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고향 집은 마당이 넓은 편이다. 넓은 마당에는 아버지께서 젊은 시절 손수 만드신 외양간과 어린 시절 내가 가장 무서워하던 장소인
화장실 건물이 아직 있고, 개집과 닭장, 그리고 토끼 무리가 사는 공간이 있다. 지금은 아들보다 아버지에게 더 소중한 동물 친구들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1. 개
우리 동네에 개를 키우지 않는 집은 거의 없다. 그리고 사료를 먹이는 집과 개밥을 먹이는 집 두 가지 부류로 나뉘는 데 우리 집은
부모님이 드시던 음식이나 가끔은 직접 개밥을 만들어서 주는 유형이다.
원래 한 마리의 개를 키웠는데 (이름은 멍멍이다. 우리 아버지의 작명 센스는 .... 하긴 그러니까 내 이름이 ㅠ,ㅠ)
대문을 항상 열어 놓은 우리 집에 떠돌이 개가 멍멍이 밥을 뺏어 먹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우리 집에 눌러앉아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놈의 이름은 멍청이다. 밥만 주면 좋다고 꼬리 흔들고 아버지 앞에서 폴짝 뛰다가 개 줄에 묶여 강제로 우리 식구가 되었는데
개 줄에 묶일 때도 좋아서 날뛰는 모습을 보고 '세상에 이런 멍청한 놈이 있나?' 생각하신 뒤 이름을 멍청이라 지으셨다고 한다.
멍멍이와 멍청이는 다행히도 보신탕을 드시지 않는 아버지 덕분에 올 복날에도 무사히 한 해를 넘길 수 있었다.
특히 손자들이 개를 좋아해서 아버지는 멍멍이와 멍청이를 아끼시는 편인데, 멍청이가 이름대로 멍청하게 줄을 풀어 놓은 어느 날
어디서 이상한 걸 주워 먹고 와서 토하고 설사한 날 아버지는 개를 안고 읍내 동물병원까지 달려가셨고 밤새 멍청이를 간호하셨다고 한다.
항상 사람이나 짐승이나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하셨던 아버지인데 연세가 드시니 마음이 약해지시나 보다.
2. 토끼
아버지께서 토끼가 몸에 좋다는 소리를 듣고 잘 키워서 토끼탕을 해서 몸보신 하실 계획으로 읍내 장터에서 새끼 토끼 세 마리를 데리고 오셨다.
무럭무럭 자라는 토끼 3형제를 보며 아버지는 언제 얘들을 끓일까 고민하시던 찰나 장날에 토끼를 죽이고 가죽을 벗기는 광경을 보신 아버지는
충격을 받아 '내가 저놈들 먹는다고 몸이 건강해지는 것도 아니고...' 하시며 그냥 키우기로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 아버지는 충격을 받으셨는데, 원래 키울 목적이 아니어서 암놈 세 마리인줄 알고 데려온 놈 중에 수컷이 있었는지
아니면 산에서 숫토끼가 내려와 붕가붕가를 하고 도망 갔는지 토끼들이 새끼를 낳았다고 한다. 그리고 왕성한 성욕의 토끼들은 마당에서
차지하는 자신들의 영역을 점점 확장했고, 아버지 표현대로 하면
"이것들이 달나라에서 떡이나 치지, 왜 밤낮이나 여기서 떡만 쳐서 새끼만 치는 겨..." 라며 한탄하시고는 했다.
그리고 새끼를 낳은 지 되지 않았을 때 새끼 몇 마리가 죽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개나 고양이가 물어 죽인 것 같지 않았고
수놈 중 한 마리가 죽인 것 같아 어떻게 자식을 죽이느냐며 분노에 수놈을 잡아 죽이려고 하셨는데....
어떤 놈이 수놈인지 몰라서 포기하셨다고 한다. 대신 새끼를 낳으면 이제 어미와 격리하는 조치를 취하신다고 하셨다.
얼마 전 병원 때문에 아버지께서 서울에 오셨을 때 내게
"삼삼이가 혼자라서 외로울 텐데, 토끼 몇 마리 데려다 기르지 않을래? 한 다섯 마리.." 라고 하셨다.
물론 나는 토끼 똥 치우기 싫어서 거절했다. 아무래도 이제는 감당하시기 힘드신 것 같다.
처음 토끼 세 마리를 기르기로 했을 때 토순이, 토돌이 (암컷인데....), 토동이 라고 이름을 지으셨는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녀석의 이름 짓는 것을 포기하셨다고 한다. 그냥 토끼들이다.
3. 고양이
우리 집에는 시골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러시안블루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 원래 총각 때 내가 키우던 봉구라는 녀석인데
자취 시절 내가 해외 출장을 갔을 때 며칠 봐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부모님은 내가 출근하면 혼자 있을 봉구가 불쌍하다며
나의 동의도 없이 시골로 납치해 가셨다.
