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 : 2. 만주의 지형과 소련군의 딜레마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kind=&ask_time=&search_table_name=&table=history&no=4504&page=1&keyfield=&keyword=&mn=&nk=&ouscrap_keyword=&ouscrap_no=&s_no=4504&member_kind= 3. 바실레프스키의 등장 이 연재의 주연은 만주 전역은 물론이고 독소전쟁 전체에서도 주코프와 더불어 절대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소연방 원수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 입니다. 국내에서 바실레프스키, 바실리예프스키, 바실리에프스키, 바씰레프스키, 바실렙스키 등등의 아주 다양한 표기법을 가지고 있는 이 바실레프스키에 대해 알려진 게 많이 없고 8월 포풍의 전개과정에도 바실레프스키의 존재가 절대적이기에 잠깐 바실레프스키에 대해 연재를 할애해 보겠습니다.
중장 시절의 바실레프스키 나이 먹은 러시아인 특유의 곰상(-_-)이지만 그래도 제법 미남형입니다. 바실레프스키는 1895년 9월 30일에 러시아 이바노프 주 노바야골리티하에서 가난한 러시아 정교회 신부의 여덞 자식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독소전쟁에서 활약한 다른 소련 장성들이 다 그렇듯이 바실레프스키는 무척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 왔습니다. 아버지는 바실레프스키를 신학교에 보내 자신처럼 정교회 신부가 되게 하고 싶어했지만 바실레프스키는 농업 기사나 측량 기사가 되기를 더 원했습니다. 그 때, 그의 운명을 바꿔 놓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납니다.
바실레프스키는 전쟁이 일어나자 '내 안의 애국심이 불타올랐다.'라는 낯간지러운 표현을 회고록에 써 놓고 알렉산드르 군사학교에 입학해 4개월의 전시 속성 교육을 마치고 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이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바실레프스키는 고작 22세에 대위로 승진해 활약하다가 혁명이 일어나자 붉은 군대에 가담했습니다 대위 시절의 바실레프스키. 뭇 러시아 아가씨들을 홀리고 다닐 외모입니다. 하그악 하그악 붉은 군대에 가담한 바실레프스키는 소련-폴란드 전쟁에 참전, 공훈을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 제48 소총사단장이 되고 그의 능력에 감탄한 보로실로프, 샤포시니코프, 투하체프스키 등 고위 장성들의 총애를 받게 됩니다. 31년 5월에는 노농적군훈련전투국에 배속되었는데 여기서 만난 인물이 바로 주코프였습니다. 주코프는 회고록에서 당시의 바실레프스키를 이렇게 평했습니다. "자신이 지휘관으로서 뭘 해야 할 지, 그리고 모두에게서 존경받는 방법을 아주 잘 아는 인물.' 바실레프스키는 이후 36년에 창설된 보로실로프 참모대학에 입학해 철저한 참모장교의 교육을 받게 되는데 졸업 후 스탈린의 대숙청이 벌어 집니다. 바실레프스키는
이 숙청의 수혜자 중 한명으로서 상급자들이 죄다 시베리아로 가거나 좌천된 덕분에 삽시간에 쾌속승진을 거듭하게 됩니다. 41년 6월, 독소전쟁이 발발했을 당시에 부참모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바실레프스키는 당시의 총참모장 샤포시니코프 원수를 잘 보좌하고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뛰어난 작전 입안 능력과 행정능력을 보여줘서 스탈린의 신임을 얻게 됩니다.
