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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다리코뿔소님의 단편 "독신녀의 방에 어서오세요."
게시물ID : lovestory_5070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설탕아
추천 : 8
조회수 : 140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1/21 14:06:51






오랜 시간 한 여자를 좋아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한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는 여자.

얼핏 보면 수수해보지만 그렇지도 않은 그런 여자.

그 여자는 아름다우면서도 꾸밈이 없었다.
꾸밈이 없는 것이 아니라 포기처럼 보이는 날도 있었다.

여자로서의 포기. 어쩌면 그게 더 맞는 생각일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때로는 편의점 안으로 찾아들어 물건을 샀다.
담배, 바나나 우유, 주스.

나름 손님임에도 이 여자는 얼굴을 한번 쳐다보는 일이 없었다.
여자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개미 같은 목소리를 냈다.

한번은 편지를 써서 마음을 전해볼까 싶기도 했지만
편지를 쓰는 것까지는 쉬워도 전해주기는 어려웠다.

결국, 나같은 사람이 된다는 거 였나보다. 스토커.

나는 여자가 편의점 일을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뒤를 밟았다.
여자가 혹여 뒤를 돌아볼까 노심초사였지만 여자는 길을 걸을
때에도 곧잘 땅만 쳐다보며 걷고는 했다.

그녀의 집을 알아내는 것은 너무도 손쉬운 일이었다.

나는 다음날 열쇠수리공을 불러 집 문을 열고 그녀의 방을 들어가 보았다.

그녀의 방은 뭐랄까. 향이 없었다. 여자들의 냄새.
그리고 또 특별히 뭐라 콕 찍어 설명이 힘들었지만,
이곳은 여자의 방이라는 뉘앙스가 없었다.

꼭 여자들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 방에는 그 흔한 화분조차 하나 보이지 않았다.

커튼은 민무늬의 카키색 천 쪼가리가 볼품이 없었고,
침대와 이불도 순 카키색 옅은 무늬가 들어간 재미없는 물건들뿐이었다.

냉장고 안에는 요리할 수 있는 식재료 따윈 들어있지 않았다.
물, 음료수 하나, 언제부터 얼어붙어 있는지 가늠이 안 되는 피자 한 조각.

TV는 존재하지 않고, 17인치로 보이는 작아 보이는 모니터와
싸구려 컴퓨터가 책상도 아닌 조막만 한 작은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옷장 속은 여자의 옷장이란 느낌을 풍기며 많은 옷이 들어있었지만
오랜 시간 잠겨있던 옷장의 향이 자욱하게 풍겨왔다.

확실히 내가 그녀를 스토킹하며 봐왔던 옷은 몇 벌 보이지 않았다.

방을 둘러보다 졸업앨범을 찾아 앨범을 뒤적이며 그녀를 찾았다.
졸업 사진의 고등학생 시절의 얼굴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아 금방 그녀를 찾아낼 수 있었다.

2008년 졸업생. 이름 정지영.

어릴 적부터 빼어난 미모였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지금 모습을 보면 예상이 어려워 소스라칠
만한 일도 아니었지만, 조금 의아스러운 건 지금의 모습과 상반되는 사진의 모습이었다.

반의 친구들과 찍은 사진으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자신감 있고 밝은 활기찬 고등학생의 모습.

책장에 들어있는 책이 졸업앨범과 몇 권의 소설이 전부였다.
허리춤까지 오는 작은 책장인데도 허전함이 느껴졌다.

컴퓨터를 켜자. 바로 윈도우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겨우 60기가 남짓의 하드디스크 내용물을 살살 뒤져보자
최근의 드라마 몇 편 이외에는 별다른 데이터가 없었다.

게임조차도 하지 않는 여자 같았다.

한참 방을 뒤져보고는 텅텅 비어있는 방의 살풍경이 마치 여자의 삶을 대변하듯 느껴졌다.
스토커로서 주제넘게도 나는 정지영이란 여자를 동정하게 되었다.

방을 좀 더 둘러보다 방의 키를 찾게되어 열쇠집을 찾아가 열쇠를 복사했다.
열쇠를 복사하고 그녀의 방에 다시 열쇠를 돌려 놓으러 가는 길. 길가에서
팔고있는 선인장 화분을 하나 샀다.

여자의 방에 열쇠를 돌려두고, 화분을 올려둘 그럴듯한 장소를 찾았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화분을 책장에 얹어두었다. 허전했던 책장이
그나마 공간을 차지하며 약간은 쓸쓸함이 줄은 듯 보였다.

여자가 이 화분을 보고 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며 입가에 웃음이 돌았다.

며칠 뒤 그녀가 출근한 것을 확인하고 다시 그녀의 방을 찾아갔다.
현관에 서서 열쇠를 넣어 돌리니 휙 하고 열쇠가 걸림 없이 돌아갔다.

'조심 좀 하지...'

방에 들어서자 이상하게 방에서 은은한 여자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커튼까지 꽁꽁 쳐 두었던 창은 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해놓은 상태였다.

오늘은 무엇을 해볼까 고민을 하다가 그녀가 읽은 책들을 한번 읽어볼까 생각이 들었다.
개중에는 여자가 편의점 일을 하면서 읽던 책도 있었다. '공중그네' 오래 된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이었다.

한참 동안 엎드려 책을 읽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리며 내가 방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책을 자리에 돌려놓고 현관으로 향하는 거실에서 난 얼마 전 사뒀던 화분이 현관 신발장
위로 자리를 옮긴 것을 보았다.

'버리진 않았네?'

여자가 눈치채면 화분을 가져다 버릴 줄로만 알았다.
화분에 다가서니 포스트잇 종이에 정성껏 쓴 듯 보이는 글씨가 보였다.

'당신은 누구 신가요?'

"뭐야. 이 여자 스토커한테 누군지 묻는 거야?"

