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관찰 대상의 이미지 형성과 이미지(생각)의 비연속성(단절성)에 대한 글을 잠시 썼다가 지웠습니다.
근데 요즘 자꾸 이 주제를 생각하게 되어 다시 짧게 글을 씁니다.(그때는 난잡하게 길어서 지웠습니다. 긴 글은 재미 없거든요)
참고로 이미지 형성 부분은 제 개인적 이미지 형성에 대한 것을 바탕으로 씁니다.
이미지는 경험을 통해 직접적/간접적으로 형성됩니다.
1. 대상에 대한 파악 시도 - 철학 게시판은 무엇인가?
철학 게시판가 존재해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습니다. 근데 우리는 항상 대상의 본질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자, 그럼 철학 게시판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각자 철학 게시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셨다면 그 판단의 근거를 따져봅시다.
철학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의 종류? 여기 있는 사람들의 특징?
그럼 그 근거 자체를 말해봅시다. 다른 대상(타 게시판 혹은 철학 담론의 다른 형태 등)과 비교하지 말구요
말할 수 있는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이미지 형성은 다른 대상을 통해서 형성됩니다. 그럼 비교대상이 있으면 이미지가 확실히 잡히나?
그것도 아니죠. 해봅시다.
(비교에는 실제 그런지가 아니라 잡히는 이미지입니다. 예를 들어 연령대가 높은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실제로 그러한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이미지로써 다가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A. [타 게시판 - 철학 게시판] 비교를 통한 이미지 형성
a) 다른 게시판에 비해 웃긴 얘기 없음
b) 다른 게시판에 비해 연령대가 높음
c) 다른 게시판에 비해 이용자 수가 적음
B. [철학 담론의 다른 형태 - 철학 게시판] 비교를 통한 이미지 형성
a) 책 같은 것에 비해 부담스럽지 않은 내용
b) 익명성이 있으니까 직접 토론에 비해 발언시 긴장감이 높지 않음
c) 주제의 자유로움. 재미없으면 안보거나 아무 댓글도 안달겠지 뭐
A로 이미지가 잡히나? 아니죠. B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저 두가지 이미지를 합치면 완전한 이미지로 다가올 수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님.
비교 숫자를 엄청 늘리면 되나? 이미지가 비교적 명확해질 수 있지만 끝까지 완전한 이미지가 형성되지 않죠.
각자가 '세계'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항상 세계에 대한 직/간접 경험을 하면서 수많은 이미지를 형성해나가지만 언제까지나 완성된 이미지가 아니죠.
기분에 따라 다른 이미지를 형성하고, 상황에 따라 다른 이미지를 형성하죠.
왜? 이미지가 완전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다른 대상과 비교해가며 나타나기 때문이죠.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우리가 잡는 이미지는 [철학 게시판]이 아니라 [철학 게시판과 반대되는 것들]을 잡는 것이고
반대되는 것을 떠올리면서 이미지를 형성해나가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이미지는 완전할 수 없이 애매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2. 직접 경험 - 토론, 글 읽기
위에서 말했던 것과 중첩되는 부분도 있지만 분리해서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직접이란 비교적 직접적인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비교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간접 경험도 하나의 개념으로 설정하고 설명하려 하는데 사실 정도의 차이일 뿐 같은 얘기입니다.
직접 경험에서 중요한 것은 경험으로 대상을 파악할 때, 항상 두가지 이자적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쉽게 이 글 자체를 예로 들자면
글의 화자 - 독자의 관계가 형성되는데
이 글에 흥미가 있던 없던
[나(인식의 자아) - 글의 내용(인식의 타자)] 을 가지고 글의 내용을 파악하고 개인적인 의미로 재구성하죠
(말하려면 한없이 길어질 내용인데 간단히 말하면 제가 완전 슬픈 마음으로 소설을 쓰더라도 읽는 사람이 밝은 이미지로 받아들일 수 있고 혹은 다른 형태의 슬픔으로 바꿔서 받아들이죠.
그래서 사실 나의 개인사에 대한 고백은 사실 의미가 없습니다. 내 개인사인데 결국 독자에게 전달될 때 독자의 개인적 경험들을 불러오고 그것을 바탕으로 재구성될 뿐이니까요)
근데 위의 자아 - 타자 관계가 뒤집힙니다. 처음에는 위의 이자적 관계가 설정되지만 설정되는 동시에 뒤집히죠.
[글의 내용(인식의 자아) - 나(인식의 타자)]의 관계로 바뀌는거죠.
제일 간단한 얘기로 한다면 이 글의 내용을 가지고 나를 평가하고
이 글을 읽고 재구성할 때, 그 재구성이 기존의 나의 세계를 바꿔버리죠.
