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 덜컹..
어스름이 깔릴 무렵의 어느 따스한 날 ...
저녘노을의 빛을 헤치며 나아가는 기차안에서 꾸벅 꾸벅 졸던 한 사내가 마침내 단잠에서 일어난다.
화들짝 놀란 듯 하며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하던 그는 천장에 달려있는 20인치 스크린을 보더니 다행인듯 한숨을 내쉰다.
"휴우... 지나치지는 않았네..."
스크린에서는 열차를 자주 탔던 사람이라면 관심도 주지 않을 '테러발생시 대쳐요령'이 나오고 있었고,
그 하단에는 파랑 바탕에 조그마한 글씨로 속보인마냥 짜잘짜잘한 정보가 표시되어 있었다.
"현재속도 334km/h , 우리 열차는 기말역 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언제나 고객님의 편의와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사내는 항상 이맘때면 북적이다 못해 미어 터지던 열차가 이상하게도 한산하다고 생각했다.
탈때마다 북새통이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구석의 강아지마냥 쪼그려 앉아가야됬던... 재수가 없을때는 입석으로 간신히 오를수 있었던
이 열차가, 왜 , 오늘은 비어있는지 승무원이 지나간다면 당장이라도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곧내 그 충동을 억누르며, 우선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구석에서 노트북을 꺼내놓고 무언가를 집중해서 보고 있는 두명의 사내들.
손이 바쁘게 키보드를 연타하는 것을 보니 필경 PC게임을 하는 것이리라 확신하며 마저 남은 객실을 쭉 둘러보았다.
고주망태가 되어 곯아떨어진 아저씨
그냥 하염없이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있는 아주머니
4인 가족석 테이블에 무언가를 깔고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젊은 청년들
그리고 이어폰을 귀에 꽃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군인.
하나 하나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그들에 대한 나의 평가를 내리고 있을때,
치지직.. 치직 하는 객실 스피커 소리가 나며 생각의 흐름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우리 열차는 기말, 기말역을 지나칩니다. 내리실 문은 ... 없습니다"
나긋 나긋한 여성 승무원의 목소리가 어렸을때 전~혀 아프지 않다면서
B형간염 주사를 놓던 간호사의 목소리와 겹쳐지는 느낌은 그 사내만의 착각인 것인가
왠지 뒤에 속으로 웃고 있을거 같은 그런 기분이 느껴진것 같은데...
확장된 동공으로, 사내는 창문에 붙어서 밖을 바라보았다.
야속하게도 이 열차는 원래 사내의 행선지였던 기말역을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지나치고 있었다.
아니, 버스마냥 하차스위치를 눌러줘야 되는 것도 아니고 왜 그냥 지나치는거지? 같은 반항심과
종착지를 지나쳤다는 것에 말미암은 깊은 빡침을 원동력으로
사내는 제일 앞쪽 기관사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쾅쾅쾅
"야 ! 문열어 ! "
쾅쾅쾅
몇 번을 두들겨 봤으나 잠겨있는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내의 분노는 곧 희석되어 "이러려고 기차를 탔는지 자괴감 들어" 따위의 생각으로 변형됬으며
마치 죽을병에 걸린 아이를 의사에게 살려달라고 울고 있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잠겨있는 문을 두들기며 호소하였다.
쾅쾅쾅
"교 ㅅ.. 아니 기관사님 ! 내려야되는데 역을 지나쳤어요 ㅜㅜ"
치지직... 치직..
왠지 대머리 일거 같은 중년의 아저씨의 목소리가 객실방송을 통해 전해졌다.
그렇다. 나는 재수강 특급열차를 타고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