나는 별 희한한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신발을 신었다.
신발을 신고 현관을 열려고 하는데 생각지도 안았던 현관문에
포스트잇이 한 장 더 붙어있었다.

'신고하지 않을게요. 또 오세요.'




















"2,700원입니다."

3,000원을 내밀며 담배 각을 받아 들었다.

잔돈을 돌려받으려 손바닥을 위로 올린체 손을 내밀자.
그녀의 손이 내 손바닥 위에서 300원을 오므려 쥔 체 멈춰 섰다.

나는 잠깐 동전이 내 손 위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기다리다 그녀를 올려 보았다.
그녀는 "왜요?" 라며 내게 되려 물었다. 전까지는 본 적 없는 선명한 눈빛을 한
그녀의 눈빛이 날 투명한 사람 보듯 투영하는 것 같았다.

며칠 전 그녀와 그녀의 집 앞 복도에서 마주친 일이 있었다.

그녀의 방은 편의점에서 20분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나는 그녀가 퇴근하기 30분 전에 알람을 미리 설정해 두곤 했는데,
그날은 무슨 일인지 그녀가 일찍 퇴근을 한 것 같았다.

뛰어오기라도 한 것이었을까.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계단을 오르던 그녀와 스쳐 지나갈 때는
심장이 멈춰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혹시나 방 안에 있을 나를
잡아채고 싶어하는 것만 같았다.

정신없이 계단을 오르던 그녀가 갑작스레 계단을 뛰어 내려왔었다.
툭탁거리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내게 다가올 때의 긴장감은 지금도 잊혀지질 않는다.

"아저씨, 여기사세요?"

느닷없이 내 팔을 움켜쥔 그녀의 감촉은 놀라웠다.

이렇게 생기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이거니와,
내가 스토커라는 감을 잡았다는 것도 놀라웠다.

"아니요."

"네, 저도 아저씨 본적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요?"

"여기 왜 오셨어요?"

그때의 확고한 눈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대충 그곳에 친구가 살고 있다며 둘러대자
여자는 순순히 나를 돌려보냈다. 그곳에 누가 살고 있는지 누가 누구와 친구인지 캐물을 수 없으니
그녀도 그 정도에서 납득할 수 있는 변명을 들었다는 눈치였다.

'봐줬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도둑이 제 발을 저린 다는 말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지금 이런 행동을 보인다.
잔돈을 움켜쥔 손을 아직 풀 생각조차 안 하는 그녀였다.

"잔돈, 주세요."

그녀는 웃는 것도 인상을 짓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을 하며 내 손위에 동전을 떨궈줬다.



때때로 시간이 생겨 그녀의 방에 찾아가면 현관 앞에는 '열쇠는 바꾸지 않았어요.' 라는
메시지가 적혀있던가 '혹시 생각 있으시면 드세요.' 라며 냉장고에 음식이 준비되어 있곤 했다.

컴퓨터를 켜보면 안에는 드라마 파일명에 드라마가 재미있는지
별반 재미가 없는지에 대한 간략한 평점을 별표 표시를 해서 달아 두었다.

책장에는 새로운 책들이 꼽혀있었다. 새로 구입한 책에는
'이걸 제일 먼저 읽어보세요.' 라는 포스트잇 메시지가 있었다.

평일은 일이 바빠서 그녀가 방을 비우는 시간과 내가 갈 수 있는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내가 일이 끝나고 나면 그녀는 최소 일이 끝나고도 두세 시간은 지난 후였다.

때로는 그녀가 집에 있는 동안 들어가 볼까 라는 망상을 하며 가슴이 설레였지만,
그렇게 된다면 이 애매한 상황은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것만 같았다.

나는 지금 이 상태가 마음에 들었다.

최근 회사에 사람이 부족했기 때문에 집에
다가올 즘이면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다리가 풀려버렸다.

'죄송해요. 다녀갑니다.'

나의 방 현관 앞에 붙어있는 메시지가 그날 편의점에서
보여준 그녀의 태도 의미를 알려주었다.

'찾았다.'




















서둘러 집에 들어가 보니 집안에서 딱히 이상한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방을 둘러보며 혹시나 그녀가 어딘가에 남아 기다렸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소소한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혼자 사는 남자 집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듯 내 방도 지저분했다.
대충 던져놓은 휴지 조가리, 담배 껍데기, 생수병, 컴퓨터 앞 담배꽁초가 산을 이룬 재떨이.

사라진 물건 따윈 보이지 않았지만, 주변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었다.
텅텅 빈 재떨이 밑에 '다른 물건은 건드리지 않았어요.' 하는 메시지가 있었다.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손에 쥐고 있던 검정 비닐봉투 안에서 맥주가 식어가는 것이 떠올라 냉장고에 다가가니
'맥주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라는 메시지가 있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안에는 열댓 개의 맥주 캔과 과일이 몇 가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냉장고 가장자리에 사온 맥주를 대충 욱여넣으며 살살 기분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뒤돌아 대충 옷가지를 벗어 던지며 땅바닥에 널브러트렸다.

욕실 앞에는 '샴푸가 다 떨어졌어요.' 라는 메시지가 있었다.

욕실에서 따뜻한 물로 씻으며 몸을 헹구는 동안 거울에 슬슬 김이 서렸다.
서린 김 사이로 무언가 어렴풋이 글자들이 보이는 것 같은데 잘 읽을 수가 없었다.

"뭐, 잘... 뭐지?"

물을 뚝뚝 떨구며 옷을 말려두는 건조대로 다가가자 옷가지가 전부 차곡차곡 개어져 있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내며 개인 빨래들을 주어 서랍장에 담으려는데 양말 더미에서 쪽지가 하나 툭
하며 떨어졌다. '이 양말 구멍 났어요.'