일차적으로는 내가 진짜 이 글의 내용처럼 그러한가? 하는 생각이 들고
이차적으로는 긍정하던 부정하던 그 내용에 영향을 받고, 그 이미지 또한 하나의 나로써 자리잡습니다.
왜 가끔 어떤 글이나 이야기를 듣고 전체적으로 부정했는데 나중에 다른데서 부정했던 내용을 내가 이야기하거나 하기도 하잖아요.
뭐 이런거죠. 제가 사랑은 한없이 이타적이다. 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하루는 친구가 헤어지고 술먹자고 해서 나갔죠
근데 전 한없이 이타적이라는 말을 부정했고 별로 아닌거 같은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친구한테 말할 때는 나도 모르게
사랑은 한없이 이타적인거야. 니가 헤어짐을 받아들이는것도 하나의 사랑이야 ~ 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것이거든요.
이걸 그저 친구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자 꺼낸 얘기로 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내 생각이 전혀 아닌것은 아니거든요
그게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자리잡혀있는거예요. 단지 내가 의식적으로 그것을 긍정하지 않는 쪽으로 판단할 뿐이죠.
친구를 보면 사람을 안다는 말이 있죠. 그게 참 설득력 있는 것 처럼 느껴지는게
어두운 사람들이랑 섞여있으면 그와 동화될 수 밖에 없어요. 어쩔 수 없이 같이 생활 하고 저 사람들 진짜 질이 떨어지네 ~ 라고 생각하면서 지내도
어느 순간엔가 보면 그 사람들이랑 비슷한 행동양식을 보이기도 하거든요.
그것 자체가 좋던 싫던 내 안으로 들어오는거예요.
단지 우리 생각으로 그런 행동은 나쁘고 나는 안그래. 라고 이자적 관계를 만들뿐이지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행동방식이 내 행동방식으로 역전되어 들어오거든요. 그게 나도 모르게 상대방을 좋아하던 싫어하던 자아 - 타자 관계가 역전되면서 일어난다고 봐요
그래서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자주 접하는 사람이면 다른 사람이 욕할 때 같이 욕하는 경우도 있지만(지금 이야기하는 사람과의 동일시)
괜한 사람이 뭐라 그러면 괜히 옹호하는 경우도 생기거든요(기존 경험에서의 역전에 있어 원래 알고 있던 사람과의 동일시)
이걸 생각해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2가지 떠올랐는데
군대 - 보수의 예가 하나 있고
작년에 있었던 부산대 철학과 교수가 '종북 좌파를 비판하시오' 라는 보고서를 요구하면서 조갑제닷컴에 올리라는 요구를 했다가 이슈화 되었던 사건이 있었죠.
군대 얘기부터 하면 군인 신분에서는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나(인식의 자아) - 군대(인식의 타자)의 관계에서는 군대 자체를 '보통은' 부정적으로 보지만
동시에 역전 현상으로 군대(인식의 자아)- 나(인식의 타자) 관계가 형성되면서 휴가나와서 계속 군대 얘기만 한다거나
전역 하고 난 뒤에도 군대 얘기 나오면 입아프게 군생활을 얘기하게 되는거거든요.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이 비교적 더 보수적(우리나라에서 쓰이는 보수적이라는 의미)이게 되는게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 밖에 없어요.
사람들이 군대에서 더 보수적일 수 밖에 없는 여러 근거들이나 이유를 찾아내는 경우도 있긴 하겠지만
나 - 군대 관계에서 군대 - 나 관계로 역전되면서 하나의 이미지로 남는다는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부산대 교수 일도 사실 그게 지속되면 무서운 현상일 수 밖에 없어요.
보고서를 쓰는 학생들이 '종북좌파에 대해서 비판하시오'의 보고서를 쓸 때, 진짜 그렇게 생각해서 쓰던 점수때문에 억지로 껴맞춰서 쓰던
나 - 보고서 내용 의 관계에서 내용을 만들어가는데 그것이 역전되면 어떻게든 그게 하나의 이미지로써 내안에 자리잡을 수 밖에 없고 그게 계속 영향을 끼치거든요. 나도 모르게 관련된 상황에서 그러한 내용이 연상되게 되고 영향 받을 수 밖에 없어요.
