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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보고 우정에 금 간 이야기
게시물ID : humorstory_4456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성성2
추천 : 28
조회수 : 2673회
댓글수 : 30개
등록시간 : 2016/05/30 11:3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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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대학 시절 같은 영화 동아리에서 4년간 동아리 벽을 장식하던 포스터처럼 존재감이 없던 친구 녀석은 영화를 인상 깊게 보면 그 영화의 캐릭터에 
몰입된 삶을 살았다. 신입생 때 레옹이라는 영화를 본 뒤 더운 여름에도 검은색 빵모자에 선그라스를 끼고 다녔으며 (다행히 옆에 마틸다 같은 
여자친구는 없었다.) 매트릭스를 보고 나서는 역시 한여름에 선그라스를 끼고 검은색 롱코트를 입고 다녔다. (다행히 옆에 트리니티 같은 여자친구는 없었다.)

안타깝지만 함께 영화 볼 여자친구가 없어서 나는 항상 녀석과 영화를 같이 보고는 했다. 그리고 내용이나 작품성과 상관없이 내 인생 최악의 영화는 
"러브 액츄얼리"인데 단순히 캐스팅이 화려하다는 이유로 크리스마스 때 연인들로 가득 찬 극장에서 녀석과 둘이 팝콘을 나눠 먹으며 다정히 봤다. 
우리는 섹시 미녀를 얻으려면 미국에 가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채 극장 밖으로 나왔다. 드럼 치던 꼬맹이도 여자친구가 있는데... 하며 영화 내용도 
염장 그 자체였지만, 극장에서 팔짱 끼고 다정히 나오는 현실 속의 연인들은 우리에게 더 큰 염장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말없이 신촌의 어느 
술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그리고 다음 해 크리스마스.... 단순히 여자 주인공이 예쁘다는 이유로 "노트북" 이라는 영화를 같이 봤다. 레이첼 맥아담스는 참 예뻤고, 우리는
여자를 사귀려면 자기 소유의 집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리고 우리는 말없이 신촌의 어느 술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우리가 크리스마스 때 드디어 멜로물을 벗어난 건 바로 "007 카지노 로얄"이 개봉했을 때였다. 영화가 끝난 뒤 우리는 새로운 007 다니엘 크레이그와 
에바 그린에 열광하며 제임스 본드를 외쳤고, 몇 년 만에 영화 이야기에 들떠서 술 마시던 신촌의 어느 술집에서 녀석은 갑자기

"아랫도리가 간지러운 데, 좀 긁어줘."

이 자식이 도대체 뭐하는 거야. 녀석은 의자에 앉아 제임스 본드가 사나이의 소중한 그곳을 고문당하는 장면을 신성한 크리스마스 시즌에 연출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얼굴에 핏줄을 잔뜩 세우고 부르르 떨며, 나를 향해

"아악! 거기 말고 오른쪽, 그래 거기 예스! 예스!"

그냥 그날 녀석을 고자 또는 외불알로 만들 걸 그랬다. 때리라고 할 때 때렸을걸..지금까지 후회된다. 

그 뒤 녀석은 자신 인생의 영화라는 "신세계"를 본 뒤 지금까지 정청 말투로 나를 몇 년 째 괴롭히고 있다. 그러다 얼마 전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인 "황정민"이 나오는 "곡성" 이 개봉했다. 녀석은 영화에 대한 정보도 없이 단순히 자칭 믿고 보는 대배우 황정민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개봉 첫날 야심한 시간에 예매했다. (녀석과 나는 영화 예매의 룰이 있는데 서양 영화는 무조건 내가 예매하고 아시아권 영화는 무조건 녀석이
예매한다.) 내가 극장에 도착했을 때 녀석은 담배나 한 대 피우고 들어가자며 나를 흡연장소로 데려갔다.

"갈 때 가더라고 한 대 정도는 펴도 되잖아?"

"정청도 지겨워 죽겠는데... 이제 이중구냐?"

"야~ 선선하니 영화 보기 딱 좋은 날씨네.." 녀석이 담배 연기를 하늘로 뿜으며 말했다.

"니가 죽기에 딱 좋은 날이겠지.. 그런데 너 이거 무슨 내용인지는 알고 보는 거냐?" (녀석은 영화 매니아 답지 않게 공포영화를 못 본다. 녀석의
와이프가 강동원을 좋아해 마지못해 검은 사제들을 봤는데 녀석은 박소담처럼 영화 상영시간 내내 사탄에 빙의되어 벌벌 떨었다고 한다.
그나저나 검은 사제들 하나도 무섭지 않던데..)

"이거 곡성에 벌어지는 연쇄 살인사건을 다룬 전원일기형 뜨릴러 무비 아냐. 우리 정민이 형이랑 곽도원이 사건을 해결하는 경찰로 나오고 
살인의 추억 같은 영화니까 브라더는 쫄지 말고 이 행님만 믿고 극장 들어가면 되는 거야."

"시나리오 쓰고 있네.. 미친 새끼가.." 라는 고니의 말이 떠올랐지만 참았다. 어디 한 번 156분간 지옥을 맛봐라! 녀석아! 하는 생각이었다.

곡성이 시골 형사와 서울 형사가 사건을 해결하는 수사물이라며 당당하게 극장으로 들어서는 녀석을 보며 영화보다 오랜만에 녀석의 익룡 소리와 
공옥진 여사님의 병신춤을 보겠구나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20세기 폭스사 로고가 당당히 등장하며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이 십쌔끼의 익룡 소리는 극장 안에 울리기 시작했고 몸을 격렬하게
비틀면서 녀석은 내 팔을 잡고 영화를 봤다. 그리고 쿠니무라 준의 집에 처음 곽도원 일행이 방문해서 곽도원이 어느 상자를 열었을 때 
녀석은 극장에서 가장 큰 목소리로 "으아아아악!!!" 외쳤고 극장 안의 사람 중에는 여성 관객들의 비명을 압도하는 사나이의 비명에 웃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뒤 부끄러웠는지 녀석은 손으로 입을 막으며 "읍~~ 어억.. 읍~~" 하며 최대한 소리를 죽여가며 영화를 봤다. 

그리고 156분의 지옥을 맛보고 극장에 나온 뒤 녀석이 한숨을 쉬며 꺼낸 말은...

"야.. 나 오늘만 집에 데려다주면 안 되냐? 도저히 혼자 못 가겠다." 였다.

녀석이 영화가 끝난 뒤 술 마시는 것을 제외하고 애프터 신청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런 모질이 같은 새끼.. 혼자 집에 가."

녀석을 버려두고 난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고 녀석은 천우희처럼 애타게 버스를 향해 "가지 마!!!" 라고 외쳤다.

앞으로 3년간 놀릴 영화가 생긴 게 기뻐했을 때 녀석에게 이제 나는 친구도 아니다는 문자가 왔다. 
녀석의 문자를 보며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뭣이 중헌지도 모르면서.. 븅신아. .너 막차 놓쳤어... " 라고 해주고 싶으나 녀석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주고 싶어 참았다.

그렇게 나는 또 다시 현실속의 아쿠마가 되었다.


출처 공포영화를 못보는 친구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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