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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포풍, 폭풍이 몰려온다!! (5)
게시물ID : history_452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름없는여자
추천 : 0
조회수 : 81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5/28 13:47:43
지난 글 : 4.포풍의 계획안과 포풍을 위한 붉은 군대의 준비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kind=&ask_time=&search_table_name=&table=history&no=4514&page=1&keyfield=&keyword=&mn=&nk=&ouscrap_keyword=&ouscrap_no=&s_no=4514&member_kind= 5. 포풍전야의 외교상황 붉은 군대가 포풍을 위한 준비를 끝내고 있는 동안, 일본제국의 멸망과 우리나의 광복이 얼마 안 남은 그 해에 일본 정계와 군부는 본토결전을 외치며 광적으로 방어 준비를 하고 있는 한편, 뒤에서는 '명예로운 조건'으로' 강화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명예로운 조건'이 무엇인가 하니 진주만 공습 이래 미국이 요구해온 무조건 항복까지는 이르지 않는 어떤 것을 뜻했습니다. 도조 히데키가 실각한 44년 여름부터 일본의 외교관들은 일본이 아직 대사관의 기능을 유지 하고 있던 스웨덴, 스위스, 그리고 소련에서 서방 연합국들과 접촉을 개시할 수 있도록 강화 탐색에 힘을 쏟고 있었습니다. 하늘에 격추도 못시키는 이런 애들이 떠다니며 폭탄비를 뿌리는데 강화하지 않을 방법 있나요? 그런데 1945년 4월, 소련은 소-일 상호 중립조약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을 것을 일본 정부에 통보합니다. 소련이 이런 식의 간접적인 대일전 참전 의사를 밝히자 일본 정부는 경악합니다. 소련의 통보에 당황한 고이소 구니아키 수상이 사임해 버리자 78세의 스즈키 간타로 남작이 수상으로 취임합니다. 스즈키 수상은 "우리에게는 싸우는 길 이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라고 공식적으로 성명을 내보냈지만 역시 한편으로는 도고 시게노리 외상에게 어떻게는 강화를 모색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니 이 노력은 이런저런 이유로 손발이 계속 맞지 않고 있었습니다. 해군 대장 출신의 스즈키 간타로 영감님 에도 시대에 태어난 마지막 총리입니다. 도고 시게노리 외상.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 도공의 후손으로 아버지 박수승이 도고로 개명하기 전의 본명은 박무덕이었습니다. 일본 정부 내 온건파로서 진주만 공습에 반대하는 등 도조와 마찰이 잦았습니다. 베를린 함락 직전인 5월 초에 베를린 주재 일본대사관 무관인 후지마라 요시지로 중령은 스위스로 잠행하여, 베른 주재 OSS 책임자인 앨런 덜레스와 강화 협상을 개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후지마라가 그의 계획을 도쿄에 보고하자, "적의 계략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고, 후지마라는 그의 계획을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5월 12일, 강화 안건이 전쟁지도최고회의에서 공개리에 제출되었습니다. 그 협의외에서는 속칭 '6인 의원'으로 알려진 수상, 외무상, 육해상, 육해군 참모총장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회의 중반에 이르러 해군상 요나이 미츠바사 대장은 소련에게 일본과 서방 사이의 교섭을 주선해주도록 요청하자가 무뚝뚝하게 제안함으로서, 그의 동료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나 도고 외상은 요나이의 생각이 비현실적이라며, 오히려 곧 소련이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해올 것이라고 응답했습니다. 그러자 육군상 아나미 고레치카 대장은 소련이 미국과 아시아 영토 사이의 완충국으로서 강력한 일본을 선택할 것이기 대문에 쉽게 소련에 접근할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환상 속에 빠져사는 븅신색히 -_-) 이딴걸로 무장하고 본토결전하겠다고 설치는 놈들이 잘도 강한 나라의 강한 군대겠습니다. 육군상은 환상속에 빠져서 제안을 했지만, 스즈키 수상은 도고에게 소련에 접근할 정책수립을 위한 메모를 초안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스즈키는 만약 자기가 반대한다면 아나미와 육군이 독자적으로 스탈린과 접촉할 것을 두려워했고, 도고도 마지못해 동의하고 말았습니다. (군부장악력이 얼마나 안습이길레 -_-) 이틀 후인 5월 14일, 도고는 그의 메모를 최고협의회에 제출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읽었습니다. 