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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핥기 로마사(19)- 콘스탄티누스
게시물ID : history_44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악진
추천 : 4
조회수 : 194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05/24 09:36:33
bbc다큐의 콘스탄티누스. 패기 넘치는 선전능력과 경험을 갖춘 장군이면서도 노회한 정치인으로 그려졌다. 개인적으로 이 다큐에서 리키니우스 암살장면과 니케아 공회 장면을 교차편집한 것이 영화 <대부>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콘스탄티누스가 "나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선언한 직후 처남 리키니우스가 콘스탄티누스가 보낸 자객에 의해 교살 당하는 장면을 비춘다. 콘스탄티누스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은 것이라 생각한다. 1. 4두 정치의 파행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는 서로마의 아우구스투스 자리를 승계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로 즉위한 다음 해인 306년에 브리타니아 원정 중 사망했고, 부황제조차 아니었던 콘스탄티누스는 그곳에서 군대의 추대를 받아 서로마 황제를 선언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고안해둔 황제 승계제도를 정면으로 짓밟는 것이다. 동방정제 갈레리우스가 세베루스를 서방정제로, 콘스탄티누스를 서방부제로 확인해주었고, 한동안 콘스탄티누스는 자기 영지를 손질했다. 이 시기에는 갈리아를 재건하면서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는데, 나름 국경선을 튼튼히 하고 로마에 대한 위협을 잠재우는 치적으로 남았다. 군제도 개선하여 황제 친위대는 해산하고 대부분 이민족으로 이루어진 황제 직속의 야전부대를 만들었다. 이 군대는 차후 2세기 동안 동로마에서 탁월한 활약을 한다. 금본위 화폐제도를 부활시켜서 물납제도를 폐지했다. 재정부족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부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었는데, 대개 괜찮은 효과를 보았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얼굴을 새겨넣은 동전 307년에는 선대 서방정제 막시미아누스와 그 아들 막센티우스가 4두 정치를 파기하고 현 서방정제 세베루스를 전쟁 끝에 살해했다. 310년 막시미아누스를 헤치운 콘스탄티누스는 312년에는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진격한다. 막센티우스군을 연파하며 로마 근교에 도착한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의 본대를 맞이하게 된다. 2. 전설이 된 밀비우스 다리 전투, 진실은? 밀비우스 다리 전투를 그린 그림. 막센티우스 측은 확실한 숫적 우위에 있었고 게다가 방어측이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곤경에 처했다. 보급선도 길어진 데다가 원군을 기다렸다가 막센티우스와 맞붙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았다. 결국 후퇴냐 전진이냐를 놓고 선택에 기로에 섰다. 이 때 전설적인 사건이 발생했는데, 사실 이 전설은 2가지 버전이 있다. 첫째, 콘스탄티누스와 그 군대 전체가 하늘에 나타난 십자가 문장을 보았다는 것인데, 대체로 수많은 역사서는 이 전설을 채택하면서 "어쨌거나 사료에 그렇게 써놨더라"고 하거나 "중요한 것은 정말로 하늘에 십자가가 나타났냐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나타난 것을 무엇으로 받아들였냐는 것이다"는 식으로 흘러간다. 둘째, 전투 전날 콘스탄티누스가 꿈 속에서 "이 문장을 앞세우고 싸우도록 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 문장이 기독교를 상징하는 X와 P를 합친 도형이라는 것이다. 이런 도형이다. "라바룸"이라고 부른다. 라바룸이 정말로 기독교의 문양이냐는 것에 대해서 일부논란이 있지만, 기독교를 상징한다는 데에는 대체로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하늘에서 뭔가 본 다음에 꿈도 꿨다고 할 수 있겠지만, 같은 일을 두고 2가지 버전이 있는 것은 합리적인 의심을 할만한 근거가 될 것이다. 게다가 두 사건을 최초로 다룬 사료는 사건이 벌어진 후 30여년이나 지나서 작성되었다. 수만명의 로마군이 함께 보고도 수십년 후에서야 후일담 다루듯 사료가 발견되는 점 역시 미심쩍다. 어쨌거나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신의 분노를 두려워하는 병사들을 꾸짖으며 방패에 X와 P를 손수 그렸다. 양군은 밀비우스 다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는데, 밀비우스 다리에 대해서도 좀 더 확인을 요하는 것은 대개 후대에 기록된 그림이나 현재 복원되어 있는 밀비우스 다리가 석조인 것과 달리 밀비우스 다리는 단지 배를 이어붙여 만든 목조다리라는 주장이 있다. 막센티우스 군은 숲 안에 복병을 준비해두고 미끼를 도하시켜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지만 배를 이어붙여 만든 목조다리가 부서지면서 막센티우스는 익사해버리고 만다. 3.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로마에 입성한 콘스탄티누스. 그는 동방정제 리키니우스와 밀라노에서 회담을 가지고, 여동생 콘스탄티아를 리키니우스와 결혼시키며 동맹을 공고히 했다. 