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밥 먹기 전에 기도를 했었다.
나를 위해서 죽은 동물에게, 농부아저씨에게, 배달원에게, 점원에게, 그리고 그 모든 걸 가능하게 한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절대자에게 기도를 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이닌 것 같다.
어린 녀석이
함께 세상을 사는 사회 구성원을 기억하고 고마움을 표시했다는 것,
나를 위해 생명을 잃어버린 먹이사슬 최하단에 위치한 것들에게도 미안함을 가졌다는 점이 의미있다.
지금의 나는
내 돈주고 사는데 감사는 개뿔 이라는 생각으로
빠르고 열심히 내 식탐에 순응한다.
정글의 법칙을 보면서
자기가 창을 던지고, 어머 어떻게해를 외치는 재경을 보면서,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는 상상을 해봤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생명을 끝내버려야한다. 아무런 원한이 없이도 살생을 해야 한다.
내가 살기 위해서라는 간단한 이유다.
이 간단한 이유를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본인은 더 강하게 생명이 끊남을 경험한다.
지금 나는 종교생활을 하고 있지 않지만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린 시절처럼 절로 기도가 나왔을 것 같다.
'미안하다. 너 몫까지 열심히 살게'
절대자가 중요할까.
아닌 것 같다. 그런 마음을 전달해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아마 종교는 그렇게 생겼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사회 부속품으로 개인을 존재하게 한다.
직장에서 짤리면 앞이 깜깜해지고, 그래서 벌벌 떨며 피토할 때까지 일하는 것도
사회 구조상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기 때문이다.
몇 년전만 해도 사위를 먹이려고 닭 목을 비틀고, 털을 뽑아야만 했다.
이제는 모든 것을 돈이 해준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격언은 비단 연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한 생명은 생을 마감하고, 또다른 생명은 이제 삶을 시작하는
생사의 일들은 지금도 예전처럼 자주 일어나지만,
이제 일상에서 그런 삶과 죽음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오늘은 의도적으로 오랜만에 기도를 하고 싶다.
고맙고 미안하다.
더 열심히 살겠다.
죽어가는 모든 것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