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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해결과제
게시물ID : soju_1597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꽃머슴
추천 : 2
조회수 : 1457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3/01/08 00:49:35

미해결과제(Unfinished Business) : 한 개인이 그의 일상에서 해결하지 못한 과업, 혹은 숙제. 이 과제를 해결함으로서 그 개인은 한 걸음 더 인격적인 성숙 혹은 완성에 가까워진다고 했다.(게슈탈트 학파? 오래되서 기억 안남)

 

나에게는 미해결과제가 2가지 있었다.

 

1. 내가 소년일 때 나의 곁을 떠나버린 부모님에 대한 원망

 

   이 과제는 2009년 대학에 다닐 때, John Mayer의 'Stop This Train'이란 곡을 들으며 혼자 풀었다. 나의 젊음과 방황이 어디로 갈 지 모르겠다는 화자의 질문에 화자의 늙은 아버지가 답해주는 내용(내가 듣기에)이 들어있는 노래였다. 귀에 깊숙히 박힌 이어폰을 통해 노래를 들으며 대학의 중간고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나는, 나의 부모님을 너무나 그리워하는, 남들이 부러워하던 부유한 가정의 막내아들로 세상 편하게 살고 싶었던, 십여년간 잊고 다락방에 가두어두었던 열 세살의 철부지인 나를 만났다. 그야말로 대면(Confrontation)했다.
 나는 골목길을 걷고 있었고 그 소년은 가로등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나는 다가갔다. 그리고 스물 아홉의 나는 열 세살의 나를 끌어안고 다독여줬다. 소년은 울면서 말했다. 왜 우리 부모님은 그렇게 빨리 돌아가신거냐고. 왜 그렇게 빨리 돌아가셔서 누나들이랑 나를 그렇게 힘들게 살게 했냐고. 부모님이 밉다고. 나는 대답했다.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대충 다 비슷하게 그런 것 같다고.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그렇지만 지금의 너를 보라고. 너는 그런 부러움 없이 너대로 잘 자랐다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돈도 벌고, 대학교도 다니고 있고. 기특하다고. 내가 너를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뒤, 가로등 불빛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골목 저쪽을 향해 달렸다.

 골목길을 걸었다.
마치 아홉살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며 걸었다.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나는 걱정했지만, 나는 누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그날,
어린 나를 만났다.
그리고 달래주었다.
나를 달래주었다.

 

 

 

 

2. 중학교 때의 왕따에 대한 기억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내가 그들 사이에서 지나치게 잘난척을 하고 눈꼴시린 짓들을 했을지는 모르지만, 부자짓 아들이었던 놈이 하루아침에 생활보호대상자가 되어서도 잘난체하는 꼴이 역겨웠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나와 함께 초등학교부터 다닌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다. 동네에서도,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사실, 주동자(Ring Reader)는 항상 있다. 누군지도 알았다. 그러나 내가 저항하기엔 나는 너무 작았고 힘이 없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친구들은 그 주동자의 편에 서 있었다.
 처음으로 혼자 세상을 등질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성공한다면 나는 나를 괴롭혔던 친구들의 곁에 평생을 살면서 그들의 절망과 불행과 좌절과 고통과 세상의 모든 괴로움을 겪게 하고 나는 옆에서 즐겁게 웃고 싶었다.  다행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나는 고등학교에 가서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멋진 친구들을 얻었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을 했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들도 얻었다.

 

사실, 나는 음악을 해서 유명해지던가, 돈을 많이 벌어서 큰 사람, 훌륭한 사람이 되어 나를 괴롭히던 친구들을 경멸하고 비웃으며 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네들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 그것마저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얼마나 웃긴가.

 

이십여년이 지난 일을 지금까지 담아두고 있었냐? 사내새끼가 쪼잔하게..라고 볼 수도 있다. 이건 왕따 혹은 Bullying을 당해보지 않았거나 이런 것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지껄이는 철딱서니 없는 개소리다.

 

언제쯤 용서할 수 있을까. 사실 이 질문은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그들은 그들이 가해자인지도 모르고 이십년을 살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나서 우스개소릴 하고 만담을 지껄이며 술자리 분위기를 띄우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면... 미안하지만... 난 단지 술맛 떨어지는 술자리가 싫어서 그랬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난 아직 그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직도 열다섯의 나는 분함을 죽이고 서럽게 울고 있다. 아직도 내 입술에 와닿던 그들의 흙묻은 실내화의 충격과 입술을 적시던 비릿한 피의 맛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열 다섯의 나는 서러움과 슬픔과 배신감과 두려움을 느끼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내 팔뚝에 입을 박고 울부짖고 있다. 난 아직 열 다섯살 짜리 땀내와 쩐내가 나는 까까머리 중학생인 나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고 있다. 아직 나에겐 미해결과제인 것이다.


이 미해결과제를 속히 해결할 수 있는, 내가 바라는 큰 그릇의 내가 되길 빌며 잠이 들어야겠다. '이제 그만 놓아주자'라고 나에게 말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  나와 나의 아내를 위해. 그리고 나의 아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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