원장은 황제가 된 후 숙청을 감행하면서 황권을 안정시켰습니다. 명나라 초기에 위세를 부리던 호유용이 제거된것이 대표적인데, 사실 이때는 관련자들만 죽어 규모가 아주 크지는 않았습니다. 진정한 대숙청은 1390년으로 호유용 사건으로부터 10년뒤에 벌어졌습니다.
북원, 일본에 협력하여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로 3만명이 숙청당했습니다. 이때 77살의 이선장이 죽었죠. 그런데 그렇게 숙청을 해서 앞 길을 터주려던 태자 주표가 사망해버리고 맙니다. 주원장으로서는 난감해졌습니다. 주원장은 새로운 태자로 넷째 아들 주체, 즉 후대의 영락제를 생각하고 신하들에게 의견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반대만 나왔죠. 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적통을 잇는것이 예라는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만약 형제를 세운다고 쳐도, 넷째인 주체를 태자라 삼으면 둘째, 셋째 아들은 어찌하냐는 이야기였습니다. 주원장은 이에 울면서 한탄하고는 포기했다고 합니다. 헌데 이 기록에 대해, 나중에 주체가 영락제가 되고 나서 "홍무제는 본래 주체를 황제로 만드려고 했다!" 고 하기 위해 후대에 첨삭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자, 황태자는 3만이면 된다. 3만명을 죽이면 안심할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어린 손자라면,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이제 홍무제는 66살이었고, 정말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상우춘은 서달과 더불어 주원장 최고의 명장이었고, 남옥은 상우춘의 처남입니다. 개인적인 평판에선 좀 안좋은 소리도 들렸지만, 항상 변방을 전전하며 큰 공을 여러차례 세운 역전의 무장이었지요. 모반을 꾸미려고 해도, 변방에만 있었던 지라 꾸밀만한 시간도 부족했습니다.
홍무 26년 2월, 금위위지휘사(錦衣衞指揮) 장환(蔣瓛)이 남옥이 모반한다고 고하니, 옥리에게 내려 보내 국문하게 하였다. 그 옥사(獄辭)에 이르길 "남옥은 同 경천후(景川侯) 조진(曹震), 학경후(鶴慶侯) 장익(張翼), 축로후(舳艫侯) 주수(朱壽), 동완백(東莞伯) 하영(何榮) 및 이부상서 첨징(詹徽), 호부시랑 박우문(傅友文) 등과 같이 변란을 일으킬 것으로 모의하고, 장차 황제가 적전(耤田)을 나가는 틈을 엿보아 거사하기로 하였다"고 했다 ─ 명사 남옥전 일단 고발 자체는 금위위에서 나왔습니다. 금위위 뒤에 홍무제가 있는거야 너무나 당연한 소리구요. 일단 잡히기만 하면 신기할정도로 죄상이 줄줄 나왔는데, 결국 남옥은 처형을 당했고 연루된 사람이 1만 5천여명이었습니다. 이때도 살생부 명단이 작성되었습니다. 이러한 피바람이 있고 나서, 문제의 손자 건문제는 황제로 즉위를 했습니다.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황제가 되고 나서의 측근들도 제테, 황자징, 방효유 등 전문 정치가라기 보단 학자들이 많았습니다. 주원장의 대숙청으로 인해 공신 출신의 신하들 가운데서는 황제에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친족은 예외죠. 각지에 할거한 번왕들은 여전히 제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 상황은 마치 전한 시대와 비슷했습니다. 여후를 쫒아내고 한문제와 한경제가 즉위하는데, 유방과 여후의 숙청 등으로 황제에 거스를 수 있을만한 신하들은 없지만 반대로 동성왕들은 위협적이었던 상황과 매우 유사했죠. 건문제와 그의 신하들은 과거 한경제가 조조의 의견을 바탕으로 제후왕들을 견제했는지, 번왕들의 세력을 차근 차근 정리했습니다.우선 주왕 주숙을 제거했는데, 주원장이 가장 사랑하던 부인 마황후가 낳은 자식 중 마내가 주숙이었습니다. 본래 주숙은 평판이 나쁘고 범죄 행위를 자주 한 사람이라 시범 케이스론 적절했죠. 개국 공신 이문충의 아들이던 이경륭이 국경 경비를 한다고 왕궁을 포위하더니 한마디 말도 없이 주숙을 잡아다 데려간 것입니다. 그런데 주원장이 사망한것이 5월, 제태와 황자징등의 측근들이 기용된것이 6월, 주숙이 처리된것이 8월입니다. 이 말은, 번왕을 견제하는 정책이 하루 아침에 나온게 아니라 건문제가 태자이던 시절부터 준비하던 것이라는 이야기죠. 다만 건문제 본인이 적극적으로 나섰다기 보단 측근들의 의사가 커 보입니다. 건문제는 좋게 말하면 사람이 좋고 나쁘게 말하면 너무 유우부단한 사람으로 주숙을 잡고도 풀어 주려고 헀을 정도입니다. 그러면 소용이 없죠. 측근들이 반대하여 주숙은 운남으로 귀양을 보냅니다. 그 후 잠시동안 또 조용히 있다가, 이듬해 4월 제왕 주부와 대왕 주계를 서민으로 강등시켰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상왕 주백은 낙심하며 분신 자살했고, 6월에는 민왕 주편이 복건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연왕 주체는 7월에 봉기했습니다. 이 시기와 상황으로 보면, 주체가 야심을 품었건 품었지 않건간에 일어나는 시점은 정말 어쩔수 없는, 코너에 몰려진 상황에서 죽지 않기 위해 일어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건문제 정권으로서는 지금까지 처리한 다른 번왕들을 모두 합친 것 이상으로 연왕 주체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마치 오초칠국의 난 당시의 유비와 비슷했죠.
