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새벽5시... 자고있던 침대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뭔가 생각할 시간도 없이 침대에서 떨어져버렸다. 뭐야 꿈꾸고 있는건가?
책상위에 물건들도 이미 제자리가 아니다. 옆에 떨어진 시계는 5시를 가르키곤 멈춰있었다.
몸을 일으키려하지만 맘대로 되지 않는다.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다 침대를 짚고 겨우 일어섰다.
온갖 물건들이 소리를 내며 떨어지거나 흔들리고 있었다. 눈앞이 어지럽다.
엉거주춤 자세를 유지하려 애써보지만 다시 주저앉고 만다.
지진이라... 두렵거나 무섭다기보단 어처구니없다.
이런건 생각해보지도 않았는데...이정도로 쎈 지진이 일어날줄이야.
우리나라는 지진안전지대가 아니였던가...??
빨리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어도 1분이상은 아닐거야. 일단 밖으로 나가자.
옷을 찾았다. 이런순간에 옷을 입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미친놈처럼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바지를 움켜쥐곤 방문을 열었다. 이젠 아예 침대며 책상이 움직인다. 나가기가 쉽지않다.
이리저리 가구들을 피해 복도로 나왔다. 옆집에서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나왔다.
두려움이 가득한 눈을 보며 내 눈빛에도 두려움이 묻어나올까 걱정이 됐다.
여태 인사도 못한 이웃을 이런 모습으로 만난다는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안녕하세요]
어처구니없게 인사를 해버렸다.
여자는 손잡이를 놓치고 쓰러졌다. 이런...
얼른 여자를 부축해 계단을 내려왔다. 몇번을 넘어질뻔하면서 아파트 정문을 통과해 주차장에 여자를
앉혔다. 이제 지진은 많이 약해져 약간의 흔들림이 있을뿐이였다.
웅성웅성 주차장은 아파트를 빠져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얼른 바지를 주워입었다. 모두들 황급히 빠져나오느라 가관이 아니였다.
속옷바람은 흉도 아니였다 거의 알몸으로 나온 부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동차 사이에서 나오질 못했다.
[괜찮아요?]
아직 정신을 못차리는 옆집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20대후반? 긴머리에 갸름한 얼굴 미인이다. 미리 인사좀 할걸 그랬나
[...네 괜찮아요...고마워요]
[아 뭘요. 혼자 사시나봐요? 갑자기 이게 뭔일인지 하하 지진이 나긴 나네요]
[...네]
바보같이 말해버렸다. 어색하게 웃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벌써 이리저리 전화를 하면서 안부를 묻고있었다.
[이거 전화가 안되네? 통화량이 많아 어쩌구하는데? 집전화로 해볼까?]
옆에 있던 남자가 투덜대며 아파트로 들어가려했다.
[이봐요 아직 들어가면 안돼요. 여진이나 머 이런거 있다잖아요. 좀 기다리세요]
40대쯤의 아줌마가 말린다.
[아줌마 이정도 지진에 여진이면 아까보다 더 약할거에요. 이정도는 상식아닙니까. 자자 걱정마시고
이제 들어갑시다. 날도 추운데 여기서 날 샐겁니까? ]
남자는 대답도 듣지않고 아파트로 들어가버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집에 들어가서 옷이라도 챙겨입고 나오자고하며 서둘러 아파트로 들어갔다.
주차장에 남은 몇몇은 전화도 하고 차량에 있던 tv로 뉴스에 지진에 대한 내용은 없는지 보고있었다.
[이거 지진난지 10분도 넘었는데 아직 뉴스도 없고 큰 지진이라도 나면 어떻할려고 이모양인지 나참]
누군가가 큰소리로 한탄했다.
[그러게요. 일본은 지진나면 바로 문자메세지도 보내준다는데 우리나란 멀었어요 멀었어.]
또다른 사람이 받는다.저마다 불평을 터트렸다.
[저기 아가씨 괜찮으시면 이제 들어가는게 어떨까요? 머 이젠 안전해진거 같은데...]
조심스럽게 물었다.
