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초등학교 1학년 때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영화에 나오는 장면을 기억해서 세세하게 그리는 수준이었다. (예를 들어 전투함이 나오면 전투함의 구석구석을 다 기억해서 한 그림에 그리곤 했다) 나와는 달리 집중력이 좋고 기억력도 좋은 것 같다.
그런데 그 재능을 이상한 데에 쓰곤 한다.
01.
동생은 나를 자주 귀찮게 한다 (본인이 심심할 때만). 특히 내가 침대 위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를 노리는데 안 그래도 좁은 침대 위에 올라와서 날 불편하게 만든다거나 대놓고 내 다리 위에 누워 피가 통하지 않게 한다거나 아무튼 그런 식으로 날 괴롭힌다.
그날은 유독 괴롭힘이 심했고 그만하라고 몇 번을 말해도 듣질 않아서 '에이씨, 대체 원하는 게 뭐야?' 라고 질린 듯이 물었더니 목소리를 깔고는 (아마도) 지혜로운 표정을 지으며
'What do you want from yourself?'
라고 답했다. 그러고는 유유히 방을 나갔다.
알고 보니 동생은 탐 크루즈 주연의 <The Last Samurai>의 대사를 내게 친 거였다. (영화가 이미 개봉 된지도 몇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나는 '뭔 저런 놈이 다 있지?' 라고 생각했으나 그 이후부터 동생이 날 괴롭히면 내가 먼저 나서서 'What do you want from me?!!!!!'라고 최대한 비극적인 목소리로 외치게 됐다.
*해당 동영상을 찾을 수가 없어서 대사를 적습니다.
탐 크루즈: (절규하며) What do you want from me?!!!!!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와타나베 켄: (지혜로운 표정을 지으며) What do you want from yourself? 네가 너 자신한테 원하는 게 뭐지?
02.
다른 글에도 예전에 적은 적이 있지만 어무니께서 만화를 좋아하셔서 우리 남매는 어려서부터 어무니와 함께 만화를 보고 자랐다. 특히나 동생은 알고 있는 만화가 무궁무진하다.
위의 에피소드를 보면 예상이 갈 것이다. 그렇다. 동생은 내가 모르는 캐릭터의 대사를 외워다 내게 써먹는다.
일본어를 대충 알아서 무슨 뜻인지는 이해를 했는데 동생이 왜 저런 대사를 치는가에 대해선 알 수 없었다.
동생은 육 개월이 넘도록 항상 저 대사와 함께 내 전화를 받았다. (며칠 전에 정말 오랜만에 또 해줬다)
*대사의 주인공은 건담 더블오의 '그라함'이란 캐릭터다.
03.
동생이 자주 쓰던 캐릭터의 대사가 하나 더 있다.
동생은 가만히 있는 나를 손가락으로 찌르거나 (하나가 아닌 열 손가락을 이용한다) 혹은 찌를 것처럼 굴고는 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내 배를 찌르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오마에와 모- 신데이루.'
이젠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는데 얼마 후에 내 친구가 (외국인이다) 집에 놀러와서 동생이 나한테 저러는 걸 목격했다.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길래 설명을 해줬더니 그 뒤로 내게 같은 대사를 뱉는 인간이 한 명 더 늘어나게 됐다.
*해당 동영상 (주의: 마지막에 약간 잔인합니다)
04.
위의 상황들이 어째서 좋은 집중력과 기억력을 필요로 하는 건지 의문이 드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다.
저건 시작에 불과했다.
동생은 중학생 때 영화를 많이 봤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당시에 셀 수 없이 본 영화가 두 작품이 있는데 바로 <캐리비안의 해적>과 <반지의 제왕>이다. (두 작품 다 1편을 선호했다)
동생은 아마 연기자가 되고 싶었던 걸까. 녀석은 마음에 드는 장면의 대사는 전부 외우고 봤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 외운 대사를 내 앞에서 읊으며 연기하곤 했던 거다. 동생이 연기하는 잭 스패로우와 윌리엄 터너, 골룸, 프로도, 그리고 샘은 (그러고 보니 간달프의 'YOU SHALL NOT PASS!!!!!'도 자주 외쳐댔다. 내가 밀걸레로 바닥 청소할 때) 구경하기에 참 재미있었다.
녹화나 해둘 걸 그랬다. (지금은 해달라고 해도 안 해준다)
05.
이건 최근 일이다.
나는 낮잠을 즐겨 잔다. 그리고 낮잠을 방해 받는 걸 꽤 싫어한다. 물론 동생은 그걸 알면서도 낮잠을 자는 날 가끔 괴롭히곤 한다.
그땐 잠이 들락 말락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생이 방으로 들어오더니만 내 귓가에 대고 뭐라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어떤 녀석이 나에게 우유를 던졌어. 아주 신선한 우유를.' '......???' '...띠빨때끼야.' 'ㅁ...뭐???...' '똔때영이랑 결혼해따 이 띠빨때끼야.'
그렇게 간신조조 같은 목소리로 할 말을 다 마친 동생은 친절하게도 자신이 방금 선보인 일인다역 연기의 출처를 내게 핸드폰으로 보여줬다. 아래의 동영상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