빨래 더미를 내려놓고 개인 양말을 펼쳐보니 정말로 뒤꿈치가 다 헤져서 구멍이나 있었다.
양말을 움켜쥐고 휴지통에 대충 던져 넣었다. 휴지통 가득하던 쓰레기들도 모두 사라졌다.

육포를 담을 접시를 씻으러 싱크대에 다가서니 그릇들이 전부 설거지 되어있었다.

'너무 오래 안 하시면 냄새나요. 오늘만 제가 할게요.'
그릇수납장에 쓰여있는 글을 읽으며 접시를 하나 집어 들었다.

육포를 조금 구워서 먹으려고 하는데 '과일 안주로 드시면 안 돼요?' 라는 글이 가스렌지 위에 붙어있었다.

냉장고에서 사과 하나와 맥주를 한 캔 집어들고 방에 들어가 TV 리모컨을 집어들었다.

'저희 집에서 보시던 드라마, 다운 받아놨어요.' 라는 TV 화면 위의 글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 여자는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컴퓨터 책상에 앉아 컴퓨터에 전원을 넣었다.

전원이 켜지는 동안 책상에 붙어있는 책장을 슬쩍 들여다보자
내가 읽던 책에 '이 책 재미있네요.' 하는 글이 붙어있었다.

책을 꺼내 들고 펼쳐 보자, 확실히 내가 읽던 부분이 아닌 곳에 책갈피가 꽂혀 있었다.

'걱정 마세요. 혹시나 해서 원래 부분에도 책갈피 끼워 놓았어요.'

문득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어디에서 이 책을 읽었을까?
이 의자에 앉아서였을까? 내 침대 위에 편히 누워서 봤을까?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 말고도 곳곳에 메시지들이 많이 붙어있었다.

창문틀 위엔 '환기 좀 시킬게요.', 선풍기 위엔 '이거 안 시원하네요.'
침대 머리맡에는 '베개 높은 거 쓰시네요.' 하는 글들이 있었다.

컴퓨터 안 혹시나 하며 야한 동영상을 담아둔 폴더를 찾아보니
'남자는 남자네요.' 라는 폴더가 새로 생성되어 있었다.

정지영. 그녀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녀에게 다가가서 무엇이든 함께 시작해보는 것은 어떠냐고 물어보고 싶어졌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매만졌다.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신발을 꺼내 드는데
또 현관 앞에 생각지도 못했던 메시지가 붙어있었다.

'걱정마세요. 이 이상은 다가서려고 하지 않을게요.'





















"대구라고."

"네?"

"아, 대구 인마 대구, 대구라고."

과장이 잔뜩 인상을 구기며 나를 노려봤다.

"내일 바로 출발이에요?"

"왜? 못 가?"

못 간다는 한마디를 기다린다는듯 과장은 비웃음을 흘렸다.
못 간다는 대꾸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더러운 새끼.

이번 주말에는 지영씨의 방에 들려볼 예정이었다.

주말을 끼워서 2주씩이나 대구에 붙어있어야 한다니,
나의 스토커 생활에 적신호가 들어오고 있었다.

퇴근길 편의점에 들려야 했다. 앞으로 거의 3주 동안 그녀와는 교류가 없을 것이다.
일단 얼굴은 한 번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

편의점 앞, 투명한 유리 뒤로 비춰 보이는 그녀는 다음 교대자와 인수인계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편의점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어서 오세요." 라며 반사적으로 인사를 했다.

"마일드세븐 하나 주세요."

"각으로 드릴까요. 팩으로 드릴까요?"

인수인계를 받고 있던 남자가 내가 물었다. 그녀는 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각을 꺼내 들고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바코드 찍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체
담배각을 계산대 위에 얹으며 스윽 나를 향해 밀었다.

"2,700원입니다."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보루로 주세요. 한보루."

"예?"

그녀가 적잖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며 고개를 들었다.

거의 매일같이 퇴근길에는 이 편의점에서 담배를 한 갑씩 사갔다.
다음날 일이 있는 날은 한 갑, 쉬는 날은 두세 갑.

한 보루를 샀던 것은 그녀를 스토킹하고 나서부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보던 남자 점원이
어물쩡 거리다가 테이블 밑에서 담배를 한보루 꺼내 들었다.

"27,000원입니다."

카드를 내밀며 그녀를 슬쩍 쳐다보았다. 내 나름대로는 한동안
편의점에는 찾아올 수 없다는 신호를 보내주고 싶었다.

표정이 굳어가는 그녀에게 어떻게 설명할 길은 없을까 고민을 해봤지만,
순간 저번 현관 앞에 붙어있던 메시지가 떠오르며 온몸에 기운이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걱정 마세요. 이 이상은 다가서려고 하지 않을게요.'

이 이상 내게도 다가오지 말라는 통보처럼 느껴졌다.

내 방에 얼마든지 놀러 오세요. 제 얼굴을 보러 편의점에 찾아오세요.
저도 당신의 방에 찾아가도 되죠? 편의점에 찾아오는 당신을 기다려도 되죠?
하지만 우리 이 이상으로는 발전하지 말아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당황스러워하던 표정이 마음에 밟혔지만
성실한 스토킹을 하기 위해서 생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빨리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궁리를 하며, 다음날 대구행 버스에 올랐다.

대구지사에는 내가 손봐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바로 다음날 출장을 떠나라는 말이 날 괴롭히기 위한 것으로 생각했었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의외로 정말 많이 바쁜 상황이었다. 과장이 나를 마냥 떨거지처럼
생각했던 것도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정보다 하루 일을 일찍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그동안 지영씨와 교류가 끊기는 것이 일하는 내내 마음에 걸렸다.

동네 어귀에 접어든 나는 편의점에 들러 지영씨의 얼굴을 먼저 보고 싶었다.

"2,700원입니다."

처음 보는 여학생이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카드로 하실 건가요?"

"새로 오셨나 봐요?"

아르바이트생은 내게 찝쩍거리지 말아 달라는 듯 인상을 구겼다.