[... 다리에 힘이 빠져서요. 너무 놀랬나봐요. 좀 쉬었다 상황보고 들어갈게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이럴때 안도우면 사람인가요 하하 머 날도 상쾌한데 좀 앉았다 들어가죠머]
옆에 털썩 앉으려 엉거주춤 자리를 잡았다.순간 땅이 솟아오르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앉으려고 하는데 엉덩이가 땅에 닿기도 전에 먼저 땅이 엉덩이를 치는것이였다.
어이쿠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거 모양새가 말이 아닌걸 생각하며 일어나려는데 귀를 찢을듯한
굉음과 함께 미친듯이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비명소리가 들리며 사람들이 엎드렸다. 아니 쓰러졌다해야하나.
수십대의 차들이 이리저리 부딪혀 경보기가 시끄럽게 울려댔고
그렇찮아도 땅이 흔들려 정신없는 사람들을 패닉으로 몰아갔다.
난 여자의 머리를 감싸안으며 어서 이순간이 끝나길 바랬다.
[!!!!]
여자가 일어서며 뭔가 말했지만 들리지않았다.
[네? 머라구요? 어서 엎드려요 차밑으로 들어갑시다]
[여길 벗어나야한다구요!!. 아파트가 무너지면 여기도 위험해요. 공터로 가야해요!!!]
여자는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일어나기도 힘든데 어딜가요. 조금만 참아요 곧 끝날겁니다.]
여자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안돼요 빨리 일어나요 아파트가 무너진단말이에요. 여기있으면 죽어요]
내손을 잡아끌며 여자는 비틀거렸다.
무너진다니... 조금전 지진으로 정신없이 건물을 빠져나올때도 그런 생각은 하지않았다.
그냥 본능적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뿐. 어느정도 재미있다는 생각마저 들었었다
사실 지진은 그렇게 위험한 자연재해가 아니다. 넓은 벌판에서 지진을 만난다면 그저 흔들림에
넘어지면 그만인것이다. 지진이 무서운건 건물이나 다리같은 구조물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건물이 무너질정도로 지진이??? 흥 웃음만 나왔다.
이 여자가 두려움에 정신이 나갔나보다. 머 일단 혼자 놔두면 위험할테니 따라가자...
[알았어요 알았어 갑시다.]
[저기 공원까지 가야해요 서둘러요]
100미터쯤 떨어진곳에 공원이 보였다. 가다가 지진이 끝날거 같은데... 속으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자와 손을 잡고 비틀거리며 공원을 향해 뛰었다. 흔들리는 땅위에서 뛰기란 쉽지않았다.
거기다 차량이 이리저리 움직여 부딪힐 위험도 있었다.
[조심해요!!!]
뒤에서 누군가 외쳤다. 순간 머리위가 서늘한게 생각할 겨를없이 여자를 밀치며 앞으로 굴렀다.
'꽝!!!' 뭔가 떨어졌다. 베란다 창틀이였다. 창틀이 떨어지다니... 고개들 들어 아파트를 올려보았다.
이미 여기저기 창문은 깨어져 있었고 건물은 금방이라도 쓰러질것 같았다.
이거 장난이 아니구나. 난 여자손을 잡고는 정신없이 공원으로 뛰었다. 아니 마음은 뛰고 있었지만
쓰러졌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갈뿐이였다. 반정도 도착했을때였다.
길 건너편 5층건물이 굉음을 내며 폭삭 주저앉았다. 여러가지 소리가 섞여 구분조차 가지않았다.
그것이 시작이였다 뒤쪽에서 먼지바람이 몰려왔다. 아파트는 허리가 부러지며 주차장을 덮치고 있었다.
[어...]
말이 나오지않았다 이게 정말 꿈이 아니고 현실인가...
멍하니 뒤를 보던 나를 여자가 세게 잡아끈다.
[빨리요]
오히려 여자쪽이 더 냉정한 모습니다. 정신 차리자...
[갑시다]
다시 공원을 향해 뛰었다. 주위에서도 공원을 향해 가는 사람이 보였다.
울부짖으며 기어가는사람, 구르듯이 넘어지는사람 강아지를 안고 뛰어가는 여자...
고요하던 새벽이 지옥으로 바뀌는건 순식간이였다...