소련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일본이 중립을 지켰기 때문에 그 덕을 본 것이다.(ㅈㄹ. 관동군이쳐들어가 봤자 시베리아의 거름 신세.)미국은 장차 소련의 적이 될 것이며, 따라서 소련은 일본이 국제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우므로서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메모 내용은 결과적으로 한심한 전망이었지만 도고는 뒤에 제법 현실적인 경고를 덧붙였습니다. 만약 스탈린이 평화 중개 역할을 하면 그에 대한 대가로 "상상도 못할 만큼 큰" 영토를 요구할 것입니다. 그래도 계속 소련을 통해 강화를 추진하시겠습니까? 도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6인 위원'들은 전원 일치로 그의 진술을 승인했고, 즉시 협상을 개시하도록 그에게 지시했습니다. 아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ㅄ들을 봤나 ㅋㅋㅋㅋㅋㅋㅋㅋ 한편 일본 전국에 B-29의 폭격이 계속되자 도쿄 주재 소련 대사관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소련 대사관이 위험해지자 소련 대사 야코프 말리크를 도쿄에서 110킬로미터나 떨어진 온천지 고라에 머물러 있게 되면서 소련에 대한 일본의 첫 접촉을 지연시켰습니다. 야코프 알렉산드로비치 말리크 말리크는 훗날 한국전쟁 때의 UN주재 소련 대사가 되어 한국전쟁사에 이름을 올립니다. 말리크를 만나기 위해 전쟁 전 수상이었고 모스크바 주재 대사를 지낸 바 있는 히로타 고키가 여행하는 도중 우연히 들린 것처럼 꾸며 고라의 말리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6월 3일 저녁, 만찬을 함께 하면서 히로타는 말리크 대사에게 독일에 대한 소련의 승리를 축하하며, "일본과 소련이 이번 전쟁에서 서로 싸우지 않은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는 계속하여 일본은 진정으로 일-소 불가침조약의 갱신을 바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히로타는 또한 말리크에게 소련이 일본의 대미 평화 협상을 도와줄 수 있겠나교 타진했습니다. 말리크는 히로타와의 만찬부터 그 3주일 후에까지 계속된 회합에서, 정중하지만 대단히 애매한 태도로 소련의 중개에 관해 어떤 언질도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은 일본이 어떤 애원이나 간청을 하던 마이동풍으로 흘려버리라는 지시가 이미 스탈린으로부터 내려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무렵, 워싱턴의 미국 지도자들도 일본의 대소련 접근을 알고 있었습니다. 스탈린이 알려 준 것은 아니었고, 1940년에 미육군 통신부대가 일본의 극비 외교 암홀르 해독한 이래 미국은 일본 정부의 비밀 통신 내용을 속속들이 알면서 비밀리에 이를 처리하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 일본의 의도를 안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7월 포츠담 회담이 시작됐습니다. 7월 17일에 스탈린은 트루먼과의 첫 대면을 위해 트루먼이 머물고 있는 포츠담의 별장에 도착하였습니다.트루먼은 그를 따뜻이 맞이했습니다. 스탈린 서기장, 정말 잘 오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ㅋㅋㅋ 원폭실험이 성공해서 니들이 개입해줄 일이 없어졌으니 얼마든지 여유부려도 된다능 ㅋㅋㅋ) 환대해 주셔서 고마울 따름이오 (이색히 난데없이 왜저러지? 뭐 숨겨놓은 거라도 있나?) .통역을 통하여 스탈린은 트루먼에게 잡담을 하면서, 일본의 평화 교섭 요청에 대해 그가 구실을 붙여 질질 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연방은 이런 수법으로 야뽄스키들을 물먹이고 있다오. 정말 잘하고 있지 않소? ㅎㅎㅎ 오, 정말 대단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미 통신감청으로 다 알고 있었다 ㅄ아 ㅋㅋㅋ) 우리 붉은군대의 준비가 완성되었소. 만주는 몇주일 내에 붉은 포풍에 휩싸이게 될 것이오! (어라, 이제 그럴 필요 없는데. 원폭의 존재를 저놈에게 말해야 하나?) 이튿날, 트루먼과 처칠은 점심 식사 때 별도로 만나 미국측이 원자폭탄에 관하여 소련에 알릴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처칠은 대답하기를 만약 대통령께서 원폭의 존재를 스탈린에게 말한다면 스탈린은 처음부터 자신을 그 계획에 은밀히 참여시키지 않은 것에 화를 낼 것이오. 흠, 그런가요? 