"네, 그런데요."

"전에 계시던 분은요?"

"예?"

"전에 계시던 여자분이요. 여기서 일 년도 넘게 일했는데요."

자신도 급하게 뽑힌 아르바이트라 자세한 사항은 잘 모르지만,

월요일부터 원래 자리를 지키던 사람이 갑자기 결근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저야 모르죠."

"아무도 확인 안 해봤데요?"

"몰라요."

바로 편의점을 빠져나와 지영씨의 집으로 향했다.
이미 주변이 어둑해졌는데도 지영씨의 방 창에선 불빛 하나 새어나오지 않았다.

열쇠를 조심히 돌리며 발소리가 안 나게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불 꺼진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 흐르며 사람의 기척이란 일체 느껴지질 않았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신발을 벗고 방에 올라 방을 한 바퀴 돌아보았으나, 역시 그녀는 집에 없었다.

'이거 아직 안 봤죠?' 하는 메시지가 책장에 붙어있었다.

냉장고 위에는 '맥주 사놨어요. 드시고 가세요.' 라는 메시지가,
화분 위에는 "이거 물 얼마나 주는 거에요?'하는 메시지가,
그 이외에도 방 이곳저곳에 내가 찾아올 것을 기다린 듯 붙여놓은
메시지들이 사방에 널려있었다.

왜 편의점을 관뒀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향했다.
마치 이별이라도 한 연인처럼 마음이 무거워졌다.

우리가 연인이었다면 나는 무차별적인 이별통보를 하고 사라진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떠났을 곳을 예상해보려 애썼지만, 나는 그녀의 스토커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녀가 사는 방. 그녀가 일하는 편의점.

나는 스토커 실격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기며 집 앞에 들어서자
집 앞 현관에는 그녀가 쓴 것으로 보이는 수십 장의 메시지가 붙어있었다.

'어디 갔어요?', '언제 와요?', '제가 무슨 잘못한 거에요?', '제가 찾아오지 않는 편이 좋았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죄송해요. 다시 왔어요.', '제가 싫어졌어요?', '돌아와요.'

'나쁜 놈. 스토커 주제에...'

방문을 열고 현관에 들어서면서부터 집안이 난장판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방의 식기는 전부 거실바닥에 깨져서 난잡하게 흩어져있었고 냉장고는 열린체 붉은빛을
뿜어대고 있었다.

거실 벽에는 알 수 없는 검붉은 자국이 번져있었다. 순간 피인 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주변을 보니 반찬 가지를 집어던진 흔적으로 보였다.

수많은 글이 벽지위에 적혀있었다. 벽지를 새로하지 않는 이상 지울 수 없는 낙서들.

'니가 먼저 좋아했잖아.', '개새끼.', '죽여버릴꺼야.', '어디로 사라졌어.', '왜 사람 가지고 놀아.'

착잡한 기분이 들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발밑에 난잡하게 늘어진 물건들을 발로 살살 밀며
조심스럽게 방문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 방문에 붙은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저, 여기서 기다릴래요.'

문을 열어젖히자 침대 위에서 곤히 잠든 그녀가 보였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이 두려웠다.
은은한 거실 불빛이 방으로 흘러들어 가 그녀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이 책은 이제 다 봤어요.'하는 쪽지들이 책장에 가득했다.

"왜 나에게 직접 말해주지 않아요."하고 묻고 싶다.

난 당신이 무섭지 않다. 자주 들려라.
하지만 더 이상 가까워 지지는 말자.

그런 뜻을 보였던 사람이 남의 집을 난장판으로 만든체
남의 침대에서 세상모르는 척 잠들어 있었다.

순간 그녀를 흔들어 깨울까 하는 생각이 들며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자꾸만 어딘가에서 내가 먼저 잘못을 했다는 미안함이 일었다.

조용히 방문을 닫으며 거실로 되돌아서 나왔다.

아무리 화가 났었다지만 정말 심한 광경이었다.
어질러진 거실을 치우려면 한참의 시간이 들것 같았다.

한쪽이 쪼그라든 사과를 집어들자 시큼한 냄새가 확 퍼지며 이상한 국물이 뚝뚝 떨어져 내랬다.
생각 없이 맨손으로 집어 들었던 나는 어느 정도 들어 올렸던 사과를 그대로 다시 거실 바닥에 떨궜다.

손에 묻어난 이상한 액을 바라보다 잠시 냄새를 맡아보니 쉰내와 썩은 내가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베란다에 묵혀 두었던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꺼내 들었다.
깨진 유리잔들과 접시들을 쓸어내는데 웃음이 나왔다.

원래는 어떤 성격의 여자일까?

그 개미 같은 목소리를 내던 여자가 아니었다. 집어던져 산산조각이 난
유리조각들이 스토킹 상대를 다시 생각해보라는 듯 반짝반짝 소리치고 있었다.

쓰레받기에 유리조각들이 묵직했다. 쓰레기통에 접시들을 쏟아부으니
모래가 떨어지듯 솨아하는 소리를 내며 쓸려 내려갔다.

청소기를 돌리지 않으면 자잘한 유리조각이 맨살에 파고 들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만, 청소기 소리에 지영씨가 잠에서 깨는 것이 두려웠다.

쓰레기통이 거진 유리조각들로 가득 차올라서야 대충 거실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방 수납장에서 검정색 비닐봉지를 꺼내 들며 고무장갑을 끼우고 바닥의 과일 조각들을
주워담았다. 과즙액이 눌어붙어 끈적거리며 주욱하고 늘어져 과일을 따라 선을 만들었다.

배가 부른 검은 봉지들을 현관 앞에 대충 늘어놓고 뒤를 돌아보니 아직 할일이 태산이었다.
방에서 곤히 잠든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 무슨 불평의 말을 해줘야 속이 시원해질까 궁리를 했다만,
담배를 달라는 말밖에 붙여보지 못했던 자신의 초라함만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내게 소리치며 화를 내고 그녀의 고함을 들으며
되려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하게 그려졌다.