아비규환속에 여자와 나는 공원에 도착해 엎드렸다. 땅은 아직 일렁이듯 흔들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이번엔 여자가 물어왔다.
[네? 아 괜찮습니다. 아가씨도 다친데는 없어요?]
[넘어져서 까진거 빼고는 괜찮아요.]
아 내가 밀었었지...
갑자기 다리쪽이 불에 댄듯 화끈거렸다. 살펴보니 찢어진 바지밑으로 유리조각이 보였다.
[어머 유리잖아요. 피가 많이 나네 이리줘봐요.]
[괜찮아요 지진이 멈춘다음 봐도 됩니다. 그나저나 이거 큰일이네요. 건물이 무너질줄이야...]
유리조각을 빼며 말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자욱한 먼지연기 속에 어렴풋이 건물의 잔해들이 보였다.
온전한 건물은 거의 없는것 같았다. 아 건물이 문제가 아니지. 그밑에 깔린 사람은 얼마나 될까...
머리가 어질했다. 부모님 생각이 났다. 친구들. 모두 무사할까?
전화... 휴대폰을 두고왔다. 바지 주머니 속엔 동전만 있을뿐이였다.
[이제 좀 잠잠해졌네요.]
여자가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혹시 전화 있어요?]
[있긴하지만... 어차피 지금은 통화가 안될거에요...]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며 말했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역시 신호가 가질 않는다. 통신이 마비된것이다. 이건 국가적인 재난이야!!
새삼 사태의 심각성이 느껴져 가슴이 아려왔다. 어느정도의 피해일까.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너무도 만화같아서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저기 상처좀 봐봐요]
여자는 전화기를 받아들며 말했다. 지금 이상황에 그깟 상처가 대수인가.
[아 약간 찢어진거 같은데 압박할만한게 있으려나...]
[저걸로 해보죠.]
어디서 날라왔는지 현수막 쪼가리가 멀지않은곳에 보였다. 여자는 현수막을 찢어
익숙한 솜씨로 다리의 상처를 치료했다.
[고마워요. 혹시 간호사세요?]
[아니에요. 간단한 응급처치만 할수있어요. 일본재난구호반에서 배웠죠. 소독이 제대로되지않았으니까.
일단 지혈만하고 소독약을 구해보죠. 이럴때일수록 작은 상처라도 방심하면 안돼요.]
여자는 일어서며 말했다. 에? 일본? 응급처치야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배울수있는거 아닌가.
[아 네... 그런데 성함이 어떻게...? 계속 아가씨라 부르기가 좀...전 박성민이라고 합니다]
[이은경입니다. 걸을수 있겠어요?]
[물론이죠 은경씨. 걷는건 문제없는데 이제 어떻게해야할지 암담하네요.]
[일단 가능한만큼 구조해봐야죠. 도시전체가 파괴돼서 언제 구조반이 올지몰라요.
이 도시의 119나 구조반은 우리와 같은 상황이라 도움을 기대할수없어요
근처에 피해가 없는 지역에서 구조반이 도착할때까진 우리 스스로해야해요.]
은경은 성큼 앞으로 나갔다.
이 여자 대단히 침착한데... 이런 상황이 처음이 아닌거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치신분들 없나요? 모두 괜찮으세요?]
공원엔 10여명의 사람이 아직 엎드려있거나 망연히 앉아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를 바라보고있었다.
[아이고 이게 무신일이고 아이고 민철아 민철이가 저기에 있을낀데...아이고...]
은경의 말에 정신이 든듯 한 아주머니가 울면서 근처 건물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씨x 장난하나 이거 지진이라니 말이돼? 자다가 날벼락이네 죽을뻔했잖아 ]
한 청년이 일어나더니 담배를 꺼내물며 말했다. 모두 반응이 제각각이였다.
아직 정신을 못차리는사람, 미친듯이 무너진 건물로 가는사람, 서로 껴안고 우는사람,
이런사람들을 데리고 구조는 커녕 우리자신의 안전도 장담하긴 힘들것 같았다.
[은경씨 우리끼리라도 가보죠 아파트쪽은 잔해가 많아 힘들겠고 저기 아주머니나 도와줍시다.]
[그래요]
[은경씨 이런일 처음 아니죠? 혹시 일본에서...]