그래도 일단 알려줄 건 알려줘야 했기에 7월 22일, 점심시간에 트루먼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스탈린의 통역에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태연하게 걸어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 사용하려는 매우 강력한 폭발물이 완성되었는데, 우리는 그것이 전쟁을 끝나게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당신네 대원수에게 전해 주시오. 스탈린은 냉담하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일본에 대해 유효하게 사용되기를 바라오. 트루먼이 '핵'이라든가, '원자'라는 말을 신중히 회피하여 그 무기를 설명한 짧은 대화가 끝난 후 처칠이 트루먼에게 "어떻게 되었소?"라고 물었습니다. 트루먼은 "그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스탈린이 트루먼에게 자세히 설명을 들을 까닭은 없었습니다. 빌어먹을 자본주의자노무 색히들. 우리 연방은 43년부터 이미 맨하튼 계획에 대해 스파이들을 통해 파악하고 있었다! 나와 우리 연방을 속여먹으려 해? ㅅㅂ놈들!! 어찌 되었건 포츠담 선언이 트루먼, 스탈린, 처칠, 장제스에 의해 승인되고 7월 25일 저녁, 포츠담 선언이 전세계에 방송되었습니다. 도쿄의 전탐반은 7월 27일 아침에 선언문이 방송되는 것을 청취하고, 그 번역본을 황실 도서관에서 회의를 하고 있는 내각에게 급히 갖고 갔습니다. 도고 외상은 포츠담 선언에서 협상 활동을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여유를 발견했다고 생각했지만 도요다 소에무 해참총장은 '일본 정부로서는 그 선언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전연 고려도 하지 않을 것."임을 즉시 발표하자고 요구했습니다.(이런 미친색히 -_-) 결국 내각은 스즈키 수상이 그 선언을 노골적으로 거부하지는 않는 선에서 비난하도록 하자는 선에서 합의했습니다. 신문들에게는 트루먼의 말 가운데 거슬리는 부분을 삭제하여 변형시킨 것만을 활자화하도록 허용하되, 이에 대한 논평은 금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스즈키 수상은 어마어마한 대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이날 오후 4시, 그는 기자회견에서, "내 의견으로, 포츠담 선언은 단지 카이로 선언을 내용만 바꾸어 말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정부로서는 이것을 묵살해 버릴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문제는'묵살'이란 말은 우리가 다 아는 '문제로 삼지 않고 무시하다.'라는 뜻으로 자주 쓰이지만 일본어에서는 '노코멘트'의 뜻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스즈키 수상이 전달하려고 했던 뜻은 '노코멘트'로서 정부는 그 선언문을 계속 검토할 것이며, 그에 대한 결론은 아직 공개하지 않을 것이라는 거였지만, 기자들은 당연히 '무시하다'로 '묵살'을 해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들의 기사는 정부가 포츠담 선언을 거부하리라는 가상에 바탕을 둔 것이었던 것입니다. 야이 망할 기자색히들아, 그게 아니야!!! 으헝헝 내가 왜 '묵살'이라고 말했을까 ㅠㅠ 3일 후, 뉴욕 타임즈는 스즈키의 말이 사실상 일본이 그 선언을 정면으로 거부했다는 것을 뜻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이리하여 7월 30일자 각 신문들의 전문 표제어는, "일본, 공식적으로 연합국의 최후 통첩을 거부."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미국 정부의 판단 또한 같았습니다. 그리고, 8월 6일...... 다시는 이게 또 쓰이지 않기를 빕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자,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관으로 도고 외상의 전문이 발송되었습니다. 전문에는 "상황 심히 심각함. 신속한 소련의 태도 표명이 요구됨. 즉각적인 대답을 얻어내기 위한 한층 더한 노력 요망."이라고 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걸 받고도 사토 나오타케 일본 대사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사토는 항상 "모스크바는 전쟁 종결을 위한 중재나 아직 거의 1년 정도나 유효한 소-일 중립조약의 갱신에 대해 전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라는 암울한 보고만을 보내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사토는 이제 더 이상 행운이 찾아오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더우기 회신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8월 8일, 소련 외상 몰로토프의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우리 좀 만나죠. 