거실의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나고 깨지지 않은 그릇들과 가재도구들을 한꺼번에 싱크대에 얹었다.

설거지를 하다 보니 대부분의 그릇이 이가 나가서 쓸 수가 없었다.
설거지가 다 끝날 무렵에는 쓰레기통에 그릇들과 유리조각들이 산처럼 쌓여버렸다.

산처럼 쌓인 유리들을 보며 한숨을 짓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젖은 손을 싱크대에 서너번 털어내며 라이터 끝을 조심히 잡아들어 불을 붙이는데
그 적은 물에도 부싯돌이 젖어버린 듯 불이 들어오질 않았다.

라이터를 몇 번 더 돌려보다 주변을 돌아보는데, 거실에는 라이터의 흔적이 없었다.

라이터를 찾으려 내 방의 문은 조심히 열어젖혀자 지영씨가 침대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지영씨와 나는 침묵을 지키며 마주치는 눈빛을 피했다 다시 마주치기를 반복했다.

입에 물었던 담배가 무안스러워져 베어 물었던 것을 손에 쥐어
슬며시 담배각에 밀어 넣자 지영씨가 입을 열었다.

"어디 갔다 왔어요?"

"출장이요."

"왜, 말 안 해줘요?"

"..."

처음 해보는 정상적인 대화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왜 추궁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으면서도 추궁을 당하는 모습이
싫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억울하다는 것처럼 갑작스레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저에 대해서 얼마나 알게 계시는 거에요?"

그녀의 울먹임에 나오던 말도 되려 다시 목구멍 안으로 자취를 감추는 것 같았다.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직장과 집, 이름, 나이밖에는 없다.

"다 아셔서 그런 거에요? 이제 저 안 따라 다니시는 거에요?"

"출장 갔었어요."

"정말요?"

"네, 정말이요."

소리를 눌러담듯 서럽게 우는 그녀를 보면서 우습게도 담배가 더 피우고 싶다고 느꼈다.



















지영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스토커의 눈빛을 애써 외면했다.

그의 등 뒤에서 들어오는 거실의 불빛이 환했다. 환한 거실에는
자신이 어질어 놓은 유리조각이야 쓰레기 더미들이 쌓여 있어야 했었지만
좀 전부터 치우는 소리가 들렸기에 애써 모르는 척 무시를 했다.

이상한 스토커.

다가오세요. 이 이상은 다가오지 마세요.
내가 전하는 뜻이 무엇이 되었든 그 말에 순종적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편의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갔을 때였다.

하고 싶은 일도 할 일도 없었다. 배가 고팠지만 밥을 먹고 싶지 않았고,
고단했지만 눕고 싶지 않았다. 울고 싶지만 눈물이 말랐고, 소리치고 싶지만 목이 매였다.

불도 켜지 않은 방에 앉아 뜬눈으로 출근 시간까지를 보낸 일도 많았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무거운 마음이 자신의 갈 길을 막고 있다는 막연하면서도 치졸한 마음이 들었다.

이틀이나 씻지를 않은 몸에서 쉰내가 났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옷가지들을 대충 세탁기에 쑤셔 넣었다.
차가운 샤워기의 물이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기름기가
덕지해서 뭉텅이가 지는 머리카락에 흠뻑 물을 적셨다.

샤워를 마쳤을 때 욕실에 수건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젖은 몸은 한 체로 방에 불을 켜고 서랍장에서 수건을 하나 꺼내 들어
몸의 물기들을 떨궈냈다.

머리의 물기를 수건에 짜내는데 방의 풍경에 이질감이 들었다.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방을 골똘히 둘러보자, 책장 위에 놓인
작은 선인장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초점이 풀리고 다리의 힘이 빠져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다시 방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으나 다른 곳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여러 명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내게 오만 원 두 장을 내밀며 "이런 곳에서 일하지 말고, 나랑 놀자."라고 했던 아저씨
전화번호를 물어보고선 내가 고개를 흔들자 "씨발년."하고 욕을 하던 이름 모를 학생.
이따금 실수인 척 내 엉덩이를 만져오는 편의점의 사장, 얼마 전 술 마시고 편의점 물건을
집어던지던 대머리의 중년, 물건을 건네던 손을 변태처럼 더듬었던 아저씨.

그리고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담배 한 갑만 사가는 아저씨.

말 없는 선인장 화분을 들어 가만히 바라보았다.
솜털 같은 가시들이 일어선 모습이 귀엽고 앙증맞은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방에 들어왔을까, 누가 들어왔던 것일까.
앞으로도 또 찾아올 생각일까.

내가 집에 없을 때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내가 집에 있을 때도 들어올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한밤중 몰래 집에 찾아들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오싹한 기분이 들며 허리가 꼿꼿이 펴지는 느낌을 받았다.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할까, 망설였지만 집안에는 화분이 하나 더 생겼을 뿐, 다만 그뿐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점점 추락하던 마음의 한켠이 경직되는 기분을 느꼈다.

아이러니하게도 범죄자의 침입에 그동안 잊고 있던 자극이란 것을 경험했다.
누군가 자신의 방에 머물렀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설ㅤㄹㅔㅆ다. 초라하고 꾸미지 않은
방안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미쳤다는 생각을 하며 방안에 메시지를 남겼다.

'신고하지 않을게요. 또 오세요.'

포스트잇 메모지를 현관에 붙이며 가슴이 방망이질을 쳤다.
일부러 방의 문에 열쇠를 채우지 않았다. 혹시나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이 오히려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토커는 주말이 아니고서는 집에 찾아드는 일은 없었다.
내가 적어 놓은 메시지들을 읽었다는 표시처럼 그가 방문한 날이면
메모지는 사라져있었다.