1942년 7월에 샤포시니코프 원수가 병환으로 총참모장직을 사임하게 되자 바실레프스키는 자동적으로 총참모장 직과 국방 인민 위원 보좌관 직책을 얻게 되어 총군부사령관 주코프와 2인조를 이루면서 그 능력의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총참모장이 된 바실레프스키는 떨어지는 소련군 전방 사령관들의 지휘를 통제하고 작전 시 각 전선군 간의 행동을 조율하기 위해 스타브카 대리 제도를 만들고 주코프와 함께 스타브카 대리가 되어서 함께 최전방에 서서 전선을 시찰하고 필요할 때는 현장 지휘에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전선 시찰 중인 바실레프스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바실레프스키는 엄청난 활약을 하게 되는데 그의 역작인 '천왕성 작전'을 입안한 것입니다. 천왕성 작전의 개요야 다 알고 계실 터이니 패스하고 그 결과로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역포위에 성공해서 혈투의 승자가 되었으니 바실레프스키는 큰 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주코프의 화성작전은 뺍시다. 이상하게 천왕성 작전의 입안자가 주코프로 알려져 있지만 주코프는 바실레프스키의 짜놓은 작전안 수정에 조금 참여하고 작전 개시를 스탈린에게 재가받은 것 외에는 천왕성 작전의 입안과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이후 바실레프스키는 쿠르스크 전투, 드네프르강 돌파, 우크라이나 탈환, 바그라티온 작전, 비슬라-오데르 작전 등 이후 벌어진 소련의 모든 공세 작전 입안에 총참모장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으며 심지어 그 활약과 공헌이 주코프를 능가한다는 학자들도 있을 정도로 엄청난 능력을 발휘합니다. 바실레프스키가 총참모부에서 머리 굴리며 작전 짜 놓은 것들을 보면 정말 바실레프스키는 자신에게 가장 걸맞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갔다고 밖에 말 할수 있습니다.
또한 총참모장으로서 바실레프스키의 장점은 그 둥근 성격에 있었습니다. 소련군 내에서 총군부사령관과 총참모장의 대등한 권위를 생각해 보면 주코프와 충성경쟁을 벌이며 갈등을 빛을 기미도 여러번 있었지만, 둘 다 그런거 없었습니다.
성미 급하고 다소 자만심이 강한 주코프라도 거의 모든 부분에서 바실레프스키와의 협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작전 입안의 대부분을 바실레프스키와 공동으로 처리하려 할 정도로 주코프는 바실레프스키를 훌륭한 파트너로 생각했고 바실레프스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과감하지만 신중함과 정밀성이 부족한 주코프에게 바실레프스키의 신중함과 세심함은 필수요소였고, 참모장교 출신이라 추진력이 부족한 편인 바실레프스키에게는 주코프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점을 볼때 화성작전을 바실레프스키가 손을 봐 줬다면 주코프는 최대의 패배를 당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리하여 이 둘은 제2차 세계대전 최강의 2인조가 되서 소련의 승리를 이끕니다.
"너 나 없으면 어떻게 사니?" "너 나 없으면 어떻게 사니?" (주코프와 바실레프스키 단 둘이서 찍은 사진을 못 찾아서 이걸로 대체합니다.)