사실 교수가 이런 부분을 캐치하고 그런것을 의도했는지도 모르죠.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우리는 경험에 있어서 외부 현상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해석, 판단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해석-판단 X)
외부 현상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재구성하고 그 재구성 과정에서 나 - 타자 역전 현상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재구성된 사실(역전되어 만들어진 나)이 다시 내 안에 자리잡는 것이죠. (수용-재구성-판단-역전-나의 재구성 O)
그래서 글을 읽거나 토론을 하면서 철학 게시판을 이 과정에서 철학 게시판, 게시판의 글, 글의 화자를 타자로 두었다가 다시 나로 역전시키면서
철학 게시판이 나의 일부로 유입되는거죠. 이게 좋다/싫다 라는 이미지보다 사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좋다/싫다는 그때 그때 판단되는것이지만 역전으로 인해 나로 유입된 것은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거든요
3. 간접 경험
우리가 이미지를 형성하고 다시 재구성할 때, 직접 경험 만큼이나 간접 경험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철학 게시판에 대한 이미지이지만 이게 여러가지 다양한 간접적인 요소들에 의해 크게 작게 영향을 받고 있죠.
가령 오유에 대한 이미지 자체가 철학 게시판의 이미지에 영향을 주기도하고
철학에 대한 개인적인 이미지 자체가 철학 게시판의 이미지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철학 게시판을 들어올 때 자주 노출되는 환경(시간이나 사건)이 영향을 주기도 하죠
1번에서 말했듯 저것들이 모두 철학 게시판의 이미지에 영향을 주지만 연속적이지 않습니다.
어떤 관계를 설정하냐가 문제겠죠.
A.오유라는 커뮤니티 - 철학 게시판
B. 철학이라는 학문 - 철학 게시판
C. 철게 들어올 때 노출되는 환경 - 철학 게시판
(가령 항상 밥먹고 배부른 상태에서 들어온다던지, 일이 끝나고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온다던지, 어딘가로 이동하면서 틈틈히 접속한다던지, 컴퓨터나 모바일로 접속하는거나 장소가 카페인가 하는 등 여러가지로 노출되는 환경들)
여기는 길게 설명할 부분은 없고
단순히 베오베에서 웃긴 글을 보고 철학 게시판에 들어오는 사람과
고민 게시판에 들렀다가 오는 사람의 인식에서 철게의 이미지가 다르게 형성될 것이라는 거죠.
우리는 우리가 설정한 세계 안에 갇혀 산다는 글이 있었죠.
그때 얘기할까 하기도 했지만 하나의 간접 경험이 이미지를 크게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전체적 이미지의 대부분은 간접경험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죠.
달에 로켓을 쏜다고 생각해봅시다.
오차가 1mm가 생가면 엄청나게 큰일이 나겠죠. 더 멀리있는 행성이나 그 무언가에 로켓을 쏜다면 더 큰일이구요.
처음에 방향성 자체가 나중에는 커다란 차이를 가져오니까요. 적어도 우리 인식도 비슷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떤 사건을 시간과 분리해서 생각하는게 아니라 언제 어떤 상태에서 일어났냐도 중요하죠.
실제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어릴 때 하나의 충격이 사람의 성향을 결정하는데 엄청나게 영향을 끼치니까요.
우리나라에 빈번하게 이야기되는 친척에 의한 성폭력이 20대 30대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면 쉽게 생각할 수 있죠.
다른 예를 들자면 어릴 때 개에게 물린 경험이 있으면 작은개라도 무서워하게 되죠. 이만수씨가 그런걸로 알고 있습니다
천하장사까지 했지만 어릴 때 기억으로 소형견 조차 무서워하신다고 하더라구요.
어릴때가 중요하다 ! 이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행동양식을 배우는 과정에서 대부분이 직접 경험에 대한 반응들로 인한 이미지가 아니라
칭찬 - 금지를 통한 간접 경험으로 개개인이 사회화 된다는 것이예요.
즉, 우리가 가진 이미지의 많은 부분은 어릴 때 간접적으로 형성되어져있던 것의 수많은 영향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는 거죠.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우리에게는 수많은 간접경험이 있죠
그리고 직접 경험에 의한 이미지는 항상 재구성되지만 간접 경험에 대한 이미지는 재구성의 대상이 아니예요.
(그것들도 재구성될 수 있지만 그것이 철학 게시판에 의한 재구성의 영향은 적죠.)
그래서 하나 하나의 간접 경험의 이미지는 철학 게시판의 이미지 자체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겠지만
그 요인이 수없이 많고, 언제까지나 작용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중요한 분류가 될 수 있다는거죠.
제가 철학 게시판에 가지는 이미지도 이러한 여러 요소에 영향을 받았을겁니다.
4. 경험의 타이밍, 기간과 빈도
1번에서 언급했듯 우리는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할 때 대상 자체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아닌 여러가지를 구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도덕이 뭐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 뭐다.
내가 생각하는 철학 게시판이 뭐다.