나는 방을 화사하게 꾸며갔다. 커튼의 색을 바꾸고 이불을 세탁했다.
허전한 방구석을 이리저리 보며 궁리를 했다. 시간이 지나며
이름 모를 방문객을 기다리는 방에는 활기가 생겨났다.

어렴풋 그려지던 스토커의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그저 조용히 나의 방에 다녀가는 이상한 사람.

가끔씩 멀찌감치 서서는 편의점을 들여다보는 아저씨의 얼굴이 머리를 맴돌았다.
한참을 서 있다가는 조용히 담배 한 갑만을 사가는 아저씨.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고는 못 견딜 만큼 애절한 마음이 생겨나는 자신이
이상스러우면서도 마음이 들떴다. 비로소 5년만에 자신이 다시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의점 사장에게 삼십 분만 일찍 교대를 부탁했다.
사장은 별일이라는 듯 꼬치꼬치 캐묻다가 순순히 자신이 삼십 분을 채워주겠다고 했다.

스토커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아니, 이제는 내 스스로가 그 사람을 스토커라고 여기는 것조차 웃기는 일이었다.
나는 그를 위해 방의 문을 열어주고, 음식을 준비했으며, 다시 찾아오라는 메모를 남겼다.

그 사람은 내 인생의 몇 안 되는 손님이었다.

편의점을 마치고 집까지 온 힘을 다해서 달렸다. 단지 삼십 분만 일찍 끝냈다고
그를 확인 할 수 있는 확실한 보장이 없었으며, 나는 그 남자가 집에서 나오는 것을
직접 마주하기보다는 한켠에 숨어 몰래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그를 위해서
더 좋은 방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으로 향해 계단을 오르던 순간 잠깐 익숙한 얼굴이 스쳐지나 갔다.
나는 방문을 향해 달리던 것을 멈추고 계단을 다시 내려가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해야 했다.

그 남자를 불러 세웠을 때,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아저씨, 여기사세요?"
"아니요."
"네, 저도 아저씨 본적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요?"
"여기 왜 오셨어요?"

그 남자는 당연히도 자신이 스토커라는 것을 부정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아는 얼굴. 편의점에 매일 같이 들려서 담배를 사가는 사람. 편의점 밖에서
기웃기웃 나를 엿보던 사람.

그를 돌려보내고 방으로 들어갔을 때, 모든 메모지가 사라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 사람이 확실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가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너무 드세게 그를 몰아 치진 않았나 자신을 탓하고 있는 나를
눈치챘을 때는 내가 그에게 얼마나 빠져들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다시 그가 편의점에 찾아들었을 때는 표현 할 수 없는 기쁜 마음이 일었다.
여전히 나의 방에 들려주는 것이 안심되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일이 줄어들고, 방을 꾸미거나 그 사람이 다시 찾아올 것을 기다리며
메모를 남겼다. 내가 남긴 메모의 의도를 알고 그대로 움직여주는 그 사람.

처음 그의 뒤를 쫓았을 때, 혹여 남자가 뒤를 돌아볼까 노심초사였지만,
그는 길을 걸을 때 곧잘 땅만 쳐다보며 걷고는 했다.

열쇠를 손에 넣는 것은 의외로 순조로웠다.

"아가씨 못 보던 분인데?"

그의 방 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나에게 어떤 아주머니께서 말씀을 걸어오셨다.
아주머니는 의심의 눈초리인지 호기심의 눈초리인지 애매한 태도로 나를 경계하며 다가왔다.

"아, 저희 남자친구네 집인데요. 지금 열쇠가 없어서..."
"여기 총각 여자친구야? 어마! 이쁘네~."
"아, 하하..."
"열쇠가 왜 없어. 남자친구 부르면 안 돼?"
"지금 일가서 좀 그러네요. 제 서류가방이 안에 있는데."
"아침에 두고나왔구만?"

아주머니는 무엇이 그리도 신이 나는지 싱글벙글하며 나의 거짓말에 일단일조 장단을 맞춰왔다.

"관리 아줌마 불러줄까? 열쇠 금방 가지고 올 텐데."
"정말요? 그러면 감사하죠."

관리자를 기다리는 동안 아주머니에게 계속해서 거짓말을 했다.
결혼을 하기로 했다. 사귄 지 2년이 넘었다. 일만 해서 서운하다.
내가 가끔 찾아오지 않으면 방이 개판이다. 술을 너무 좋아해서 탈이다.

아주머니는 내가 꺼내는 거짓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재미있는 듯 우리의 거짓 연애담에 푹 빠져들었다.
나도 내가 어째서 그렇게까지 술술 거짓말을 뱉을 수 있는지 의아스러웠다. 거짓말을 하면서
이 거짓말의 현실성이 느껴지는 것이 즐거웠다.

"여기 열쇠."

관리자 아주머니께서 시큰둥한 얼굴을 하며 열쇠를 건넸다.

"똥 씹다 왔어? 얼굴이 왜 그래?"

아주머니가 관리자분을 나무라자 관리자 아주머니는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여기 총각 혼자 사는데?"
"왜 혼자 살면 여자친구도 못사귀어?"
"아니, 아는 사람 맞는 건지."
"아! 됐어 무슨 내가 여기 살면서 이 처녀 얼굴을 한두 번 봤는지 알어? 괜찮아."

아주머니가 대뜸 얼토당토 안는 거짓말을 했다.
만난지 삼십 분 남짓 아주머니는 나에게 이상하리만치 깊은 신뢰를 갖은 듯 했다.

"아, 나 지금 부동산에 손님 와계시니까. 그쪽으로 좀 가져다줄 수 있어요? 저기 바로 앞인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관리자 아주머니는 급하게 발을 돌렸다.
나와 장단을 맞춰주던 아주머니는 내 등을 두드리더니

"남자는 혼전에 확실히 잡아 놔야되! 알았지? " 하며 계단을 올라가셨다.

