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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한국에서의 교사, 존재론적 배신의 슬픔
게시물ID : sisa_428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나도현
추천 : 5
조회수 : 389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08/02/03 13:14:42
원본 -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2&articleId=58748

교사가 되기 전 나는 몇 년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해 왔다. 가난해서 배우지 못 했거나 학생 시절 그릇된 생각하고 학교를 포기하였으나 다시 배움의 길을 찾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곳이다.

스스로 배우기 위해 온 학생들이어서 배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고 봉사활동을 하는 교사들에 대해 매우 고마워 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위해 좀 더 많은 것을 해 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지식 전달만이 아니었다. 내가 그들을 위해 희생적일 수 있었던 것은 교사와 학생들 간의 인격적인 상호 교감때문에 가능했다.  공부만 하기 위해 학교에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좋아서 학교에 오게 되었다. 그들이 너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나는 교사라는 존재가 단순히 지식 전달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학생이 공부를 잘하던 못하던 공부가 좋고 선생님이 좋고 친구들이 좋아서 학교에 오고 싶어 하는 그런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교육은 단순히 지식의 전달과 수용이 아니라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나는 경험으로서 그리고 페스탈로치와 같이 교육에 헌신한 많은 교육학자들과 존경하는 교수님들로부터 교육의 목적과 방향에 대해 어느 정도 갈피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는 아직도 교육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교사 생활을 해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확신은 있다. 내가 교사로서 존재하는 존재론적 이유 말이다. 그리고 한국 교육에서는 교사라는 존재론적 의미를 어떻게 배신하게 만드는 가를 알게 되었다.

 
가르침의 문제

지식 수준으로 따진다면 초등학교 교사보다 중학교 교사가 낫고 대학교수는 제일 좋을 것이다. 하지만 가르침은 다른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아무리 우수한 교수라도 가르침이 형편 없으면 그건 교육자라고 할 수 없다. 가르침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특성을 파악하여 지식의 의미를 어떻게 전달하느냐의 문제다. 1+1 = 2를 가르치는 것을 쉽다고 한다. 정말 무식한 소리다. 그렇다면 묻겠다. 1+1 이 왜 꼭 2인가? 아이들이 이렇게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먼 것은 왜 작게 보이고 앞에 있는 것은 왜 크게 보여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 줄래? 우리는 회장을 도덕적인 사람을 뽑는데 어른들은 왜 이명박을 뽑아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 줄래(난 특히 이명박 당선인에 대한 질문 받을 때 아주 곤혹스럽고 죄책감을 느낀다.)

이 같은 아이들의 질문은 단순한 지식 그 이상이다. 그건 철학이고 진리다. 진리를 궁금해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교육은 이걸 평가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1+1이 왜 2이란 것 보다. 1+1이 2가 되어 답을 맞추는 것이 더 실용적(?)이다. 

하지만 이걸 교육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건 훈련이다. 정답을 맞추기 위한 훈련...알겠니? 교육을 단순히 효율성을 따지는 사람들은 이걸 생각해야 한다. 이 훈련은 애들의 창의적인 사고마저 파괴한다. '나는 이게 아닌데  답이 2라고 하니 이구나' 라고 생각하는 순간 애들의 창의성과 공부에 대한 열정은 사라지고 만다. 이건 폭력이다. 전체주의적인 발상이다.

 
 지식 전달의 문제

도대체 지식이란 게 무엇일까? 나는 그렇게 묻고 싶다. 교육에서 지식은 정말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 교육에서는 지식의 껍데기만 가르친다고 한다. 내가 관성의 법칙을 알고 있다고 하자. 그래서 시험 문제를 맞췄다. 그런데 한국 학생들에게는 그 시험 문제만 맞으면 그만이다. '오예~ 맞았다.' 그걸로 끝이다. 한국에서  수단과 동시에 목적이 되어 버린 망할 시험 제도가 학생들을 그 지경으로 만드는 것이다.

다들 알겠지만 지식은 중력의 법칙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중력의 법칙에는 그것을 알기 위해 과학자로서 엄청난 노력을 한 뉴턴의 호기심과 열정이 있었다. 지식 전달은 중력의 법칙을 가르치되 동시에 열정을 가르쳐야 한다. 때문에 전공 교사의 전공에 대한 열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건 영어로 과학 수업을 하느냐 마느냐 그 이상의 문제다. 

PISA발표가 무척 흥미롭다. 학생들의 수준은 세계 톱인데 열정은 하위라는 것 말이다. 이건 핀란드 학생이 수준과 열정이 모두 톱이란 것과 사뭇 대조적이다. 왜 그런 줄 아는가? 아이들이 공부에 대한 열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교육은 온갖 시험과 효율정의 잣대로 아이들을 재단하기 때문에 그리고 잘 본 시험이 곧 능력으로 인정받기 때문에 열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학생들은 어려운 문제를 피한다. 어느 프랑스 학생이 어려운 문제가 나에게 더 의미 있다고 도전하는 것과 달리 한국 학생들은 되도록 쉬운 문제를 선택한다. 그래서 국가 경쟁력이 선진국 보다 뒤지는 것이다. 영어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고로 프랑스인 영어 못한다.

 
 평가 문제

이거 정말 짜증난다. 평가가 왜 있는데? 평가는 학생들이 성장하고 잠재성을 판단하기 위한 참고 자료다. 이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독일을 봐라. 한 교사가 몇 년간을 아이들을 관찰한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인가? 평가가 절대적이다. 그것도 시험 딱 1번이면 족하다. 그리고는 시험 점수 보다 아이들 학력 수준이 떨어졌네 마네 라고 아우성이다. 교육에서 평가가 목적이 되어 버리면 교육이 될 수 없다. 왜? 평가에만 얽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평가를 교육적으로 만드느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이에 대한 정부의 정책이나 국민들의 의견은 없다. 모두가 기존 제도에서 평가를 어떻게 잘 받아 잘 먹고 잘 사는냐가 문제다. 자립형 자립고, 영어 교육 모두 그것이 아닌가? 매우 이기적이다. 동시에 이것은 아이들에게 폭력이 된다. 대학교 시절 되도록이면 평가는 자제하고 하더라도 매우 교육적이어야 한다고 예비 교사들은 배운다. 진단 평가, 형성 평가, 총괄 평가가 도대체 왜 있는지나 아나?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존재론적 배신감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지식 뿐만 아니라 지식에 대한 열정, 아이들을 사랑으로 감싸고 그들과 대화하는 인격, 아이들의 잠재성을 파악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평가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지식은 자신이 권력과 부, 명예를 충족하기 위한 만큼만 이었으면 된다. 평가 역시 획일적으로 점수로 나누면 된다. 사랑? 그것보다 지식이 중요하다. 학교는 지식만 가르치면 된다. 이 때문에 교사는 교육자로서 나아가야 할 방향과 현실 교육에서 매우 큰 갈등을 겪게 된다. 둘 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공존하는 부분 보다는 상충되는 부분이 더 많기 때문이다. 당신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자립형 사립고, 영어 교육 이것이 정말 서민을 위하고 아이들을 위한 것인가? 과연 효율성이라는 경제적 잣대로 학습자를 수요자로 만들어 벌이는 그대들이 교육을 아는가? 진정 안다면 쉽게 교육이 무엇이다. 그리고 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경쟁?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게 보다 공동체이고 교육적이고 인간적이어야 한다. 우리 교육은 공동체가 없고 기계만 있지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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