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과 기독교는 로마사에 틈틈이 고개를 내밀어 개별사건의 주조연을 맡습니다만, 장황한 유대인과 기독교 역사를 다 소개하기는 곤란한 탓에 로마사와 별도의 방론으로 글을 씁니다. 로마사가 아니라는 명목 하에 짤방첨가는 하지 않았습니다;;; ===================================================================================== 1) 유대민족의 역사와 종교 유대민족의 역사에 대해서는 엄청난 견해대립이 있지만 로마와의 연관성을 고려하고, 또한 큰 이견없이 추적가능한 지점을 잡는다면 bc587년의 바빌론 유수부터 얘기하는 게 좋을 거 같다. 다윗이나 솔로몬...이런 사람들은 그 고고학적 실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서 지도상에서 지워진 후, 남유다는 200여년을 더 존속했다. 바빌론의 네브카드네자르에 의해 남유다 역시 멸망하고 왕족과 귀족 수천명이 바빌론으로 강제이주 당했는데, 이를 바빌론 유수라고 한다. 키루스2세는 이들 강제이주 유대인을 본토로 돌려보냈는데, 유대교의 정립은 고향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민족정체성을 확립하고 민족사를 신앙의 잣대로 해석하면서 이루어진다.(이 과정이 구약성서의 느헤미야와 에스라서이다) 유대 사상에 의하면 역사란 신의 섭리에 의해 예정된 의미심장한 서사이다. 전능하고 유일한 신이 선택한 민족이 바로 유대인이며, 신의 계획 하에 펼치는 장대한 드라마로서 역사를 바라본다. 신과 유대인은 성스러운 백성 = 평화와 번영 을 서로 deal하는 계약을 맺었고, 이를 위한 지침이 율법이다. 신의 이 거대한 각본은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페르시아가 멸망한 후에는 알렉산더에게, 알렉산더 사후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잠시 받은 후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이 당시 유대상류층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고, 빈부격차와 도농격차가 벌어지면서 민족 내부 갈등이 생긴 것도 이 시기이다. 반면 민중들은 유대전통을 고수하면서 상류층이 율법만을 전통으로 인정하는 것과 달리 예언까지도 전통으로 포함시키려 했다. bc168년 헬라화에 반대하여 마카베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시리아측은 이를 진압했다. 유대인들은 꾸준히 독립전쟁을 벌여서 마침내 bc142년에는 시리아로부터 독립하여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했고, 이 독립상태는 bc63년 폼페이우스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유지됐다. 2) 로마 지배 하의 유대인들 로마 총독들은 유대인과 유대교 개종자들의 대규모 공동체들을 다루는데 애를 먹었다.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외에도 알렉산드리아(아마도 예루살렘보다도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인구가 더 많았을 것으로 집계된다), 코린트, 로마, 안티오크 등 제국 전역에 퍼져 있었다. 게다가 각 도시에서 유대인들은 쉽사리 무시할 수 없는 숫자가 살았다. 그들은 끈질긴 배타성 때문에 다루기 극히 어려운 민족이었고 자기민족들만의 법정(다시 말하지만, 유대인들 자기들끼리 멋대로 꾸린 법정이다)과 회당을 중심으로 다른 구역과 확연히 구별되는 유대인 거주 지역을 만들어 살았다. 3) 나사렛 예수 복음서에는 예수의 생애가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복음서는 역사연구를 위해 참고하기에는 만족할만한 사료가 아니다. 기독교에 가장 호의적인 역사학자들조차도 역사연구 목적으로 복음서를 참고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복음서는 예수의 신적 권위를 증명하고 기독교신앙을 변증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의 분야에서 예수의 역사성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에 훨씬 더 부적절한 증거가 이용되는 일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기독교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만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의 진술을 뒷받침할 다른 역사적 증거는 거의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더라도 그에 관해 치열한 논쟁이 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행적을 요약해보자. 예수는 가난한 평민의 집안에서 자랐다. 