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일이 있었고, 그 이후에 올라오는 글의 주제 또한 종교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네요. 분위기 전환이 필요한 타이밍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시점에서 제일 적절한 전환은 신선한 주제를 가지고 와서 사람들이 공통분모를 가질 수 있을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글을 쓰는 저는 공통분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무서운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기에 편하게 이야기를 꺼내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야기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최대한 다양한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내용과 형식을 서술하는 쪽으로 잡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10대 후반~ 30대 초반)의 생각에 있어 많은 변화를 보이는 주제가 ‘결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가, 결혼식은 어떤 형태가 좋은가, 가족을 형성할 때 바람직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은 무엇인가, 결혼 제도 안에서 인간의 감정과 사회적 구속력 중에서 어느것이 중시되는가 등]
여러 방면에 있어 결혼제도가 재조명되어가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바뀔 수도 있지’ 뭐 라고 넘기기에는 인격형성이나 사회적 활동의 기본 형태에 밀접하게 관련된 주제이기에 오히려 이야기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드네요.
우리나라의 결혼제도는 대부분의 국가가 그러하듯 일부일처제의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족 형태는 사회의 변화와 많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데
조선시대의 가족형태에서 지금의 형태로 바뀐 것을 시간의 양적 측면을 고려하면 엄청난 변화가 있었지 않나 생각됩니다. 또한 호주제 폐지나 간통죄에 대한 논란 등은 케케묵은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현재까지도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 주제들이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면서 많은 변화를 보여주는 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논의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가 채택하고 있는 일부일처제에 대한 한 가지 비판적 입장을 말하려고 합니다.
먼저 일부일처제는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남성성, 여성성에 대한 이미지에 가장 큰 변화는 양성애(동성애를 포함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불과 십년 전만 해도 이러한 동성애는 비정상적인 것 또는 숨겨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양성애를 인정하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고 더 이상 비정상적인 것이 아닌 흔하지 않지만 그럴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양성애뿐만 아니라 스와핑(부부 교환 섹스. 정확한 표현: 스윙잉)도 하나의 사회적 단면으로 보여진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현재 가족을 구성하는데 있어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일부일처제가 제대로 수용할 수 없다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비율이 미국 기준(우리나라 조사는 못 구하겠네요) 양성애(동성애를 포함한)가 남자 8%, 여자 7%라고 합니다.
또한 신문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스와핑을 주제로 한 설문조사 결과 ‘남편이 권유할 경우 스와핑에 동참할 생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30대 여성 40명 중 3명이 ‘동참 의사가 있다’고 답했고, 40대 여성은 40명 중 12명이 ‘동의할 수 있다’고 응답했다. 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분명한 것은 일부일처제의 바깥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꽤나 높다는 것입니다.
이 수치는 일부일처제가 비판될 수 있을법한 근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표면적으로는 일부일처제의 제도 아래 있지만 사실상 일부일처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세계에서 최고 수치를 보여주고 있고 이러한 이혼과 더불어 재혼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연속일부일처제 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연속일부일처제는 일부일처제라기 보다는 다부다처제에 가깝습니다.
사실 재혼자의 비율이 남성이 여성에 비해 월등히 높게 나타나는데 이러한 것은 우리의 결혼제도가 일부일처제로 보여지지만 일부는 다부다처제의 성격을 가지며 그 속에 일부다처제의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것은 일부일처제 자체를 옹호하는 의견에 대한 반박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무너져가는 일부일처제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일부일처제가 사회의 안정성과 집단의 강력함을 보장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일부일처제를 하고 있기에 인간의 문명만을 이야기 하는 것 보다는 동물을 관찰하는 쪽으로 논의를 해보겠습니다.
동물들 중에서 일부일처제의 형태가 관찰되는 종은 극히 드문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자바긴팔원숭이’인데 이 원숭이는 영장류(비교적 높은 지능)이면서 일부일처제의 형태가 관찰됩니다.
주목할 점은 이 원숭이가 멸종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이죠. 다른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다른 동물과 비교했을 때, 집단적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일부일처제가 개체가 가지는 사회적 힘을 강화하는데 필요조건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이 이 세상에 없다고 가정한다면 일부다처제 보다는 다부다처제가 더 강력한 제도라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도 생각해봅니다. 집단의 안정성과 강력함을 보이는 동물들을 관찰해보면 다부다처제의 형태가 일반적으로 관찰되니까요.
다부다처제가 더 안정적이다. 라고 말하고 싶은게 아니라 일부일처제는 사회 안정성에 기여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파르타쿠스라는 드라마를 보면 당시 로마의 사회가 얼마나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한편으로는 문란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로마의 몰락에 문란한 사회상이 언급되는 것은 다들 아실것이라 생각합니다.
(세계사는 제가 그렇게 밝지 못해 자세히 설명 못 드리는 부분도 있네요)
일부일처제 하에 로마는 그러한 개인의 성적, 사회제도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그에 일부일처제의 내부적 붕괴와 함께 사회가 붕괴한 것을 볼 때,
우리 사회에서 일부일처제의 바깥에 존재하는 많은 요구들을 묵살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어떻게 일부일처제 안으로 편입시킬지, 혹은 일부일처제가 아닌 더 넓은 요구를 포함하는 어떤 제도를 도입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일부일처제에 대한 한 가지 비판적 입장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