서둘러 건물쪽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고베 대지진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역시... 알죠. 그때 생존자신가요?]
[... 네 고등학생때였죠. 그때도 새벽이였어요.]
[그럼 우리나란 언제...? 부모님은 일본에 계신가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왔어요. 부모님은... 지진으로 돌아가셨죠...]
[아 이런 미안해요. 괜한걸 물어봤군요.]
[아니에요. 일본에 남아있으면 계속 그때 생각이 날거같아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소용없게됐네요.]
은경은 쓸쓸히 웃어보이며 말했다.
꽝!!!!
걸어가던 건물에서 폭발음이 들리며 잔해들이 사방으로 퍼져 떨어졌다.
건물의 파편들과 함께 은경과 나는 몇미터를 날아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후두두둑. 쓰러져있던 몸에 파편들이 떨어졌지만 아픈것도 모를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귀에선 이명이 들리고 온세상이 흔들거리는것 같았다.
불기둥의 뜨거운 열기가 전해져왔다. 마치 온몸에 불이 붙은것같은 고통에 나도 모르게 신음이 나왔다.
[으... 젠장... 은경씨 괜찮아요? 정신차려봐요. 은경씨!!]
[으음...]
은경은 신음만 낼뿐 정신이 없었고 머리에선 피가 흘러 머릿카락이 얼굴에 붙어있었다.
엎드려 쓰러져있는 은경을 바로 눕히곤 호흡을 확인했다. 다행이 이상은 없었다.
[후아 갈수록 태산이군... 가스가 터졌나보네. 뭐해요 어서 자리를 옮깁시다.]
공원에 있던 청년이 어느새 곁에와서 은경을 들쳐업었다. 열기가 느껴지지 않을정도의 거리에서
은경을 내려놓고는 건물쪽을 바라보았다. 5층짜리 건물이 처음 지진으로 무너졌을땐 3층정도의 높이를
유지하고있었지만 지금 폭발로 1층정도의 쓰레기더미로 변해버렸고 불길만 날름거리고 있었다.
[지금 움직이는건 위험해요. 여진은 둘째치고 가스가 차단되지않아 이런 폭발이 더 있을지 몰라요.
아 전기도 위험하지. 전선이나 물웅덩이를 조심하슈.]
청년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불량스럽게보이던 첫인상과는 달리 꽤 믿음직스럽게 말하는군...
[... 고맙습니다. ]
목례를 하곤 은경을 살펴봤다. 이마끝에 약간 찢어져 피가 나오는것을 대충 닦아 내고는 옷을 찢어
묶어주었다. 아직 정신을 못차리는것이 약간 걱정스러웠지만 별다른 상처가 없어 일단 편하게 눕혀놓았다.
[저기도 불길이 보이는걸? 도시전체가 폭탄이구만...제길. 꼼짝 못하게 돼버렸어.]
청년은 태평하게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강건너 불구경하듯 말했다.
그래 지금 어떻게 할수있는게 아니지. 맘이라도 편하게 가지고 천천히 생각하고 침착하게 행동하자.
지금이라도 당장 부모님이 계시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도로는 온갖 장애물로 가득해 자동차는
무용지물이였다. 그렇다고 걸어서 도시외곽까지 갈수는 없을터였다.
[담배 한대만 빌립시다.]
오래전 끊었던 담배가 갑자기 피고싶어졌다.
[어떻게 생각해요?]
청년은 담배를 건네주며 물었다.
[...무슨 말인지...]
[지금 이 거지같은 상황, 어떻게 될까 이말입니다.]
[...머 기다릴수밖에요... 언제까질지는 모르지만... 이정도 규모의 지진이라면 비상사태일테니
곧 구조대가 오겠죠. 다른나라에서도 지원이 올테고... 다만 너무 늦어지지않길 바랄뿐이죠...]
담배연기를 한숨처럼 뱉으며 말했다.
[이정훈이라 합니다. 당분간 서로 도움이 필요할것 같으니 통성명이나 합시다.]
정훈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박성민입니다. 아깐 정말 고마웠어요.]
[뭘요.죽은 사람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래도 우린 정말 운이 좋아요. 첫번째 지진이 경고를 한셈이니...
