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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이후 중앙아시아 <7> -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 上
게시물ID : history_44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름없는여자
추천 : 4
조회수 : 878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2/05/20 20:05:34
러시아인이 부랴트인에게 물었다 "너희는 왜 그렇게 안짱다리가 됐냐?" 부랴트인이 러시아인에게 대답했다. "칭기즈칸 시대부터 이렇게 됐다. 우리가 너희들 모가지 위에 걸터앉았던 그 시절부터" <1999년 부랴트인들의 농담> 이제 이 지긋지긋한 시리즈를 끝낼때가 왔다. 13세기 칭기즈칸이 전 유라시아를 휩쓸었을때, 아나톨리아 반도부터 일본열도까지 몽골인의 말발굽이 미치지 않은곳은 없었다. 기껏해야 남인도정도랄까. 차가타이 칸국의 전사들이 북인도를 한번 휩쓸기도 했었으니 말이다. 러시아도 이들의 확장에서 피해갈 수 없었다. 게다가 이들이 맞닥뜨린건 그저그런 몽골의 듣보잡 장군이 이끄는 어중이떠중이 유목민 토착민 군대가 아닌, 제베와 수베테이가 이끄는 정예 몽골군단이었다. 1222년 5월 31일 칼카 전투에서 러시아 대공들의 군대는 대패하고 무참히 짓밟히고 만다. 아닌게 아니라 이들은 말 그대로 짓밟혔다고 하는데, 몽골인들은 패배한 러시아인들 위에 판을 벌리고 그 위에서 잔치를 벌였다고 하지 않은가. 뭐 신빙성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후 킵차크 칸국이 건설되면서 러시아인들은 킵차크 칸국에 신속하게 된다. 모스크바는 이 와중에 러시아 대공들과 킵차크 칸국의 칸 사이에 설면서 힘을 기른다. 킵차크 칸의 비위를 맞춰주면서 다른 대공들의 조공등을 통제했던것. 이 와중에 생기는 약간의 차익은 수고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킵차크 칸국 역시, 우리가 계속 봐왔단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의 막장 시츄에이션, 즉 툭하면 터지는 내분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땅덩어리는 컸지만 점차 반신불수가 되가는 킵차크 칸국 밑에서 모스크바 공국은 힘을 계속 키워나갔고, 결국 등장한 한 군주에 이르러 러시아 초원에서의 힘의 균형은 뒤집어지게 된다. <이반 4세> 당시 킵차크 칸국은 러시아는 별 손도 대지 않았는데 알아서 자멸해서 아스트라한, 크림, 카잔 칸국 셋으로 나눠져 있었고, 원래 좀 정상이 아니던 킵차크 칸국을 셋으로 나누다보다 각각의 칸국도 좀 정상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반 4세는 포병대를 이용, 1552년 카잔을 함락하고 카잔 칸국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린다. 이 여세를 몰아 1556년에는 아스트라한 칸국까지 점령하기에 이른다.(자니 무함마드의 아버지 야르 무함마드가 이때 튀어나온 것이다) 비록 크림 칸국이 이반 4세가 원정하는 도중 모스크바를 털고 태워먹었다지만 판이 바뀐건 어쩔수가 없었다. 러시아 초원을 어느정도 장악한 러시아는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를 눈독들이기 시작했다. 이미 예전부터 우랄 산맥의 철벽 너머에 있는 모피가 넘쳐난다는 땅에 대해서는 소문이 있었고,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우랄산맥 기슭에 이곳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아 자신들만의 나라라고 할 정도의 세력을 구축했다. 그러나 우랄산맥을 넘어서 시베리아에 대한 본격적인 원정의 첫 포문을 여는건 카자크(카자흐가 아니다. 바보같은 소련이 카자흐 카자크 키르기즈를 혼동하는 바람에 후대에 아주 난리가 나버렸다) 도적떼 예르마크(Yermak)였다. 그가 스트로가노프 가문의 후원을 받았는지, 아니면 협박했는지 아니면 그냥 대책없이 간것은 확실하지 않으나, 그의 원정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당시 시베리아에 있던 칭기즈칸의 머나먼 후예인 쿠춤 칸이 다스리는 시비르 칸국(시베리아란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은 화기의 존재에 대해 몰랐으며, 예르마크의 카자크인들이 사용하는 화기에 속수무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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