저녁 8시 ㅇㅋ? 이건 놀랄만한 일이었는데 몰로토프는 최근 사토의 면담 요청을 아주 무시하거나 또는 여러 구실을 내세워 그것을 회피해왔던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날 오후 약속 시간을 오후 5시로 앞당기자는 소련 외무성의 전화를 받았을 때, 사토는 더욱 놀랐습니다. 사토가 크렘린에 나타나자 몰로토프는 지체 없이 그를 들어오게 했습니다. 대사의 러시아식 격식 차린 인사 치례를 무뚝뚝하게 가로막은 몰로토프는 말했습니다. 일본 정부에 대한 소련 국가 명의의 통고문이 여기 있는데, 본인은 이것을 당신에게 전하고 싶소. 사토가 외상이 권하는 의자에 앉자, 몰로토프 자신은 긴 타입을 위에 앉아서 문서를 읽어나갔습니다. 독일의 패배와 무조건 항복 이후, 일본은 아직도 계속하여 전쟁을 주장하는 유일한 강국으로 남아 있다. (이하 동맹국들에 대한 소련의 신성한 의무에 관해 4개 항목에 걸친 설명은 생략) 이상과 같은 견지에서 소련 정부는 내일, 즉 8월 9일(모스크바 기준)부터 일본과 전쟁 상태에 들어감을 선언하는 바이다. 항의한다는 것이 아무 소용 없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남은 유일한 자산은 그의 개인적 위엄뿐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사토는 정중한 태도로 물러났습니다. 몰로토프는 자신이 사토 대사에게 개인적으로 정중한 배려를 해주겠다는 것과, 대사가 원하는 어떤 무전 송신도 할 수 있으며, 원한다면 암호를 사용 할 수도 있다는 보장은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토가 대사관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전화가 끊겼고, 무선 통신 장비도 압수당한 뒤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상업 통신을 이용하여 보내려 했던 전문도 어찌 된 셈인지 전신국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사토가 몰로토프의 사무실을 떠난 지 2시간 만에 자바이칼 전선군의 선봉인 제6 근위전차군이 모든 전차에 시동을 걸었습니다. 포풍이 진짜 몰려온다!!! * 옮긴이 주 1) 본문 상기의 본토 결전용 무기는 실존 하는것입니다, 이처럼 대개의 본토 결전용 병기들은 학교 공작시간이나 개인 여가 시간에 제작하도록 했고 주요 재료는 학급에서 사용되는 책걸상등의 가구류(...)나 대나무등 주변에서 쉽게 구할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고 그 종류 또한 그림의 단발 화승총이나 활 그리고 대전차 활 과 대전차 창 (....), 성냥 수류탄, 죽창부터 대공용 투석기(...)나, 대나무 로켓등이 있습니다. 또한 위문편지 보내지 말기 운동이라 하여 차라리 그런데 쓰일 종이를 만들 목재라면 창 한자루 라도 더 만들자는 운동도 '나라'에서 벌인바 있으며 1억 총 옥쇄 작전이라 하여 전 국민을 대상으로 자살 돌격을 장려한 바 있습니다. 같은 추축국이지만 독일의 예비군과 비교해 보자면 참으로 안쓰러운 모습이죠, 물론 성능이야 어떻든 미국의 바주카를 모방한 대전차 화기등 기타 제대로된 화기나 장비, 차량 등도 있었습니다만,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국민들을 무장시키며 장려시키는 바에 있어 이러한 점은 결코 긍정적일수는 없는 노릇이죠, 2) 일본제국은 명확하게 정치 체제를 정의함에 있어 논란이 있으나 군국주의적 색채가 강하다는것은 화자마다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즉 군을 위해 사회 전반을 비릇한 국가 그 자체가 존속하는 바, 외교적이나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대본영의 입김을 무시할수는 없는 노릇이었는데 그 대본영의 결정권자들 역시 천황과 국가를 위한다고 했지만 천황이 그 들의 의견을 따르는게 당연한 전통이었으며 그들 덕분에 미국이라는 공전절후의 대국이 전쟁에 참전했고, 그 들의 결정이 낳은 결과로 국가가 망하는 계기가 찾아오게 된것이 아이러니 하기도 하고 어찌보면 재밌는 부분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사실상 아직도 이러한 일본 제국에서 일본국으로 바뀐 지금도 남은 문제는 많습니다. 가령 비 백인과 백인간의 피해자 차별과 같은 뿌리 깊은 이해할수 없는 사고 방식 등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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