주원장이 대업을 이루고 황제가 되었을때 주체는 고작 10살이었지만, 주원장이 황제가 되고 몽골을 북으로 몰아낸 후에도 타타르와 오이라트의 위협은 여전했고, 주체는 북방에서 그들을 막아세우면서 몽골과 싸우거나 몽골인 부대를 데리고 있는등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부대를 이끌었습니다. 세력으로 치자면 연왕을 먼저 처리해야 했으나 워낙 주체가 강력한 상대라서 건문제 일파도 최후로 남겨놓은 것이었죠. 주원장이 죽었을때, 국경을 지키던 번왕들은 오지 말라고 명령 하여 주체는 자기가 직접 수도로 가는 대신 아들(이중에 훗날의 홍희제도 있습니다) 세 명을 보낸 상태였습니다. 건문제의 측근 중 제태는 이들을 인질로 삼으라고 권했고, 황자징은 이들을 무사히 주체에게 보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주체도 방심을 할것이라는 이야기였죠. 그 후에 갑자기 잡아버리면 제아무리 주체라도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건문제는 황자징의 의견에 따랐습니다. 그런데, 세 아들이 돌아가던중 본래 악랄한 짓을 많이 하던 말썽꾸러기 주고후가 관리를 죽이는 등 행패를 부렸고, 조정에선 주체에 대한 비난이 높아졌습니다. 벌써 다른 번왕들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두려워하던 주체는 오히려 이때문에 더 깜짝 놀라 준비를 철저하게 했습니다. 과거 오왕 유비가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를 죽이고 봉기했던것과 마찬가지로, 주체도 파견된 관리를 죽이고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명분 조차 똑같았습니다. 황제 옆의 간악한 간신들을 죽이자 이 것이었죠. 난 - 황제 옆의 간악한 관리를 - 다스린다는 말이었기에, 이 부대는 정난군으로 불렸습니다. 정난군은 거병 1개월도 지나지 않아 수만의 군대로 불어났고, 거용관 - 회래 - 밀운 - 준화 - 영평이라는 지역들을 함락시켰습니다. 건문제 쪽도 대응해야 했습니다. 뽑힌 장군은 경병문이었는데, 경병문은 싸움에서 졌습니다. 그래서 이경륭으로 바뀌었는데, 이경륭도 패해서 덕주를 내주었습니다. 그렇다고 정부군이 지기만 했던것은 아닙니다. 정난군은 강력하긴 했지만 어찌되었건 반란군으로 사기는 뒤숭숭했습니다. 성용이라는 장군은 정난군을 상대로 대승했지만, 다음 전투에서는 패배했습니다. 정부군은 이기고도 그 위력을 못 이어나가고 곧 패배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이는 건문제의 탓이 컸습니다.
유약하다. 이 표현은 하나의 사람을 표현하기에는 아리송할 수 있지만 건문제의 경우에는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죠. 이 정도면 마음이 좋은게 아니라 유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애초에 번왕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것도 본인보다는 측근들의 의사가 더 강했고,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건문제가 말하는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부디 짐으로 하여금 숙부를 죽인 악명을 지게 하지는 말게 해다오."