내가 웃으며 고개 숙여 인사를 하자 함박웃음을 머금으시며 계단에 오르는 아주머니.
손 위에 열쇠를 바라보며 내가 근 한 시간여 동안 거짓말을 하며 이루어낸 것들이 믿겨지질 않았다.

열쇠를 따고 방에 들어섰을 때.

그의 방은 뭐랄까. 향이 없었다. 남자들의 냄새.
그리고 또 특별히 뭐라 콕 찍어 설명이 힘들었지만,
이곳은 남자의 방이라는 뉘앙스가 없었다.

꼭 남자들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 방에는 그 흔한 여자 연예인이나, 게임 포스터조차 한장 보이지 않았다.

커튼이 걸리지 않은 창문에는 어설픈 페인트칠이 볼품이 없었고,
침대는 순 시커먼 진 남색의 민무늬 커버로 재미없는 물건들뿐이었다.

냉장고 안에는 요리할 수 있는 식재료 따윈 들어있지 않았다.
물, 맥주 몇 캔, 언제부터 얼어붙어 있는지 가늠이 안 되는 고기 한 덩어리.

15인치 즘으로 보이는 작은 TV와 그 옆에 오히려 TV보다 커 보이는 모니터가 하나
컴퓨터와 함께 책상도 아닌 조막만 한 작은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옷장 속은 남자의 옷장이란 느낌을 풍기며 별 옷이 들어있지 않았다.
확실히 내가 그를 보아왔던 옷들이 대부분으로 그는 옷을 몇 벌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방을 둘러보다 졸업앨범을 찾아 앨범을 뒤적이며 그를 찾았다.
졸업 사진의 고등학생 시절의 얼굴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아 금방 그를 찾아낼 수 있었다.

2006년 졸업생. 이름 김성민.

어릴 적부터 어두운 상이었 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지금 모습을 보면 예상이 어려워 소스라칠
만한 일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의 모습보다는 밝아 보이는 느낌이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컴퓨터를 켜자. 바로 윈도우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하드디스크 내용물을 살살 뒤져보자, 순 게임과 영화 그리고 몇몇 야동이 나왔다.
남자란 별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약간 실망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웃음이 나왔다. 메모지에 휘둘려주는 상냥한 스토커가 그래도 남자는 남자였다.

한참 방을 뒤져보고는 텅텅 비어있는 방의 살풍경이 마치 남자의 삶을 대변하듯 느껴졌다.
나를 스토킹하는 남자에게 이런 생각은 모순되었지만, 나는 김성민이란 남자를 동정하게 되었다.

이 사람에게 이 이상 빠져들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발이 방을 떠나지질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지영씨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사람이 이렇게 오랜 시간을 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녀는 "나 원래 잘 안 울어요."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끝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자 그녀는 무엇을 잘못한 것이 있느냐며 반문했다.

그녀의 말에 대꾸할 수가 없었다. 우리의 사이에는 차가운 열쇠 쪼가리와
사람 냄새 어수룩하게 느껴지는 작은 방구석, 몇 장의 포스트잇 메모지가 전부였다.

"우리는 무슨 사이인 거에요?" 하고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의 무거운 침묵은 어떤 명확한 대답보다도 가슴에 와 닿았다.

우리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

"거실에 아직 유리조각들 있으니까 맨발로 나오지 마세요."

쓰레기통의 비닐봉지가 유리조각의 무게를 못 이긴다며 주욱 하고 늘어졌다.
하는 수 없이 쓰레기통을 통째로 들고 집 앞 분리수거장에 나가야 했다.

유리조각들을 버리고 방에 다시 올라오니 지영씨가 거실에서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다.
청소기의 시끄러운 소음이 이 어색한 분위기를 중화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청소기 주둥아리로 자잘한 유리파편들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빨려들었다.
지영씨가 꼼꼼하게 이곳저곳에 흡입구를 들이밀고 있는 모습이 내 시선을
피해 이리저리 절묘하게 도망치는 것처럼 보였다.

웃기지만, 청소기를 끄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소기의 소리가 멈추고 들릴 "싱~"하는 침묵이 두려웠다.

이렇게 가까이서 그녀를 여유롭게 바라본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뒤에서, 옆에서 몰래몰래 지켜보다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접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훔쳐보던 그 여인은 지금 내 거실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녀가 내 방에서 나를 기다렸다는 것이 무엇보다 더욱 놀라운 일이지만,

아무 사이도 아닌 우리는 한 지붕 밑에서 이렇게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데도 그것을 참아내는 것에

무색하지 않다는 것에도 작은 놀라움이 일었다.

애써 시선을 돌리는 그녀의 뒷모습. 오랜만에 그녀의 푸석한 머릿결을 보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청소기를 아무리 돌려도 더이상 달그락거리며 유리조각이 딸려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그녀도 청소기를 멈췄을 때가 두려웠을까, 없는 조각을 찾는 척 한참을 더 밍기적 거렸다.

청소기를 끄지 않을 구실은 찾는 듯한 지영씨가 애처롭게 보였다.

"이제 그만 돌려도 되지 않을까요?"

내가 묻자, 지영씨는 말없이 청소기의 전원을 내렸다. 청소기의 소음이
사라지자 예상한 것보다도 더 무거운 침묵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식사, 는..."

지영씨가 말끝을 흐렸다.

"아직 이요."

지영씨가 말없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없을 냉장고를
들여다보려는 그녀의 행동에 급작스레 웃음이 터졌다.

"거기 있는 거 지영씨가 다 집어던졌잖아요?"
"제 이름, 아시네요?"

