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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 이야기 _ 아버지와 방송 장비 추가
게시물ID : humorstory_43867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성성2
추천 : 33
조회수 : 2258회
댓글수 : 16개
등록시간 : 2015/07/11 17: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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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고향을 지키며 농사를 짓고 있는 작은 형이 "저기 노는 땅이 있는데 애호박이나 심어볼까" 하는 심심해서 저지른 봄철의 실수로 감당할 수 없는 양만큼의 애호박을 수확한 뒤 삼시 세끼를 애호박 죽, 애호박 된장국, 애호박 떡 등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애호박 처리를 위해 나를 시골로 불렀다.
고향을 떠날 때는 먼지와 자갈이 날리던 비포장도로였지만, 지금은 2차선 아스팔트가 깔린 시골 길을 운전하면서 내가 고향을 떠나던 17살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많은 것이 바뀐, 아니 바뀌고 있는 고향이지만 잊을 수 없던 고향에서의 추억들을 이야기하려 한다.
 
내가 9살이 될 무렵 아버지는 마을의 청년회장과 이장을 동시에 겸직하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청년회장 하나 하기도 힘든데 이장까지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네..." 하시며 아버지를 이장으로 추대한 분들 앞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였으나 뒤돌아서며 "앗싸 2관왕" 하시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물론 청년회장 시절 동네 대표 머슴으로 여기저기 마을에 일이 터지면 항상 제일 먼저 나서서 해결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마을의 원로 (좋게 표현하면 원로이고, 나쁘게 표현하면 청춘은 논과 밭에서 농업인으로, 노년은 마을회관에서 타짜로 인생의 황혼을 마무리하시던
할아버지 무리) 들은 아버지를 이장으로 추대했다.
 
아버지께서 이장이 되면서 우리 집이 바뀐 게 있다면 그때부터 아버지는 수당 형식으로 나오는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어머니께서 모르시는 불법
비자금 조성을 하시기 시작하셨고, 물론 비자금의 존재를 아는 우리 형제는 가끔 짜장면이 먹고 싶을 때나 용돈이 필요할 때 아버지를 협박해서
네 부자가 함께 비자금을 공유하고는 했다. 그렇지만 우리 집의 가장 큰 변화는 내가 중2가 될 때까지 마을회관으로 장비를 옮기기 전까지 
당시로써 파격적인 방송시스템과 거대한 확성기가 집에 설치되게 되었다.
 
젊은 시절 짧은 서울생활을 하는 동안 음악 다방의 디제이를 꿈꾸셨던 아버지는 방송 장비가 집에 왔을 떄 마이크도 입에 넣어보고, 앰프로 조절하며
신기해하던 우리 삼형제보다 더 흥분하셨고, 앞으로의 **리를 대표하는 강제 방송인 생활을 하실 생각에 기분이 들뜨셨다.
물론 우리집에서 "현명, 지성, 그리고 모자란 삼형제에 대한 자비없는 구타'를 담당하신 어머니는 저 모자란 네 부자가 과연 무슨 사고라도
치지 않을까 걱정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매일 아침 뽕짝이 울리던 마을의 격렬한 아침에 일주일에 2~3회 뽕짝이 아닌 아버지의 친절한 짧은 해설과 함께 팝송이 울리기
시작했다. 기억나는 대로 몇몇 방송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먼저 음악이 울려 퍼진다. 예를 들어 카펜터즈의 "Top of the world" 가 울린 뒤
아버지는 "아아.. 좀 전 노래는 카펜터즈가 부른 탑 오브 더 월드 인디,  카펜터즈가 뭔 뜻이냐 하면, 목수들이에유.. 목수들! 서양은 목수들도
 노래를 잘 하쥬? 이것들이 하라는 톱질은 안허고 밥 처먹고 노래만 불렀나.. 그래도 목소리는 좋네유.."
동네 할머니들은 "서양 것들은 여자도 목수하나벼.. ?" "서양 것들이 우리보다 등치도 좋고 심이 세잖여.." 하면서 카렌 카펜터의 목소리로
아침을 시작했다.  
그리고 비틀즈의 "yesterday"를 트시기 전 큰 형에게 비틀즈가 뭔 뜻이냐고 물으신 뒤 "딱정벌레"라고 하자.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마을에서
벌레의 노래를 틀어야하나 잠시 고민하시던 아버지는 "그려도 딱정벌레가 사람 괴롭히는 해충은 아니잖여..." 하시며 비틀즈의 노래를 틀었다.
 
방송 장비가 우리 형제의 장난에 안전한 건 아니었다. 부모님이 논 또는 밭으로 일을 하러 가시면 마이크를 잡고 친구들을 놀리는 방송을
했었다. 예를 들면 "4학년 1반 아무개가 ***을 사랑한다" 이런식으로 농촌발 디스패치처럼 친구들의 애정사를 폭로하고는 했었다.
물론 그런 방송을 하고 나면 고추밭에서 분노한 아버지가 달려오셔서 그런 장난을 친 나를 처절하게 응징하고는 하셨다.
 
하지만 가장 큰 실수는 아버지께서 하셨는데, 동네 어르신들과 거나하게 한 잔을 들이키시고 오신 어느 날 마이크 스위치가 켜진 지 모르고
술에 취하셔서 들어오신 뒤 "어유 이 왠수 또 술쳐먹고 왔네"로 시작하는 어머니와 부부싸움이 온동네 방송된 것 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분위기 수습을 위한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술 취한 애교멘트 들과 "임자~ 우리 이제 딸내미 하나 봐야 쓰지 않것어..", "아까 오후에 밭에서 보니꼐
우리 각시 뒤태가 애 셋 난 여편네 같지가 않더라구" 등 19금 에로영화 뽕이나 변강쇠 등에 나오는 멘트가 확성기를 통해 퍼지고
황급히 달려오신 옆집 아주머니 아니었으면 아마도 농촌 최초로 베드스피킹이 방송되는 사건이 발생할 뻔 했다.
 
그 후 아버지는 밝히는 남자를 넘어 "**리 사랑의 난봉꾼"이라는 소리와 "**이 아버지 네 째 언제 봐유?" 라는 말을 매일 들으셔야 했고,
아버지는 그 뒤 마이크를 꼭 필요하신 일이 아니면 절대 말씀하시지 않게 되었다. 
 
출처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분들은 공감하기 힘든 시골의 이야기입니다.
시골은 <전원일기>나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등의 드라마의 뽀로로 친구들 같은 착한 사람들만 뭉쳐 사는 곳은 절대 아닙니다.
가끔은 배신과 사기 그리고 불륜과 폭력 같은 막장 아침 드라마 같은 사건도 일어나는 사람 사는 훈훈한 동네입니다.
물론 도시보다 빈도는 낮겠지만요...
저는 재미있는 추억이지만, 도시 분들은 재미 없을 거 같아서 계속 써도 될는지 모르겄네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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