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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를 새로 영입했습니다.
기분이 째집니다.
무언가 작가가 된 느낌입니다.
이 렌즈는 주변부 해상력이 뛰어납니다.
무려 그것도 고정 조리개 입니다.
초음파 모터도 세계 최고급 수준이어서 그 어떤 피사체도 잡아낼 수 있는
그런 렌즈입니다.
나는 못 찍을 게 없는 세계 최고의 매그넘 작가 입니다.
왜냐면 이 렌즈는 가격이 100만원도 훨씬 넘는
간지 작살 뽀대 쩌는 렌즈니까요.
"
이십년전 당시 렌즈를 구매했을때 그때의 마음이 저러했었습니다.
너무나 어렸었더랬죠.
렌즈를 마운트 하고 돌아오는 길 지하철에 사진 속 노숙자 분이 바닥에 앉아 계셨었습니다.
노숙자 분 촬영분이 포함된 필름을 맡기고
며칠 후 출력물을 받아 들고 집에와선
헤이즐넛 향기 가득한 커피 한잔을 잔에 가득 담아
출력물들을 책상위에, 봉투를 거꾸로 들고 탈탈 털어 가득 펼쳐 봅니다.
그 세계 최강 렌즈로 기백만원 짜리 SLR 바디였는데
사진이 이렇게도 흔들려 버렸습니다.
그러나 사진은 흔들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흔들리게 찍은 것이었죠.
부끄러웠던 것입니다.
미안했던 것입니다.
죄송했던 것입니다.
삶이 고단한 사람을
제 이기심에 도촬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로 저는 더이상 이런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그리고 몇년 후
후배가 카메라를 새로 장만했다며
새로 산 카메라로 사진도 많이 찍어서 업로드 하겠다며
저에게 사진도 배울겸(배울 것이 없는데 말입니다.ㅜㅜ)
출사를 같이 나가자 합니다.
저 : "어디로?"
후배 : "오빠 우리~ 판자촌 가자"
저 : "... 그래"
그녀석은 카메라를 새로 장만한 덕에 기분이 좋았는지
한껏 차려입고
카메라를 들쳐메고 나왔습니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걸어 판자촌에 도착합니다.
녀석은 신이 나서 여기 저기 누비며 연신 셔터를 눌러댑니다.
신이 날만큼 나 있었습니다.
벌써 필름을 두 통이나 갈더군요.
다른 쪽에선 담벼락에 서서 V자 손짓도 하고
커플이 하하하하 깔깔깔깔 웃으며
앙증 맞은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어댑니다.
그리고 며칠 후 찍은 사진좀 같이 봐달라고해서
같이 현상소에서 출력물을 받아들고
커피숍을 찾아 사진을 한장씩 꺼내봅니다.
저 : "원하는 샷 많이 건졌어? 이쁘게 나온거 있어?"
후배 : "음... 이 사진 잘 나온거 같애. 느낌 있다 그치?"
사진속에는 판자촌 문사이로
허리 숙여 무언가를 하시는 한 어머니와
그 등에 낡은 포대기로 감싸진 아이가 있었습니다.
저 : "그래 이정도면 뭐 잘 나왔네"
후배 : "그치 그치? 오빠가 봐도 느낌 괜찮지?"
저 : "OO야"
후배 : "응"
저 : "신발 벗고 어디 들어갔는데 너 양말 빵꾸난걸 니가 알았는데, 그걸 다른 사람이 보면 기분이 어떠냐?"
후배 : "챙피하지"
저 : "이번주에 그 사진 드리러 가자."
후배 : "응? 누구한테?"
저 : "사진 주인공"
후배 : "미쳤나봐. 이걸 어떻게 드려"
저 : "그럼 왜 찍었어?"
후배 : "판자촌 가면 그냥 뭐랄까. 음. 느낌 있잖아. 약간 어두운 느낌도 나고. 쓸쓸한 느낌도 들고 뭐 많이들 찍잖아?"
저 : "OO야. 아까 너가 그랬지? 양말 빵꾸나면 부끄럽고 챙피하다고"
후배 : "당연한거 아닌가"
저 : "그치?"
후배 : "글치~~ 안 챙피한 사람이 어딨냐"
저 : "양말 빵꾸난거 하나에도 창피하고 부끄러운데. 보여주기 싫고,
그런데 있잖아.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렇게 사는 모습을 몇백만원짜리 카메라 메고 이쁘게 화장하고 신나서 자기들 사진 찍으러 오면 좋아하실까?"
후배는 시집도 가고 이쁜 아이도 낳고
항상 이쁜 사진들을 블로그에 올리며 사진 생활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나름 낚시글 죄송합니다.
판자촌을 예쁘게 찍는 법.은 없습니다.
판자촌은 예쁘게 찍을 수 없습니다.
아직도 가끔 조금 어두운 느낌의 사진을 찍고 싶을때는
예전 일들을 떠올립니다.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도움과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보도 사진이 아닌 이상(그러나 그것도 사실 잘 내키지는 않습니다)
어려운 삶을 살아가시는 분들을 찍지 않습니다.
사진에 많은 분들이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듯 해서
지난 제 이야기를 두서 없이 적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