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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코트
게시물ID : star_42521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소담아린아이
추천 : 12
조회수 : 345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10/30 23:58:49
내겐 오래된 코트가 하나 있다. 언제 구입한 것인지는 빛 바랜 세탁표시 태그처럼 희미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 대략 10년쯤 된 것으로 보인다. 특별한 디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무릎 정도 내려오는 길이에, 다소 색이 바랜 검은빛은 잘 닦인 검은 차체의 광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리선을 살려주던 끈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지 오래지만 그것이 사라진 디자인에 너무 익숙해진 상태다. 어깨에는 견장이라도 차야 할 것 같은 촌스런 단추가 있지만 별로 의식하게 되진 않는다. 이미 이 코트는 '너무 익숙한 옷'이기 때문이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이 코트는 적당히 추운날이나 대단히 추운날에 상관없이 나와 함께 했다. 소위 "평범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이 코트는 사실 어떤 옷과도 어울릴 수 있는 옷이었다. 물론 내가 촌스러워질 수 있고, 튀어보일 수 있다. 이 코트는 그런 내 모습을 억지로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촌스러우면 자연스러운 촌스러움을, 튀어보이면 자연스럽게 튀어 보이도록 하는 옷이었다. 이 코트는 나에게 강요하는 법이 없었다. 

10월의 마지막을 향해가던 그날은 세상이 바뀌었다는 걸 알리기라도 하듯 갑작스런 추위가 밀려왔다. 나는 세탁소에서 막 찾아왔지만 더 이상 '새 것'의 느낌이 나지 않는 그 코트를 꺼내입었다. 한낮은 따스했던 햇살이 잦아들 즈음 한 배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많은 작품에 출연했고, 많은 작품에 출연할 배우였다. 그가 정확히 언제부터 스크린에 얼굴을 비췄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전혀 생각지 못한 어떤 작품에서도 그는 연기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압도적인 데뷔를 치른 배우도 아니었다. 그는 에너지 효율이 매우 좋은 전구처럼 오랫동안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빛은 누구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서서히 강해지고 있다. 아무도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미 그 빛은 '너무 익숙한 빛'이 돼버렸다. 

배우 김주혁은 어떤 작품의 어느 역할에 내놔도 어울릴 배우였다. 그것은 '연기변신'이라는 거창한 용어와는 달랐다. 오랜만에 꺼내 입은 오래된 코트처럼, 그는 어떤 작품에건 어울릴 준비가 된 배우였다. 철저하게 자신을 변화시키는 대신, 작품이 지향하는 바가 더 돋보일 수 있도록 돕는 배우였다. 그는 작품이라는 요리에 메인재료나 가니쉬, 심지어는 양념이 될 준비도 마친 배우였다. 

갑작스럽고 허망한 죽음, 어쩌면 '천국'이라는 영화에 꼭 필요한 배역이 비어있었던 모양이다. '천국'이라는 영화를 찍는 감독은 참 배우 볼 줄 모른다. 김주혁은 이미 절정에 오른 배우다. 하지만 그는 그 절정을 넘어설 준비를 마친 배우다. '완성'이라는 단계를 뛰어넘으려는 배우. 이승에서 완성 너머의 단계를 맛보려던 찰나에 성질 급한 '천국'의 감독은 김주혁을 캐스팅 해버렸다. 그는 그곳에서도 마음껏 연기를 펼칠 것이다. 연기가 재밌어진다던 김주혁은 그곳에서 진짜 재밌는 연기를 펼칠 것이다. 그 영화를 보려면,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김주혁(1972.10.3 ~ 2017.10.30)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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