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할 일도 없고 웃고 싶은 마음에 간장게장 성공신화의 주인공 김수미 여사님이 주연 한 헬머니라는 영화를 봤다.
영화 자체는 그리 재미있는 건 아니었지만, 영화를 보면서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할머니가 생각났다.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내가 철이 들기도 전에 두 분 모두 돌아가셨다. 기억 속에서 할머니는 항상 편찮으셔서 누워 계시던 모습과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물 흘리시던 모습, 그리고 장례식 때 슬프게 울던 어머니와 씁쓸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던 아버지만이 내 기억속에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밭에서 일하실 때 비가 오면 다른 친구들은 할머니가 우산을 들고 데리러 왔지만, 우산을 가지고 올 사람이 없는 나는 비를 맞으며 집에 갈 때 나도 할머니께서 살아 계셔서 나를 데리러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스무 살, 대학 입학하고 두 달도 되지 않아 무단 외박 3회 달성으로 기숙사 조기 퇴소를 결정지은 뒤 어쩔 수 없이 나는 집값이 싼 자취방을
구하러 다녔다. 여기저기를 알아보다 학교에서 제법 먼 면목동까지 오게 되었는데, 다른 방들에 비해 월세가 저렴한 옥탑방이 있었다.
"그 집이 옥탑방치고는 방도 크고 좋긴 한데 집주인 할머니가 성격이 괴팍해서 다들 오래 못살고 나가더라고. 학생인 거 같은데 괜찮겠어?"
짐을 보관하고 있는 친구에게도 눈치가 보이고, '할머니가 괴팍해 봤자 내가 사고 안 치면 설마 나를 쫓아내겠어' 하는 마음으로
복덕방 아저씨를 따라 집을 보러 갔다. 그날이 내가 할머니와 만난 첫날이었다.
할머니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 보신 뒤 첫 말씀은
"근디 한국사람 맞는겨?" 였다.
"네, 저 고향은 **이고, 지금 **대학교 다니고 있어요."
"학생? 학생이면, 허구한 날 친구들 데려와서 술푸고 시끄럽게 하는 거 아녀?"
나는 모범생의 표정을 지으며 할머니께 다급하게 말씀드렸다.
"할머니 저 시골에서 와서 친구도 없고요. 술도 못 마셔요. " 물론 둘 다 뻥이었다.
"그럼 계약서 쓸 때 친구 데려와서 술 마시고 시끄럽게 하면 나가겠다고 써."
"네? 네.. 쓸게요."
그날 난 할머니께서 요구한 세 가지 사항을 월세 계약서에 포함하고 할머니의 세입자가 될 수 있었다.
그 내용은 1. 친구들 데려와 술 마시고, 소음 발생 시 방을 뺀다. _ 이 조항은 약간 불안하긴 했다.
2. 월세를 2개월 이상 연체 시 보증금에서 제하고 방을 뺀다.
3. 방에서 계집을 데려와 계집질 할 경우 즉시 방을 뺀다. _ 이 조항은 훗날 할머니께서 자진 삭제 해주시게 된다.
할머니는 젊으셨을 때 시장에서 두부와 채소를 파는 가게를 하셔서 그런지 성격이 억센 편이었는데, 동네에서도 소문난 괴팍한 할머니였다.
물론 시골에서 온갖 상상을 초월하는 각종 어벤저스급 할매들을 경험한 나에게는 그냥 서울 할머니였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런 할머니와 내가 처음 친해진 계기는, 만날 여자친구도 없고 할 일이 없는 주말 심심해서 고향에서 가져온 고추씨를 옥상 한편에
흙을 퍼다가 텃밭을 만들었는데, 할머니께서 그 텃밭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학생, 그런데 이것이 뭣이당가?"
"아.. 저희 집이 시골에서 고추농사를 짓거든요. 옥상 한쪽에 좀 심으면 안 될까요? 나중에 고추 열리면 할머니 고추 따 드셔도 돼요."
"젊은 놈이 농사도 지을 줄 알어? 그려... 나중에 고추 잘 익으면 나도 따 먹을게." (오이나 참깨를 심을 걸 왜 나는 고추를 심어서 대화 내용이
이상하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시던 할머니는 잠시 머뭇거리시더니 "그.. 자네 고추만 내가 따먹으면 미안항게.. 학생도 저기 장독대에서 고추장이나 된장
퍼먹어. 많이는 말고.."