또한 불 같은 성미의 주코프가 스탈린과 갈등을 빛을 때 마다 항상 부드럽고 설득력 있는 말솜씨로 스탈린을 설득해 결국 주코프와 총참모부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는데 큰 재능을 발휘했고 대부분 스탈린은 고집을 꺾고 바실레프스키의 설득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래도 스탈린이 요지부동일 때는 부참모장 안토노프가 투입됬습니다.) 또한 스탈린이 총참모부를 시험하기 위한 끝없는 밤샘근무를 안토노프와 함께 무리 없이 소화해내는 굇수같은 정신력까지 보여 줍니다. 단점이라면 억양 없고 단조롭고 졸린 목소리 때문에 브리핑 때마다 스탈린의 짜증을 유발하게 한 다는 것이 있었지만 그건 능력과 상관 없으니 -_- 하지만 바실레프스키가 매번 큰 공을 세움에도 불과하고 1945년 2월에 스탈린의 미움을 산 바실레프스키는 총참모장 자리에서 직위해제되고 그 자리는 만년 부참모장 안토노프가 차지하게 됩니다. 바실레프스키를 신뢰하던 스탈린이 왜 난데없이 그를 총참모장 자리에서 내쫓은 지는 잘 이해가 안갑니다. 스탈린의 개인 안보 보좌관으로 항상 스탈린 옆에 붙어다니던 안토노프가 농간을 부린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바실레프스키는 안토노프를 크게 신뢰했고 안토노프도 바실레프스키를 항상 존경한 지라 상당히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직위해제 당한 바실레프스키는 제3 발트 전선군 사령관인 이반 체르냐호프스키 대장이 전사하자 제3 발트 전선군을 맡아 동프로이센에서 벌어지는 작전을 지휘하고 쾨니히스베르크를 함락시킵니다. 그 당시의 제1,2 벨로루시 전선군, 제1,2,3,4 우크라이나 전선군, 제1,2,3 발트 전선군 등 많은 전선군 중 하나의 전선군 사령관이 되는 등 바실레프스키의 권위는 상당히 추락한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만약 그가 그때 까지도 총참모장 이었다면 주코프와 더불어 베를린에 입성해 기념 사진을 잔뜩 찍고 연합국과의 회담과 협상에 여러 번 참여해 그 자취를 크게 남겼을 테니 바실레프스키 입장에서는 무척 아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바실레프스키는 다시 스탈린의 부름을 받게 됩니다. 바그라치온 작전이 준비 중이던 44년 6월에 스탈린은 이미 바실레프스키를 불러서 독일이 망한 후 만주 관동군을 공격할 때 바실레프스키가 총지휘와 작전을 맡게 될 것이라고 알려줬었고 바실레프스키는 그 이후 총참모장 자리에 있으면서, 그리고 제3 발트 전선군 사령관으로 좌천된 이후에도 짬짬이 만주 침공 계획을 짜오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45년 2월
22일 2분 22초 5월 27일, 마침내 만주 침공 작전인 '8월
포풍 폭풍 작전'을 완성한 바실레프스키는 스탈린의 재가를 받는데 성공합니다!
바실레프스키의 포풍은 완성되었고 이제 몰아닥칠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붉은 군대 내에서는 힐한골 전투에서 일본군과 실전을 치른 주코프가 대일전을 맡아야 한다는 중론이 있었지만 스탈린은 바실레프스키를 택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전 2가지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첫째는 주코프에 대한 견제입니다. 아무레도 전쟁에서 이길 때는 참모보다는 사령관이 주목받다 보니 주코프는 그 막강한 독일 국방군을 패배시키고 진두지휘하여 베를린까지 함락시킨 독소전쟁 최고의 공헌자이자 1등공신이 되었습니다. 주코프의 권위와 위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그 명성은 붉은 군대와 소련 인민 전체에 퍼졌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모든 일을 주코프와 바실레프스키, 그리고 사령관들에게 다 맞겨 놓은 스탈린 입장에서는 주코프의 존재에 불안감을 느낄 만 한데
오만한 부분이 많은 주코프는 자신의 전공을 항상 자랑하는 자뻑증세를 여러 번 보여줬고 은근슬쩍 정치적 야심까지 드러내기도 했으니 스탈린 입장에서는 주코프의 위신을 크게 제한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만약 주코프를 대일전 최고 사령관으로 삼는다면 주코프는 '독일의 정복자'이자 '일본의 정복자'라는 2관왕이 되어 희대의 타이틀을 쥐게 될 테니 스탈린 입장에서는 절대 피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스탈린은 주코프를 견제하기 위해(물론 둘은 서로 싸우는 사이가 아니었지만) 바실레프스키를 대일전 최고 책임자로 삼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바실레프스키의 스타일입니다. 과감하고 패기 넘치지만 세심함이 부족하고 적잖은 인명 손실이 뒤따르는 주코프식보다는 다소 소극적인 편이지만 확실하고 최대한 손실이 적은 바실레프스키식이