힘껏 싸우라고 사기를 고양해도 모자를 판국에, 김이 빠지는 이야기를 하니 정부군이 제대로 힘을 내서 싸우기는 힘들었습니다. 세력 자체만 보면 북방의 반란군 세력에 불과한 정난군에 비해 건문제의 정부군은 지상낙원이라고 까지 불리던 소주와 향주를 비롯한 강남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고 병력도 힘도 훨씬 막강했습니다. 주체로서는 힘겨운 싸움이었는데, 비명횡사를 당하지 않은것은 순전히 건문제의 탓이 컸습니다. 정부군의 장군 이경륭이 대패했고, 책임을 따지자면 죽이는게 옳았으나 건문제는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싸워서는 힘껏 싸우지도 말라고 하고, 져도 책임을 묻지도 않으니, 정부군은 절박함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주체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려 있었지만 주체 본인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어떻게든 견디고 있었죠. 어차피 정부군이나 정난군이나 서달, 상우춘, 남옥, 부유덕, 탕화, 목영 등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내놓라 하는 명장들은 병들어 죽거나, 나이들어 죽거나, 숙청 받아 죽거나 한 뒤. 뛰어난 명장이 없는건 주체나 건문제나 마찬가지였지만, 대신 주체는 다른 사람도 아닌 본인 스스로가 뛰어난 지휘관이자 총사령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명성을 지닌 인물들은 없었지만 장교 한명 한명이 변경에서 오랫동안 있으면서 단련된 사람들이었죠. 전쟁은 막판으로 흘러가, 1402년 4월 정부군은 정난군을 계속해서 물리쳤고 정난군은 위기에 몰렸습니다. 주체의 부장 진문이 사망했고 주체마저도 사로잡힐 뻔 했으나, 주체 휘하 몽골 병사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는 탈출합니다. 싸움이 어려워지고, 날씨마저도 더워지자 정난군 내부에서는 우선 북방으로 올라가 판세를 보자는 여론이 강해집니다. 만약 몽골리아로 올라가게 된다면, 믿을 수도 없는 경제력과 어마어마한 인구를 지닌 강남의 남경에 자리잡은 정부군을 상대로 다시 한번 기회를 잡기란 어려웠을 겁니다. 주체는 힘겨운 상황이었지만 끈질기게 버티면서 북으로 올라가자는 장수들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마침 변수가 생기는데, 홍무제는 환관을 철저하게 탄압했습니다. 이 정책 자체는 건문제도 이어받았는데, 만약 주체가 무난하게 그냥 주원장의 후계자가 되었다면 주체도 정책 자체는 그대로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일단 이렇게 싸우고 있는 상황이 되자, 버러지같은 취급을 받고 있던 정부의 환관들은 오히려 첩자 역할을 하면서 내부 정보를 정난군 쪽에 흘려주게 됩니다. 이렇게 도움을 주워서 주체가 승리하면, 자신들의 처지는 올라가는 겁니다. 정보를 준다는것, 그건 반대로 역공작도 가능합니다. 환관들의 힘인지는 몰라도 남경에는 주체가 북으로 달아나기로 했다는 거짓 정보가 전해지고,
여기서 또 건문제의 끝을 보지 못하는 성격이 더해지며, 정부군은 사령관인 서휘조를 남경으로 귀환했습니다. 서휘조는 명장으로 유명한 서달의 아들입니다. 적의 사령관이 떠나게 되자 주체의 정난군은 한숨을 덜 수 있었습니다. 이떄 주체의 측근이던 요광효(姚廣孝)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다른곳은 볼 필요도 없으니 남경을 바로 들이치라고 권합니다. 주체가 패배해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것이 4월입니다. 그런데 어느새 분위기를 추스른 주체는 놀라운 기세로 남하하기 시작해 5월에 양주를 함락시키고, 6월에는 장강을 건넜습니다. 남경 쪽은 이런 엄청난 기습 공격에 패닉 상태에 빠져 제대로 대응도 못했습니다. 당황한 건문제는 의군을 모집하면서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기 위해 안간힘을 벌였고, 방효유의 계책으로 "땅을 나누자" 는 사자를 보냈는데 주체의 사촌 누나인 경성군주가 여자의 몸으로 주체의 진영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주체는 이 모든것이 시간을 끌어보자는 수작이라는것을 깨닫고, "제가 온것은, 땅이 아닌, 간신을 잡으러 온것입니다. 누님." 이라는 말과 함께 그녀를 돌려보내고 논의를 없던 일로 해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군은 반격을 해서 잠깐 승리를 거두기는 하나, 여지껏 그래왔던 것처럼 또 승기를 이어가지 못헀고 정난군은 남경을 공격했습니다. 성 내부에서는 반란자가 계속해서 나왔고 결국 건문제가 살려주었던 이경륭 등이 성문을 열어 정난군이 남경으로 물밑듯이 진입했습니다. 건문제는 이 광경을 보고 불을 질러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화재가 진압된 후 수색에 따르면 황후의 시신은 발견되었으나, 건문제가 죽은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승리한 주체는 황자징, 제태, 방효유 등 건문제의 측근들을 잡아다 죽였고, 그 집안의 여자들은 관청의 기녀로 삼거나 노예들의 아내로 던져주는 등 적개심을 거리낌없이 표출했습니다. 이중 방효유 만은 요광효의 권유로 측근으로 삼으려고 시도하나, 방효유가 주체를 비난하는 바람에 크게 분노하여 방효유의 9족은 물론,
스승-제자-친구를 포함한 10족을 몰살하고 맙니다. 무려 800여명이 넘는 인원이 죽었는데,
이 모든 인원들은 방효유의 눈 앞에서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방효유는 이 모든 참상을 지켜 본 뒤 제일 마지막으로 처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