당연했다. 하지만 느닷없는 질문에 가슴 한켠이 뜨끔했다.
스토커가 변명거리를 찾을 이유도 여유도 없음에도 나는 그렇게 당황을 느꼈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녀 한쪽 손에 쥐어있는
냉장고 문에서 은은한 한기가 수증기가 되어 공중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지영씨 졸업앨범 봤어요."
"저도 성민씨 졸업앨범 봤어요."

그녀는 냉장고의 문을 슬며시 닫으며 내 정면을 향해 돌아섰다.
굳은 표정의 그녀는 나의 눈을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얼굴을 쳐다보는 것도 아닌
목 언저리의 애매한 곳에 시선을 둔체 입을 열었다.

"제 이름 말고 또 뭐 알고 있으세요?"

내가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이름, 나이, 집, 얼마 전까지 일하던 편의점 정도 밖에는 없었다.
대답할 것도 얼마 없으면서도 대답을 하고 나면 벌을 받아야 할 것처럼 겁이 나고 두려웠다.

"또, 뭐 알고 있으시냐니까요?"
"이름, 나이, 집. 그게 다에요."
"스토커가 알고 있는게 그게 다에요?"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볼 염치가 없어져 고개를 떨군체 끄덕였다.
자백, 자백이었다. 뻔히 알고 있는 그녀에게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자백했다.

"왜 그것밖에 몰라요?"
"그 이상 알아서 뭐하게요?"

내가 되묻자 지영씨가 쏜살같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제 방에 오셔서 뭐 하셨어요?"
"지영씨가 읽어보라던 책 읽고, 드라마 보고, 그게 다에요."
"선인장 화분은 왜 가져다 놨어요?"
"방이 쓸쓸해서요."

어째서인가 그녀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져 갔다. 그녀는 눈에 힘을 주며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날이 서 있는 것 같은 눈빛에 주눅이 들었지만 나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저 어떻게 할 생각인거에요?"
"모르겠어요."
"당신 바보야?"

지영씨가 화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좋았다.
자신의 방을 찾아오라는 그녀가 의외였지만 기뻤던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그 이상 다가서서 그녀에게 무언가 바래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그뿐이었다.

"뭘 더 어떻게 해요? 이 이상 다가서지 않는 다면서요."
"그건 제 이야기죠. 당신은 스토커잖아요."
"스토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그녀가 말이 없었다. 입술을 앙다문 그녀에게서 도망치는 나는 방으로 발을 옮겼다.
잠시 잠깐의 침묵이 괴롭게 느껴진 나는 그녀에게 돌아서서 물었다.

"밥, 먹을래요?"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돌아가실래요? 저 이제 쉬고 싶은데."

그녀가 더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저 HIV 보균자에요."
"예?"
"예비 에이즈 환자라구요."

HIV 보균자. 영화에서 봤던 단편적인 지식이 떠올랐다.

HIV 균을 가진 사람이 에이즈에 걸리지만, 아직 진행되기 전에 약물의 치료로 발병을 억제할 수 있다.
언제 병이 급작스레 진전될지는 모르지만, 현대의 의학으로는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는 병.
성적행위로 전염될 확률이 있지만, 이는 현저히 낮은 편이고 혹여 전염된다면 아직 완벽한 치료약은 없다.
억제만이 가능할 뿐, 세계적으로 자연 치료된 케이스가 두건 정도 발표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그저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성민씨 전염됐을지도 몰라요. 저희 집에 자주 찾아왔었잖아요."
"..."
"병원에 안 가봐도 되요? 저한테 전염됐으면 어떻게 할 거에요?"
"지영씨한테 전염될만한 짓 한 적 없잖아요."

지영씨의 눈가에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맺혔다.

"저희 부모님도 제가 무서워서 따로 살자시는데 성민씨는 안 무서워요?"
"뭐가 무서운데요?"
"그럼 저랑 키스하자면 할 수 있어요?"
"..."
"같이 자자면 잘 수 있어요?"
"..."
"같이 살자면 살 수 있어요?"

그녀가 흐느껴 울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좁은 어깨를 들썩이며 또 꾸역꾸역 구겨 삼키듯 한 소리와
함께 울기 시작했다. '다가서지 않을게요. 하지만 저를 찾아오세요.' 나 같은 스토커 따위에게 친절하게
구는 것이 이상스러웠었다. 아무것도 없는 빈방처럼 쓸쓸하게 느껴지던 그녀의 집이 눈에 밟히는 것처럼 선명히
떠올랐다. 작고, 좁고, 어두웠던 작은 방. 누구도 찾아오지 않고, 누구도 찾아오지 않게 하려 했던 방.

숨을 참는 것처럼 소리 없이 우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자 지영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기색을 보였다.
커다만한 눈이 놀라 휘둥그레진 모습이 애처로웠다. 잘 울지도 않는 다는 여자치고는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이 퍽 굵직했다.

"이 이상 다가서지 않는다는 뜻이 이거 때문이에요?"

내 질문에 지영씨는 대답을 하는 것인지 마는 것인지 애매한 고갯짓을 하고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몸이 얼마자 자그마한지 와락 껴안기라도 하면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럼 지영씨는 저랑 키스하자면 할 수 있어요?"

지영씨가 눈을 번쩍 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한번을 꿈뻑이지도
안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던 지영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같이 자자면 잘 수 있어요?"

지영씨의 얼굴에 어렴풋 웃음기가 서린 것같이 보였다. 지영씨는 더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같이 살자면 살 수 있어요?"

지영씨가 더더욱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지영씨의 눈가에 웃음기가 역력했다.
나도 웃음이 나와 주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름 심각한 고백을 했는데
나는 왜 웃음이 나오는 것일까. 그녀는 왜 웃어주는 것일까.

나도 지영씨의 앞에 풀썩 주저앉아 지영씨와 눈을 맞췄다.
지영씨의 큰 눈망울이 아직 다 못 흐른 눈물들과 함께 나를 응시했다.

"그럼 우리 같이 밥 먹어요."
"..."

오늘 처음으로 지영씨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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