도도한 서울, 도시 고양이였던 봉구는 빠르게 시골 생활에 적응해서 벌레를 잡는 것은 기본이고, 가끔은 들쥐도 잡아오는 야성의
본능에 눈을 떴다고 한다.
얼마 전 집에 갔을 때 봉구가 보이지 않아 아버지께 여쭤봤다.
"아버지 봉구는 어딨어요? 설마 봉구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봉구는 올해 딱 9살이다.)
"아.. 그놈 맨날 나가. 그러다 밥때 되면 알아서 기어들어 와. 못 나가게 하려고 별짓을 다해봤는 데 지가 알아서 나가.
짐승도 가둬 놓으면 병나. 그냥 제 하고 싶은데로 살라고 내버려둬."
정확히 봉구는 해 질 녘 어슬렁어슬렁 들어오더니 아버지 손바닥 위의 사료를 받아먹고 (건방진 녀석이 손바닥에 주지 않으면 먹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나를 보며 '나를 버린 닝겐 아니 잡놈'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며 하악 거렸다. 내가 새끼 때 그렇게 애지중지 키웠는데
배은망덕한 고양이 새끼.. 그루밍하다 털이나 목에 걸려라..
4. 닭
우리 형제가 고향에 내려가면 항상 닭볶음탕이나 백숙을 해주신다. 물론 그 재료는 마당 한쪽에 닭장에 있는 닭들이다.
다른 동물들에게 애정을 베푸시는 데 (심지어 토끼는 식용 목적으로 우리 집에 왔다가 지금은 붕가붕가 센터를 구축했다.)
유독 닭에게는 인정사정없으시다. "이상하게 닭한테는 정이 안가. 이놈들은 모이 줄 때도 고마운지도 모르는 것 같고..."
손자에게 백숙을 해주신다며 닭 털을 뽑고 계신 아버지 옆에 있던 나는
"그건 아버지께서 종북 좌파라서 그래요."
아버지는 묵묵히 닭털을 뽑고 계셨다. 부인하시지 않는 거로 봐서.. 우리 부자는 종북 좌파 인가보다.
5. 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신 아버지에게 소는 동물 이상을 넘어선 재산이라는 생각이 강하시다.
그래서 외양간도 직접 지으셨고, 처음 소를 사셨던 이유도 우리 형제들이 나중에 커서 대학 보낼 때 학자금으로 쓰시려 장만하셨다고 한다.
세 마리였던 소는 이제 한 마리로 줄었지만, 지금도 어떤 동물 친구들 아니 소는 아버지에게 우리 집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딸
같은 존재다.
지금도 비나 눈이 내리는 날이면 가장 먼저 외양간으로 가셔서 이상 없는지 확인 하시고 소에게 안부 인사를 묻고 들어오신다.
아버지께서 예전에 기르던 소를 팔았던 날 어머니 말씀으로는 아무 말씀도 없이 착잡한 표정으로 약주를 드셨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있는 소가 송아지를 낳아 그 송아지를 팔게 된 날 (그 송아지는 백수 아들의 대학원 입학금으로 썼다.) 밤새 새끼를 찾아 우는
소에게 아버지께서는 '내가 내 새끼 가르친다고 네 새끼를 팔았구나..' 하시며 계속 미안하다고 밤새 소 옆에 계셨다고 한다.
건강하셨을 때 아버지는 가끔 소를 운동시키기 위해 소를 데리고 산책하셨는데, 이제 아버지도 그리고 아버지의 늙은 소도 더는 산책하기가 힘들다.
항암치료를 위해 서울에 오시는 아버지는 서울로 출발하시기 전 항상 소에게 "나 서울 가서 건강해져서 올 테니까. 너도 꼭 살아있어라."
라고 인사 하신다. 그리고 집으로 내려오시면 가장 먼저 소가 잘 있는지 확인하신다고 한다.
아버지의 소원은 소보다 하루라도 더 사셔서 그동안 우리 가족을 지켜준 소의 가는 길 배웅을 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돼지고기보다 소고기를 좋아하신다. 허허..
이제 몸이 약해지셔서 밭일하시지 못하는 아버지의 삶의 낙은 이미 자신께서 품기에 너무 커버린 자식들이 아닌 자식들을 닮은 손자들과
동물 친구 아니 낳지는 않았지만, 자식과 같은 동물 친구들인 것 같다. 지금도 아버지께서는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소 여물을 직접 끓이시고,
여물을 주며 함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는 소에게 '간밤에 잘 잤니?.' 라며 안부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하시며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꼬리 치는 멍멍이와 멍청이와 생선을 던져 주신다. 본인의 식사를 마치시면 어슬렁어슬렁 아버지를 향해 밥 달라고 오는 봉구를 무릎에
앉히고 사료를 손바닥 위에 놓고 먹이신다. 요즘 봉구도 늙어서 씹는 모습이 신통치 않다고 걱정이시다. 그리고 토끼를 바라보며 '이놈들아 이제
그만 오입질 좀 해라.' 하시고 웃으며 사료를 골고루 뿌려 주신다. 그렇게 아버지의 하루는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