이런일은 드문데...]
[...그렇죠. 운이 좋았다고 말하기엔 좀 어폐가 있지만. 이렇게 살아있으니 그렇다고 봐야겠죠...]
나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구 100만의 도시... 몇명이나 살아남았을까. 눈앞에 보이는 처참한 상황으로 미뤄보건데 우리처럼
운이 좋았을 확율은 별로 없었다. 적어도 절반이상은 죽거나 건물더미에 깔려있을터였다.
정확한 규모를 알순없지만 아무리 내진설계되지않은 건물일지라도 쉽게 무너지진않을테니.
이정도의 피해라면 리히터규모 8 정돈 되지않을까. 대학때 배운 지질학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규모8. 건물의 80퍼센트 이상이 반파 또는 완파. 고베지진이 규모 7정도였으니 이번지진의 피해는
엄청날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지진에 대한 구호체계가 제대로 마련되어있지 않다.
우왕좌왕하다 그나마 살릴수있는 사람도 구호의 손길이 늦어져 사망자는 더욱 늘어날것이 분명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생매장되어 있는 사람들을 구해야하는데. 지금 내가할수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것이다. 무력감이 밀려왔다.
[으...성민씨 어디있어요?]
은경이 머리에 손을 짚고는 비스듬히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은경씨 정신이 좀 들어요?]
은경의 어깨를 잡아 편하게 앉히며 말했다.
[아...머리가... 어지럽네요. 무슨일이죠. 폭발음이 들렸는데...]
[가스가 폭발했어요. 여기 옆에있는 정훈씨가 도와줘서 이리로 옮겼어요.몸은 괜찮아요?]
[... 네 일어날수 있어요. 머리가 좀 아프네요.]
[머리에 파편을 맞았나봐요. 피가 나서 제가 좀 묶어놨어요.]
은경을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저기... 아주머니는...?]
[흔적도 없수다. 폭발로 가루가 되버린건지...젠장]
정훈이 신경질적으로 돌을 차며 말했다.
[아...]
은경은 다시 힘없이 주저앉아버렸다.
[좀 쉬어요. 몸을 피할만한 곳을 찾아봐야겠네요.]
[근처에 경기장이나 체육관 같은데를 찾아봐요. 나중에 그런곳이 대피시설이 될테니까...학교나
시청도 괜찮구요... 고베에서의 경험으로봐선 구조팀는 3일은 지나야 볼수있을거에요.]
[그렇게나 늦어진다고? 여긴 아무것도 없는데 3일을 어떻게 견뎌내나? 다치지 않은사람도
굶어죽겠구만...]
정훈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은경을 보며 말했다.
[이 도시로 오는 도로는 모두 엉망이 됐을거에요. 제일 먼저 헬기로 구호품이 도착하겠죠. 구조는
도로복구와 같이 시작해야되기때문에 더이상 빠를수는 없어요.]
은경은 내손을 잡고 일어서며 말했다.
[여기서 한블럭쯤 떨어진곳에 초등학교가 있어요. 우선 거기로 갑시다.]
가끔 운동하던 초등학교가 생각났다. 거기서 식량이나 물을 구해보자. 학교는 무너지지 않았을까?...
어스름한 새벽이 이제 조금씩 밝아져 오고 있었다.
곳곳의 불빛들로만 겨우 보이던 주변의 암담한 모습이 여명과 함께 더욱 처참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부상자들의 신음소리, 어디론가 바쁘게 뛰어가는 사람, 이미 건물이라 할수없는 잔해들의 부서지는
소리들... 전쟁터의 모습이 아마 이리할까...
너무나 슬픈 소란스러움이였다...
몇몇의 사람들이 주위의 부상자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있었다.
잔해더미가 없는 도로귀퉁이에 10여명의 부상자가 누워 있었다. 의식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였다.
은경은 그쪽으로 가더니 한 어린아이의 부러진 다리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봐 거기. 멍하니 서있지말고 이리와서 좀 도와주게.]
부서진 차량안의 부상자를 꺼내려 애쓰던 중년 사내가 정훈과 나를 불렀다.
