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지 않습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예상 밖의 고전 끝에 김대중에게 간신히 승리하고는 다시는 이런 선거를 치르지 않도록 유신 친위 쿠데타를 단행하였다
1년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
김대중은 71년 5월 선거 기간 중 의문의 교통사고(지원유세에 나선 김대중이
탄 차량과 14톤 대형트럭이 충돌하는 사고. 이후부터 지팡이를 짚게됨 .
운전사는 교통사고를 냈다고 1년 징역을 받았는데 다 살지 않고 나왔고
나중에 의문의 죽음을 당함.)로 인해 다친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와 있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처음 김대중 납치를 지시했을 때,
중정 해외담당 차장보인 이철희와 일본 현지의 중정 책임자인 주일 공사 김재
권(본명 김기완)은 사안의 심각성을 감안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하
지만 “내가 책임지겠다”는 이후락의 말을 믿고 곧 납치를 추진했다
(그랜드팔레스호텔)
납치 현장인 동경 그랜드 파레스 호텔 2210호실에서 대형 륙색 2개, 숄더 백 1개,
길이 10미터나 되는 나일론 끈, 티슈 페이퍼 등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범인들이 당초에 피해자를 살해하고 그 시체를 토막 내어 피는 목욕탕 배수구로 흘려보내고, 시체 토막은 륙색에 넣어 짊어지고 나오려고 계획.
"당초의 계획은 호텔 방에서 토막 살해를 할 셈이었는데,
김경인 의원이 나타나는 바람에 급히 계획을 바꾸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회고록中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통해 김대중을 지하 주차장으로 끌고가 호텔을 빠져나갔
다. 그들은 선명한 지문은 물론 권총 탄창과 대형 륙색, 마취제가 든 영양
제 병 등 수많은 물건을 객실에 남겨놓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그중에
는 북한 담배도 있어 중정이 김대중의 납치를 북한의 소행으로 덮어
씌우려 했다는 추측을 낳기도 했다.
(용금호 실제 모습)
중정 요원들은 도쿄를 빠져나와 공작선이 대기 중인 오사카에서 김대중을 작
은 배에 싣고 1시간 정도 먼바다로 나가 그곳에 정박 중인 큰 배에 실었
다. 화물선으로 위장한 중앙정보부의 특수공작선 ‘용금호’였다.
온몸을 단단히 묶인 김대중의 입에는 재갈이 물렸고, 몸에는 50kg의 물체
가 달렸다.
"(바다에) 던질 때 풀어지지 않게 단단히 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한편 납치 당일 일본으로부터 김대중의 납치 사실을 전해들은 필립 하비
브 주한 미 대사는 이튿날 박 대통령에게 “중앙정보부의 소행인 것
을 알고 있으니 김대중을 풀어주라”고 요청했다.
"풀어주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가 용금호로 전달된 가운데 8월 10일 밤 용금호가 부산외항에 도착했다.
배에서 하루를 보낸 뒤 11일 밤 서울 모처의 중앙정보부 안가로 옮겨진 김대중
이 서울 동교동 자택의 초인종을 누른 것은 8월 13일 밤 10시 20분쯤이었
다. 입술 오른쪽은 부르텄고 다리에는 타박상을 입었다.
귀환한 김대중 전 대통령
이거외에 장준하는 산에서 의문실족사, 배신했던 부하 김형욱 닭모이 만들기 공포정치를 위해서 인혁당 빨갱이로 몰아가서 사형시킨 사건
박정희 두둔하는 놈년들아 너와 니가족 친척들이 토막나도 빨갱이로
몰아당해 목매달아 죽어도 닭모이 만들어도 두둔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