그가 자란 곳은 팔레스타인의 갈릴래아인데, 이 곳은 유대지방 안에서도 가장 수탈을 심하게 당하고 가난한 곳이었다. 또한 유대지방 내에서도 가장 극렬한 로마저항 운동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요단강변에서 세례를 주던 예언자 요한(예수와 달리 세례 요한의 존재는 현존 사료 상으로 명확하다)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곧 공생애를 시작하여 제자들을 모으고 복음을 전파했다. 3년간의 공생애는 어느 정도 휴지기와 활동기가 있었던 것같다.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사마리아와 유대지방에서의 활동도 종종 보인다. 그의 활동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형을 받으며 허무하게 끝나는데, 복음서는 십자가형을 받은 예수가 부활하여 재림을 약속하고 승천했다고 전한다. 4) 초대교회 부활한 예수를 만난 제자들은 유대교와 구별되는 새로운 종교를 세웠다. 하지만 처음 기독교가 생겼을 당시에 그들은 유대교와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았다. 기독교가 유대교와 명확히 구별되기 시작한 것은 ad66년 유대반란에 기독교가 가담하지 않으면서부터 였다. 이 반란은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당시 유대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나사렛파'에 관하여 쓴 요세푸스의 기록이 남아 있다. 초창기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교회가 퍼져나갔지만 ad70년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에는 안티오크나 알렉산드리아, 로마 등에 흩어져 점조직화 되었다. 5) 기독교에 대한 박해 기독교는 처음에는 로마보다는 유대교로부터 박해를 받았다(예수를 처형한 것은 로마군이었지만 예수를 고발한 것은 유대교인들이었다. 또한 바울이 로마여행을 하게 된 계기도 유대인의 고발에 맞서 황제에게 항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기독교가 유대교 내부의 소수종파로서 출발했기 때문인데, 유대교와 결별을 한 후에도 유대인에 대한 박해에는 거의 함께 박해를 받았다. 사실 로마제국은 기본적으로 모든 종교에 대해 관용을 취했기 때문에 황제가 직접 나서서 기독교를 박해한 것은 몇몇 특정황제로 국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공인되기까지 수백년간 박해를 받아야만 했는데, 일단 유대인이 받을 때마다 '비슷한 놈'이라 엉겁결에 같이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고, 그보다 중요한건 지역사회에 동화되지 않은 채 배타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몇몇 황제를 제외하고는 300년간의 박해 대부분은 속주총독과 속주시민들에 의한 것이다. ad165년의 스미르나에서 일어난 폭동이나 ad177년의 리옹박해가 그러하다.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신들을 숭배하기를 거부했고, 로마인들은 이것이 로마신들의 분노를 일으킨다고 생각해서 홍수, 전염병같은 재해가 있을 때마다 신들의 분노를 촉발한 기독교도들을 박해했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악마의 마술을 부리고 근친상간을 하며 심지어 식인을 한다는 유언비어까지 퍼졌다. 6) 초기 교부 로마의 여러 종교들은 신비종교로 변질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 기독교 역시 원래의 성격을 잃고 또다른 종파로 변질되어 마술적 늪에 빠져들 위험이 있었다. 그노시스파의 등장은 이러한 위기를 잘 보여준다. 기독교 교리의 발전은 그노시스파에 대한 논박의 과정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초기 교부들은 그노시스파에 대한 논박에 힘써야 했다. 리옹의 주교 이레니우스는 최초로 교리를 총체적으로 정리하고 유대교와 기독교를 명확하게 구분지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나 오리게네스도 이 시기에 활동한 인물인데, 클레멘트나 오리게네스같은 경우에는 플라톤사상과 기독교의 결합을 시도했다. 이는 신비종교와의 선을 긋기 위한 노력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그리스 철학과의 혼합이 이루어졌다. 기독교가 종교적인 정서로 가득 찬 시대에 출현했다는 사실은 기독교가 급속하게 퍼지는데 이점으로 작용했다. 2세기에 만연한 미신적 풍조의 이면에는 정신적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새로운 것에 심취하고자 하는 로마인들의 갈망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로마사회가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