라는 말이 어떤 표현을 빌리더라도 계속 [실제 이미지 - 표현]이 미끄러져 엇나갈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근데 우리는 사람마다 이미지의 강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술 작품에 대한 직접/간접 경험을 가지고 있더라도 저에게 미술에 대한 이미지는 미술을 하는 친구에 비해 더 모호하죠.
뭐 당연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우리의 이미지의 강도를 형성하는데 시간이라는 요소를 연결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번에서 밝혔듯 순서가 굉장히 중요하긴 합니다. 먼저 경험한 이미지일수록 뒤에 일어나는 경험들이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항상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거든요.
이번에는 마약의 예를 들어보죠. 마리화나를 떠올려봅시다.
캐나다에서 마리화나 합법화 집회가 일어나기도 했고 마리화나를 공식적/비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나라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마리화나나 히로뽕이나 엑스터시나 다 마약일 뿐이죠.
캐나다 사람, 한국 사람 한명씩 데려다놓고 마리화나의 영향을 객관적으로 보여준다고 하면
둘 다 결국 같은 이미지를 형성하냐는거죠.
캐나다 사람은 100중에서 20정도로 나쁘다고 생각하고
한국 사람은 100중에서 90으로 나쁘게 생각했는데
객관적으로 설명해줄 때, 사실 마리화나는 50정도로 나쁘더라. 그러면 둘다 50 정도의 인식을 가질 수 있냐는거죠.
이 순서라는게 의식이라기보다는 무의식의 영역에 가깝게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예가 잘 안떠오르네요. 가정이 좋은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나쁜것도 아니니 넘어갑시다.
다음으로 양적/ 질적인 경험의 차이가 이미지 형성에 영향을 준다고 보는데 양적/질적인 부분을 포괄적으로 말하고자 하는게 아니라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 부분적인 생각들만 있어서 설명하는 것 자체가 에러네요)
이걸 기간과 빈도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오랫동안 경험이 지속되고, 자주 될수록 이미지가 강하게 형성되겠지만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게 아니라
같은 양의 경험이 기간과 빈도가 달라질 때, 어떻게 다를 수 있는가 하는거죠.
약간 단순화시키기 위해 반려견과 학대주인으로 사고실험을 해보죠
학대주인이 반려견을 30대를 세.게. 때리는데
A. 10대씩 1월,5월,9월에 때렸다
B. 1대씩 매일 매일 한달동안 때렸다
C. 1대씩 1년에 한번씩 때렸다
어느것이 강아지가 주인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는게 가장 강할까요?
나 ~ 중에 강아지가 15살쯤 살았는데 그때 영향을 끼친 것을 생각해보면
B>A>C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뭐 단언할 수는 없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너무 간헐적으로 강아지에게 좋아하는것이나 싫어하는 상황이 이루어지면
다 까먹어버리더군요.
근데 어느정도 집중되어버리면 그게 학습되어버리죠. 총 양은 같더라도 집중도가 높을 수록 그 이미지가 형성되는게 강하다고 보여집니다.
우리집 강아지가 어릴 때 이갈이를 하면서 계속 물어서 혼냈더니 그때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물지않습니다.
반면에 가 ~ 끔 뭘 물어서 집에 숨기곤 하는데 이게 잘 안고쳐집니다. 화장품, 볼팬, 지우개 등등
물고 가면 안된다는게 학습되기 어려운것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혼낸것을 양적으로 따져보면(웃긴 얘기긴 하지만) 물건을 물고 가다가 혼난게 훨씬 많다고 봅니다.
그때 깨닳았죠. 훈련을 시키려면 일부러 혼날만한 상황을 계속 만들어주고 자주자주 혼내야 하구나!
실제로 다른 습관들 고치는데는 효과가 있더군요
(아직도 한마리가 물고가는게 문제긴 합니다만... 가져가는게 문제가 아니라 화장품이나 지우개를 먹더라구요. 혹시나 해결방법 아시는분 계신가요)
개를 가지고 사고실험을 했다는게 한계가 있겠지만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경험의 양적 관계만 따지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보기에 4번도 구분해서 언급드렸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근 3개월간 거의 매일 철학 게시판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그전에는 오유도 잘 몰랐죠
그 집중적 빈도가 철학 게시판의 이미지를 강하게 형성하는데 크게 영향을 주었을것이라는거죠.
시작은 단순하게 철학 게시판에 대한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를 떠올리며 시작했는데
글이 너무 늘어져서 별로네요...
우리 인식에서 세계에 대한 이미지가 모호하면서도 파편적이지 않을까 하는 부분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건 다음에 쓸일이 있겠죠
긴 글 한마디로 정리하면 저한테는 철학 게시판의 이미지가 꽤나 강하게 형성되었을 것이라는거네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