이 동맹의 성립과 함께 두 황제의 명의로 밀라노 칙령을 공포했다. 여기서 밀라노 칙령을 들여다 보기 전에 우선 콘스탄티누스 개인과 기독교의 관계를 먼저 보자. 콘스탄티누스는 최초의 기독교인 황제로 지명되며 "13번째 사도"라는 명예로운 별칭을 얻었지만 그가 기독교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복잡하다. 일설에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유년시절부터 기독교인이었다고 하고, 일설에는 미트라 신자이다가 점진적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정작 세례를 받은 것은 임종 직전이었는데, 이는 세례를 받은 후 죄를 지은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는지하는 논쟁(통칭 도나투스 논쟁)이 당시 기독교계의 핫이슈였던 탓이다. 죄를 짓지 않을 자신이 없는 기독교인들은 세례를 위한 준비를 마쳐두고도 임종 직전에서야 세례를 받는 관행이 당시에 존재했었다. 여러 가지 증거를 미루어 볼 때 콘스탄티누스가 처음 숭배한 신은 태양신이다. 모든 로마황제가 그렇듯이 폰티펙스 막시무스직을 겸직한데다가, 그 스스로를 아폴로의 현신(혹은 아들)로 여기는 것이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였다. 그리고 밀비우스 전투에서 있었던 일은, 아마도 어떤 신이건간에 자신에게 승리를 가져다준다면 숭배를 바치겠다는 거래와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로도 태양신 숭배는 여전히 계속되었고(미트라를 새긴 공식 화폐가 존재한다) 그러면서도 기독교인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4. 밀라노 칙령 미트라 신앙을 공식적으로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적 작업(?)은 계속되었다. 밀비우스 전투에서 이기고 서방정제가 된 다음해인 313년, 리키니우스와 정략결혼관계를 맺으며 리키니우스-콘스탄티누스 명의의 밀라노 칙령을 공포했다. 그 내용은 로마제국은 종교적 중립을 취하고 모든 종교에 관용을 베푼다는 것인데, 실질적으로는 기독교를 비호하고 황제가 보호하는 종교로 격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디오클레티아누스가 몰수한 재산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려주고 교회에 면세혜택(이것은 제국 재정악화의 원인 중 하나이다)을 주었으며 여러차례의 기부를 통해 교회를 세우는 것을 돕기도 했다. 여러 서신에서는 공공연히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에는 기독교 신의 가호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썼다. 320년을 기점으로 태양신을 새긴 화폐도 제작이 중단되었고, 군인들에게 교회출석 의무를 부과했다. 니케아 공회를 그린 그림. 제국 전역에서 300명의 성직자를 불러모았다. 325년에는 니케아 공회를 소집하여 의장을 맡기도 했다. 니케아 공회는 교회사에서는 특A급 떡밥이고, 다빈치 코드 등 여러 음모론에서도 짚고 넘어가는 주제이지만 로마사보다는 교회사에서 중요한 주제이다. 어쨌거나 콘스탄티누스에게 있어 기독교는 실존적이고 윤리적인 선택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선택이었고, 니케아 공회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는 것 정도만 얘기하고 넘어가자. 동고트족이 라벤나에 세운 아리우스파 세례당. 보존이 잘 되있어 오늘날에도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다. 니케아 공회에서 패배한 아리우스파는 로마에서 쫓겨나 게르만과 중앙아시아에서 포교활동을 했다. 5. 콘스탄티누스의 유산 324년에는 동방정제인 리키니우스와 싸워서 그를 폐위시키고 로마제국의 단독황제가 되었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콘스탄티누스가 꾀한 것은 로마의 재통합이라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하나의 황제, 하나의 로마, 하나의 신"을 외치고 다녔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속주를 더 세분화시키고 황제를 4명이나 두었던 것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니케아 공회의 또다른 의제는,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조직을 로마제국 행정체계와 일치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기독교를 통한 로마의 통합을 위한 것이었고 장기적으로는 유럽문명권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독교는 제국과의 결합을 통해 아주 많은 것을 얻어냈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신앙의 순수성이 훼손된 중대한 분기점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흑해 입구 비잔티움에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했다. 새로운 수도로 삼겠다는 선언과는 달리 콘스탄티노스는 니코메디아를 떠난 적이 없고, 50년 후에야 콘스탄티노플에 머무는 황제가 생겼다. 기초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임차농민들을 농노(디오클레티아누스가 농민의 거주지 이전을 금지한 것에 이어 또다시 중세장원의 전조가 보인다)로 바꾸었으며, 제빵업자와 도축업자는 신분을 세습하도록 규정(역시 중세장원의 전조가 보인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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