"네, 감사합니다. 할머니."
그 뒤 난 반찬이 떨어지면 항아리의 고추장을 마음껏 퍼먹었다. 심지어 쌀이 떨어진 날은 찹쌀고추장이니 찹쌀이 들어있으므로 이것도 밥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고추장만 퍼먹은 날도 있었다. 물론 할머니는 속으로 내가 그날 왜 저 식충이한테 맘껏 퍼먹으라고 했을까 하면서 잠들기 전
이불을 팡팡 차셨을 것이다.
그 뒤 고추를 기르며 할머니와 나는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내 고추밭 한편에 할머니는 경쟁심인지 아니면 자급자족하는 친환경 생활을 실천하시기 위해서인지 상추밭을 일구셨고 함께 작은 텃밭을 꾸리며 할머니와 이런저런 대화들을 하며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한 놈이 여자친구에게 선물한다고 화장품을 사는데, 화장품을 선물할 여자 친구도 없고, 집에 계신 할머니께 선물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싸구려 립스틱을 하나 샀다.
"할머니, 친구랑 화장품 사다가 할머니 생각나서 작은 선물 하나 샀어요. 비싼 거 아니니까 부담 갖지 않으시고 받으세요."
할머니는 이 새퀴가 뭔가 나한테 죄지은 게 있나 하는 표정으로 선물을 받으시고, 바로 뜯어보시며
"증말로 싼 거 샀네. 그런데 할망구가 남사스럽게 무슨 빨간 루즈여..."
"할머니 이거 바르고 젊게 보이셔서 연애도 한 번 해보셔야죠."
할머니는 다 늙어서 요망스럽게 무슨.. 이렇게 말씀은 하셨지만, 웃으시면서 주머니에 넣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각난다.
할머니는 고맙게도 내가 군대에 간 동안 "뭐.. 어차피 그 방 내 놔봤자 나가지도 않을 건데.... 제대하면 다른 데로 눈 돌리지 말고 여기로 와야 혀"
라고 하시며 월세를 받지 않고 내 짐들을 보관해주셨다.
물론 나는 할머니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제대 후 다시 할머니의 월세 세입자가 되었다. 갓 제대하고 동기도 없이 혼자 학교에 다닐 때 주말에
할 일도 없이 방에서 혼자 기타를 치고 있는데, 할머니께서 내 방문을 두들기며 말씀하셨다.
"어이구, 젊은 놈이 날 좋은 주말에 혼자 기타치고 있는겨? 어여 간단하게 봇짐 싸고 기타들고 나 따라와봐."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간단한 짐을 싸고 따라갔는데, 그곳에는 분명 한 명의 헤어 디자이너가 작업한 듯한 획일한 디자인의 파마 머리와
등산복으로 한껏 멋을 낸 면목동 할매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할머니는 당당하게 "내 손주인디, 이놈이 나 없으면 혼자 밥도 지대로 못챙겨 먹어서 난 이놈 데려가야 쓰것어."
그날 나는 동사무소와 부녀회에서 보내주는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하는 효도관광을 따라갔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가 노래할 때, 그리고 공옥진 여사님의 병신춤을 연상시키는 격렬한 춤을 췄을 때 40여 명의 여인들이 환호를 받았다.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날 어죽을 단체로 먹었는데, 어죽을 못 먹는 나는 동네 할머니들에게 "어죽도 못 먹는 빙신"
칭호를 얻게 되었다.
여자친구가 군대에서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을 때도, 복학 후 짝사랑하던 후배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하고 좌절할 때도 나를 위로해주셨다.
"그년들이 눈이 썩은 동태눈이라 그런겨. 니가 좀 못나긴 했어도 워디가 워뗘서 너 같은 진국을 거절혀. 그년들 나중에 나이 들면 다 후회할겨..."
나도 할머니에게 위로를 받으며 제발 그녀들이 죽기 전, 딱 한번이라도 나를 걷어찬 것을 후회하길 바랐다.