당시 커다란 인명 손실을 본 스탈린 입장에서는 바실레프스키식이 더 좋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개털 관동군을 상대로 쓸데없는 인명 손실을 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이리하여 바실레프스키는 8월 포풍 작전을 입안하고, 작전 수행과 지휘를 위해 아시아로 날아갑니다. * 옮긴이 주 1) 대 숙청 : 주요 입안자 겸 실행자 니콜라이 예조프의 이름을 따 예조프쉬나 라고 부르며, 1936년에서 1938년 동안 정치, 경제, 국방 등 소련 각계에서 스탈린과 거리가 있다, 스탈린을 고민한다 싶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벌어진 학살극입니다. 막장이라는게 어떠한 점에서 막장인가 보자면 사망자만 100만여명,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 135만여명을 떠나 다섯명 뿐인 원수 중에 생존자가 둘 밖에 없습니다, 숙청을 담당한 NKVD 내부인민위원회 즉 비밀경찰들도 상급자가 바뀌면 숙청당했습니다. 1934년 17차 전당대회를 기준으로 대의원 1966명중 1108명이 체포되고 그 중 반 이상이 사망자에 포함되었습니다, 당 최고기관인 중앙위원회 위원 139명중 110명이 사망했습니다. 말이 필요가 없죠, 2) 홍 진호 : 전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이며 현재는 리그오브레전드의 감독을 맡고 있는 분이십니다. 저그라 불리는 게임 내 종족을 주로 사용하며 공격성이 짙은 플레이 방식으로 폭풍 저그 라고 별명이 붙을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었습니다. 우승기록이 없지는 않지만 전부 공식기록에서는 제외되는 터라, 준 우승으로 유명하여 이러한 준 우승의 위명으로 '2'라는 숫자 요소는 대개 홍진호와 연관이 되어 있다고 볼수가 있습니다. 또한 홍진호의 성인 홍을 변형한 '콩', 그리고 방송에서 황진호라 잘못 표기된 바에서 비릇한 '황' 등의 접두사와 형태소 가 앞서 언급한 '2'라는 숫자 요소는 다양한 측면에서 개그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3) 천왕성 계획 : 독일군의 우익이 상대적 약체인 루마니아군으로 방어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한 독일군을 약 100만의 병력과 수백여대의 전차로 '한겹 더 포위'해서 그대로 괴멸시키는 작전을 말합니다. 4) 화성 계획 : 천왕성 계획에 더하여 르체프 돌출부의 독일 중부집단군도 포위섬멸하려는 대규모 작전입니다만, 투입할 타이밍을 잘못잡아 전차와 보병이 뒤엉키는 바람에 진격이 꼬여버렸으며 (소련군에 있어 늘상 벌어지는 문제라 하나 천왕성작전과 비슷한 규모인 100만여명의 병력이라는 점이 큰 문제가 됩니다.) 또 독일군이 공세에 대응하여 충분한 가용 예비 전력을 활용하여 대규모 기동전을 벌이는 바람에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5) 할힌골 전투 : 1939년 5월 11일부터 9월 16일까지 몽골 영토 내에서 벌어진 몽골과 만주국의 대리전입니다. 참모본부도 모르는 만소국경분쟁처리요강이라는 대한독립유공자 츠지 마사노부가 작성한 마법의 주문(...)을 가진 관동군에 의해 독자적으로 벌어진 전투로서 소련의 승리로 막을 내렸으며 당시 일본은 독소전쟁에 맞춰 소련을 공격하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큰 충격을 입었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으로서는 그 외에 세계 최초의 대규모 전차 기동전을 벌인 기동전의 교훈이나, 전투에서 배운 종심작전이나 대 전차전 등의 교훈등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는 혹은 안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아 배운게 있긴 합니다, 일본 육군 항공대는 이 전투로 말미암아 조종사 보호장치 도입에 적극 나서게 됩니다. 해군이나 공군은 뭐 음..라이터죠,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