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청원의 ‘화성’ 18대조 할아버지에 대한 의문 네가지!
화성갑에 ‘외계인’으로 낙하산 공천된 비리할배 서청원 선생께서 화성에 대한 인연을 어떻게든 만들어보려고 애쓰신다. 처음에는 외가가 화성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18대 조 작은 할아버지까지 등장했다.
1. 18대조 이면 도대체 서거정은 어느 시대 사람인가?
서거정은 1420년 생 ~1488년 졸.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이다.
서청원이 1943년 생이니 무려 500년 가까운 시간여행을 통해서 할아버지와의 화성 인연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과연 서거정은 어떤 사람인가?
계유정란으로 엇갈린 두 지식인의 행로 - 과연 이런 사람을 존경해야 할지는 각 자의 판단에 맡기자!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기 위해 벌인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없었다면 서거정과 김시습의 운명은 그처럼 엇갈리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어릴 때부터 비범한 능력으로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김시습은 다섯 살 때 세종 앞에서 재주를 보여 장차 크게 쓰겠다는 약조를 받았고, 서거정은 여섯 살 때 시를 지어 중국 사신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게다가 당대 최고 문인 관료였던 이계전에게 동문수학한 처지였으니, 그들의 앞날은 보장돼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유교적 명분을 송두리째 뒤흔든 왕위 찬탈은 21세의 순수했던 젊은 선비 김시습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삼각산에서 과거 공부를 하다가 소식을 접한 김시습은 삼일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통곡하다가 모든 책을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승복으로 갈아입은 뒤 평생 이어진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때 서거정은 침묵했다. 조선시대 초대 대제학을 지낸 권근의 외손자로 최대 문벌가의 자손이었을 뿐 아니라, 선조가 대군일 때부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집현전 교리로 있던 젊은 관료 서거정은 나서지 않았다. 아니 왕위찬탈을 주도했던 한명회, 권람, 신숙주 같은 공신들의 삶을 찬양하는 글을 수없이 지어 바쳤다.
그랬으니 서거정이 세조ㆍ성종이라든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최고 권력자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육조 판서를 빠짐없이 두루 거쳤을 뿐만 아니라 당대 문풍을 좌우하던 대제학의 자리를 무려23년 동안 독점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김시습 만큼 불운한 삶을 산 지식인이 없었다고 한다면, 서거정 만큼 영화로운 삶을 산 지식인을 찾기도 힘들 것이다.
[출처] 8, 서거정-김시습|작성자 unchi38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은 서거정이 죽던 날 “그릇이 좁아서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였고, 후진을 장려해 기른 것이 없다. 이로써 세상에서 그를 작게 여겼다”라고 혹평했다고 한다.
3. 서청원이 인연을 내세운 서거정은 화성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가?
서거정의 묘는 본래 서울 강동구 방이동에 있었으나, 도시계획으로 1975년 6월 13일 화성으로 이장했다는 기록만이 있다. 짧은 시간 찾아서 모를 수 있으나 다른 화성과의 인연이 있으면 알려주길 바란다.
4. 과연 서청원은 18대조 작은 할아버지 묘소를 몇 번이나 찾아 왔을까?
500년 가까이의 시간차이와 역사적으로 썩 자랑할 만한 인물이 아닌 18대조 작은 할아버지 서거정 묘소에 서청원은 얼마나 찾아왔을까? 이번 보궐선거를 앞두고 부랴부랴 찾아온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든다.
서청원의 사진을 보면서 든 몇 가지 의문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빽으로 낙하산 공천을 받은 노정치인이 없는 연고를 억지로 짜맞추려는 듯 18대조 ‘작은’ 할아버지까지 무덤에서 꺼내드는 모습이 참으로 측은하다. 게다가 그렇게 연고를 강조하는 할아버지가 역사적으로 권력에 아부굴종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으니 역시 피는 속일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