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금은 생존을 위해 능구렁이가 되어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렵지 않지만, 그 당시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려웠다.
그 이유는 단지 '그 사람이 나를 보자마자 실망부터 먼저 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녀와 약속한 시각보다 10분 먼저 약속 장소인 커피숍으로 도착했다. 그녀를 만나기로 한 커피숍에는 노트북을 펼치고 뭔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있는 커플들이 있었다. 일 때문에 여기 있는 사람은 아마도 나 혼자가 아닌가 싶었다.
통화내용만으로 그녀의 모습을 상상했을 때 <B 사감과 러브레터>에 나오는 B 사감을 연상시켰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별로 없었지만
그녀는 독신주의자일 것이고, 40에 나이의 가까운 까따로운 성격의 키 크고 마른 여자라 생각했다.
잠시 후 전화가 왔고, 커피숍 입구에는 내가 상상한 외모와는 전혀 다른 여인이 있었다.
160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작은 키에 단발머리를 뒤로 단정하게 묶고 작은 얼굴을 가리는 큰 뿔테 안경을 끼고 있는 내 상상과는 마른 것 하나 빼고는
일치 않지 않는 그녀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한 손에 원고 뭉치를 들고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A 입니다." 나는 어정쩡하게 서서 그녀에게 인사했다.
"네 멀리서 봐도 A 씨인 줄 알았어요. 오전에 전화 드린 B에요. 그런데 왜 사무실로 안 오고 커피숍에서 보자고 하신 거에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전화할 때보다는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짜증이 섞여 있었다.
"아.. 사무실에 있으면 선배도 있고, 다른 분들 일하시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알았어요. 뭐. 저도 밖이 편하기는 해요. 일단 원고부터 받으시고, 파일은 메일 주소로 보내 드렸어요."
그녀는 내게 원고 뭉치를 건네주며, 교정교열 업무와 과정에 대해 사무적으로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내게 설명하는 그녀의 모습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눈, 코, 입 개수는 나와 똑같았지만, 모든 게 작고 아담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머리를 묶은 게 머리끈이 아닌 노란 고무줄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수화기로만 전달되던 '사람 기를 죽인다는 느낌'보다 그녀와 일이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한 번 나눠봤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편집장님하고는 어떤 사이세요?"
"아.. 학교 선배입니다. 형과 학교 함께 다닐 때 심부름도 많이 시켰고, 저도 형이 좋아서 형을 따라다녔어요."
"뭐야.. 그냥 흔한 꼬붕이었네."
"네.. 좋게 말하면 친한 선후배이고, 나쁘게 말하면 꼬붕이었죠."
그녀가 꼬붕이라는 단어를 말하면서 살짝 웃는 게 보였다. 이렇게 웃는 모습이 귀여운 데 왜 전화할 때도 처음 봤을 때도 왜 그리
내게 인상 쓰고 짜증을 내며 말했을까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대한민국은 학연, 지연, 혈연 때문에 안된다니까. 원래 외주 드리는 분 있었는데, A 씨한테 편집장님이 이번에 외주를 맡기라는
지시가 있었어요. 오늘 드린 원고 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타이틀이니까 A씨 빠르게 작업해주셔야 할 거에요. 물론 A 씨가 한 번 보고 제게 주시면
다시 한번 제가 다시 봐야되지만요."
"네, 저 집에서 할 거 없고, 최대한 빠르게 해서 전달 드릴게요. 절대 출간에 차질 없게 할게요."
"당연히 그러셔야죠. A씨가 만일 일정 못 맞추면 편집장님부터 제 손으로 죽여버릴 거에요."
귀여운 얼굴에서 약간의 인상을 쓰며 내게 협박을 할 때 나도 모르게 그녀를 보고 웃음이 나왔다.
"저는 지금 사무실로 바로 들어가야 하는데, A 씨는 여기서 더 계실 거면 있다 가세요. 커피값은 제가 나가면서 계산할게요."
"아닙니다. 제가 잘 보여야 하는데, 제가 이따 나가면서 계산할게요."
"저 법인카드 들고 나왔어요. 걱정하지 말고 드시고 천천히 원고나 읽다 가세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그녀를 모르게 엄지손가락을 번쩍 들어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그녀는 나를 향해 '저 인간이 무슨 생각으로'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아..아.. 아일 비 백... 빠르게 원고 보고 다시 뵙겠다고요....."
그녀가 처음으로 나를 보고 웃었다. 그리고 "히키코모리인 줄 알았는데, 장난도 칠 줄 아시네요." 하며 처음으로 제대로 된 미소를 한 번
보여주고 커피숍 밖으로 나갔다. 나는 커피숍 문을 열고 나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계속 엄지손가락을 들고 있었다.
지난 몇 개월의 짧은 시간 동안 사랑했던 사람에게 실연당하고, 가족보다 더 가까운 시간을 보냈던 분을 이미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그곳으로
보내 드리며, 다시는 새로운 사람에게 정을 주지 못할 거로 생각했다. 나는 그동안 혼자 있는 게 편하다고 생각을 했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간절한 외로움을 타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