그후 내가 여자친구에게 차였을 때 할머니와 옥상에서 삼겹살에 소주를 마신 적이 있다. 나는 할머니께 마치 엄마에게 "저년 나쁜 년이에요."라고
고자질하듯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어렵게 할머니께 "그런데 할머니는 왜 지금 혼자이신 거에요? 찾아오는 가족분들도 없으신 거 같고" 라고 물었다.
할머니는 잠시 말씀이 없으시다 내게 40여 년 전 할아버지와 하나밖에 없는 딸이 물놀이를 하다 두 분다 익사하고, 할머니 혼자 남게 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여자 혼자 살다 보니 사람들이 우습게 보거나, 쉽게 생각할까 봐 시장통에서 억세게 살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나는 술에 취해 나를 버린 그녀 때문이 아닌 할머니가 불쌍해서 펑펑 울었다. 할머니는 오히려 "너 좋은 여자 만날 테니까 추접스럽게 울지 말고
고기나 더 처먹어." 이러시며 나를 위로하셨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에 들어갔을 때도 할머니 댁에서 계속 지냈다. 그리고 몇 개월 받은 월급과 아버지께서 쥐꼬리만큼 보태주신 돈으로
나의 첫 애마 중고차를 장만한 뒤 시승식을 할 때, 조수석에 태울 여자친구도 없고 나는 할머니를 모시고 양평 쪽으로 드라이브를 가자고 했다.
"할머니, 제가 양평 가서 국밥 사드릴 테니까 예쁘게 꾸미고 나오세요."
"성성이 너 진짜 여자들헌티 인기 더럽게 없나 보네 이런 할망구나 데리고 다니고..."
"할머니 거기까지만요.." 나는 차오르는 눈가의 습기를 제거하며 할머니께 말씀드렸다.
운전 한 경험이 얼마 안 되고, 항상 안전 운전이 몸에 밴 나는 아우토반 같은 양평국도를 기어가고 있었다. 그때 뒤에 있는 트럭이
시끄러운 경적을 울리며, 상향등을 켜고 결국은 내 차를 추월할 때 접촉사고가 날 뻔했다. 그리고 트럭에서 아저씨가 내리더니 내게
온갖 쌍욕을 날리기 시작했다. 나도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르는 상황에 조수석의 할머니께서 문을 열고 내리시더니
"거... 이봐요. 트럭 양반. 그렇게 급하면 어제 오지 그랬슈. 그렇게 급한데 왜 오늘 왔슈...욕할 시간 있으면 어여 가랑게. 무슨 욕하고 지럴이여.."
트럭 기사는 더 화는 났지만 그래도 기본 예의는 있는 분이었는지, 아무 말 없이 그냥 자신의 차로 돌아갔다.
나는 속으로 '다음에 이런 일이 있으면 나도 바쁘시면 어제 오지 그랬슈?' 를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훗날 그 멘트를 했을 때 상대방 운전하던 분이 "젊은 놈이 사람 약 올리네.." 이러며 멱살을 잡혔었다.
할머니와 나의 인연은 할머니께서 암에 걸리신 뒤 투병생활을 하신 지 몇 개월 되지 않아 돌아가시면서 끝났다.
장례식장에서 "내 친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면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라는 것을 느꼈다. 마음은 너무 슬픈데 눈물이 나지 않았다.
한쪽에서 할머니의 재산인 집 처분에 관해 이야기하는 할머니 친척들을 보며 살아계실 때는 찾아뵙지도 않던 인간들이... 이러면서
원망도 들었다. 그리고 그 집에 더 있어도 된다고 했지만, 할머니께서 계시지 않는 그 집에 내가 더 있을 이유는 없었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기 위해 짐을 싸는데 할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할머니와 텃밭에서 이야기했을 때, 할머니 따라서 효도관광
갔을 때 등 할머니가 생각이 나서 짐을 싸다 말고 울었다.
얼마 후 낡은 3층 양옥집 자리에는 5층 빌라 건물이 생겼다. 지금도 그 빌라 앞을 지날 때면 내가 드린 빨간 립스틱을 들고
"우리 영감하고 연애할 때 이후로 남자한테 화장품 선물 받은 건 처음이여.."라며 수줍은 소녀처럼 웃으시던 할머니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