[...젠장 그럽시다. 머 대피하는게 급한게 아니지. 거 학교는 나중에 갑시다.]
정훈은 나와 은경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나역시 같은 생각이다...
은경은 부상자들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어 대꾸도 없었다.
차량은 부러진 전봇대가 가로로 덮쳐 조수석쪽이 완전히 압착되어 있었고, 운전석의 여성은 오른쪽 팔이
찌그러진 천장과 시트 사이에 끼인채 정신을 잃고 있었다.
[상처는 별로 심하지 않은거 같은데... 팔만 빼내면 꺼낼수 있겠어. 뒷좌석에서 시트를 좀 움직여주게나.]
중년 사내가 말했다.
[알았수. 내가 뒤에서 흔들테니 둘이서 얼른 땡기슈.]
정훈은 뒷좌석으로 들어가 시트를 힘껏 흔들었다. 어렵지않게 오른팔이 빠졌다. 중년사내와 나는 여자를
앞뒤로 들고는 부상자들이 있는곳으로 옮겼다.
[아가씨. 간호산가? 이 여자도 좀 봐주게.]
여자를 내려놓으며 중년사내가 말했다. 이 아저씨도 나랑 같은말을 하는군... 여자가 치료하니 간호사라
묻는다... 의사일수도 있지않은가. 여자라는 편견에서 나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새삼 들어 우스웠다.
[부러진데는 없는거 같네요. 놀라서 정신을 잃은것 뿐이에요.]
은경은 여자를 똑바로 눕히며 말했다.
[그래? 그렇담 다행이군... 자 다른곳을 살펴볼까? 따라오게 제군들.]
중년 사내는 성큼 앞장서 건물 잔해를 파헤치고 있는 사람들쪽으로 걸어갔다.
[... 뭐야 완전 명령이구만... 우리가 부하라도 되는지 아는가보군.]
정훈은 투덜거리며 말했지만 옆에있는 나에게도 겨우 들릴정도로 속삭이는 소리였다.
[아 명령같이 들렸다면 미안하네 버릇이 되서 말이야... 예비군 중대장을 하다보니... 하하 ]
중년 사내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들으셨나...귀도 밝으시네. 거 나중에 예비군 훈련이나 좀 빼주슈 열심히 구조할테니깐...]
정훈은 겸연쩍게 웃으며 배짱좋게 말했다.
중년 사내와 정훈은 금방 친해진듯 허물없는 모습으로 대화하며 건물 잔해쪽으로 걸어갔다.
둘을 바라보며 은경과 나는 지진이후 처음으로 웃음지을수 있었다.
[은경씨 부상자들은 어때요? 다들 괜찮을까요?]
근처의 부상자들을 모으니 30명 가량이나 되었다. 시신은 두배가 넘었다.
급한대로 시신은 한군데 모아두었으나 온전한 모습은 거의 없었다. 도로는 빈공간이 없을정도였다.
10여명의 사람이 구조한것치고는 대단한 성과였다. 시간은 벌써 정오가 훨씬 지나있었고,
대부분 배고픔과 목마름에 지쳐있었다.
[급한 응급환자는 없어요. 수혈이 필요한 사람은 있지만...여기서 할수있는건 다했어요.
그보다 성훈씨. 여기 이렇게 부상자들을 놔둘순 없어요. 좀더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해요.]
은경은 얼굴을 찡그린채 잠든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긴 그랬다. 임시로 도로가에 부상자들을 모아두긴 했지만 주변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건물 잔해들과
가스폭발로 생긴 불길이 아직 꺼지지 않은채 매캐한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건물은 위험하니 학교 운동장같은곳은 어떨까요? 아까 얘기한 초등학교 운동장말이에요. 거긴 물도
있을겁니다. 거리도 멀지않으니 들것을 만들어서 부상자들을 옮기면 될거에요.]
[모두 지쳐있어서... 괜찮을까요?]
[지금해야해요 시간이 지나면 더 힘들어 질겁니다. 중대장 아저씨한테 얘기해서 이동하자고 해볼께요.]
나는 일어서며 말했다.
글이 너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기다리신분들 리플도 남기셨던데...
처음 보시는 분들을 위해서 앞부분도 같이 올렸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