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다시 돌아온 후, 우리는 평소처럼 잘 지냈다.
조금 달라진게 있다면 주말 새벽부터 나가 밤늦게까지 돈벌던 D가 주말에 집에 있다는것 정도.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유학준비는 착착 진행되어갔다.
내가 소개해 준 친구매형이 있는 유학원이랑 중국에서 회장님이 특별히 신경쓰래서 왔습니다.라는 재단쪽 담당자가 와서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D의 독일어학수준은 어지간한 대학들은 다 통과될 정도였고, 이미 어학시험도 다 봤더라.
너 진짜 왜 이 머리로 S대 안간거야? 싶을 정도.
나야 뭐 유학은 태어나서 단 한번도 생각해본적도 없는 사람이라 문외한이어서 대체 이것들이 나 앉혀놓고 뭐라는겨?싶었지만,
D는 그동안 자기가 알아본 거랑 비교해서 이제 어찌어찌 준비해야하는지 가닥을 잡아나가고 있었다.
진짜 머리 좋은 애는 틀림.
그렇게 꿈꿔왔던 유학. 하고 싶던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길에 그 쪽 대학에서 OK만 떨어지면 되었다.
지난 2년 가까이 아득바득 모아둔 돈은 이제 온전히 거기에서 생활비로 쓸 수 있게 되었다.
"회장님이 그 쪽으로 학교를 다니시게 되면..."
한국까지 오신 재단쪽 담당자가 알려준 조건에 D는 순간 휘청했고, 어? 애가 왜 이래?하고 얼른 안잡았음...
D는 그냥 쇼파에 주저앉았을테고, 나는 허리 다칠 일도 없었을텐데...
"또. 또. 또. 왜 자꾸 그래?"
"..."
"너 자꾸 나땜에 유학 망설이고 그러지마라. 남들은 못가서 난리더만."
"...오빠도 나랑 같이 가면 좋겠다."
"아서라. 아는 독일어라고는 바이에른뮌휀보르시아도르트문트함부르크프랑크푸르트바이엘레버쿠젠한자로스톡헤르타베를린브레멘아인쯔보밖에 없는 사람이여. 내가 예전에 돈모아서 유럽여행갔다가 딱 한 나라에서 말 안통해서 길바닥에서 오줌갈기고 아사할뻔한적 있는데, 거기가 독일이여. 맥주는 졸라 잘 파는데 안주를 달라니까 못 알아들어. 그래서 맥주만 쳐머시다가 화장실가고싶은데 말이 안통해서 그렇게 방광염과 굶주림으로 쪽팔려죽을뻔한 나라여. 독일무셔."
이 장황한 개소리를 하면, 웬만한 여자가 아니라 남자들도 뭐여이건?하는 표정들을 짓는데, D는 또 ㅋㅋㅋ하고 웃는다.
와...이런 말에도 웃을 정도면 진짜 나한테 호감있는거임.
그렇게 D랑 나는 황사먼지 풀풀 날리다가 말던 어느 봄...요즘 이 맘때쯤, 커피 하나씩 들고 시내 어디쯤을 싸돌아다니고 있었다.
회사끝나고 만나서 밥먹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 날은 황사가 잦아들어 걷기 괜찮은 날씨라, 그려. 내일 전철타고 출근하지 뭐.하고 둘이 그렇게 걷고 있었다.
"너 자꾸 유학 나 땜에 갈까말까 하지말고. 응?...어. 잠깐만 전화 좀...어. 왜 사람 데이트하는데 전화질을 하고...어...어...어? 어. 연락처 좀 찍어줘...D. 여기 잠깐만 있어."
"응. 괜찮으니까 천천히 전화 해."
"...어."
친구의 전화. 그리고 바로 다시 보내준 전화번호.
"아.네. 여보세요. 네. 사장님. 아.네. 안녕하세요. 네. 네...좀 전에요...네...그...빈소랑...네...아.네. 일단 출발할테니까, 빈소 확인되면 바로 찍어주세요. 네. 네..."
3분도 안 걸린 통화.
어느 건물 아래 벤치에서 D는 신발을 보며 발을 앞뒤로 흔들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와...이거...어떡하지...D 쟤 이제부터 막 울어야하는데...
"...팀장님...저 내일 휴가 바로 부탁드립니다."
"..."
"전화끝났어?...왜???...오빠 무슨 큰일 났어?"
"...너 전화기에 차단한 번호들 다 풀어...너네 친척들..."
"...오빠...그거 어떡게..."
"전화나 문자 보냈을거야...일단 가자."
"...왜..."
"너...할머니 돌아가셨대. 가자. 팀장님한테 나 내일 휴가낸다고 말했어."
"무...무슨 말이야..."
회사에서 사장님과 같은 임원들을 지근거리에서 뫼시거나 일을 좀 투명치 못하게 하려다보면, 이런 쪽으로 잘 알아봐주는 업계가 있다는걸 알게된다.
나는 물론 사장님과 원거리에 있고, 일을 투명하게 하는 사람이라 잘 모르니, 이런 쪽에 빠삭한 친구한테 부탁을 좀 했다.
사람 호기심이라는게 그렇더라. 하다못해 애가 왜 가족들과 연락을 끊고 이러고 사는지 너무 궁금해져서, 좀 알아봐달라고 나름 친구 쪽 단골업체에 문의했더니, 서비스로 알아봐주더라. 아우. 실장님 부탁인데 이 정도는 그냥 해드릴께요.
그 중에 믿을 가족은 어릴때부터 곁에서 최대한 D를 지켜주신 할머니 한 분 뿐인데요...에서 딱 끊고, 혹시 그 할머니 관련해서만 알려달라. 그 다음부터는 비용 지불할테니까.라니까, 내 친구가 부탁한게 있으니 저렴한 가격에 딜이 성사되었다.
"이거 다른 내용은 안보세요?"
"안봐요. 언젠간 지 입으로 말하겠지. 그냥 아무도 안보고 사려나 싶었거든요. 그래도 할머니라도 있다니 다행이네."
그리고 그 할머니 돌아가셨다고 한다.
미련하게 차는 왜 이렇게 멀리다가 댄거야.
나는 허둥지둥대며 D손을 잡고 주차장으로 인파를 헤치며 갔고, D는 울음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고 있었지만 그 새어나오는 소리는 더 이상 어떡하지 못했다.
그리고 차에 타자마자 할머니이이이이이이!!!!!!!하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마침 D의 고향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어서, 이따가 밤늦게 가면 검은색 정장 좀 빌려달라고 까똟을 남겼다.
왜??? 나보러 와???라고 답장 보내더니, 아...검은색...미안...주소 찍어줄께 이거 찾아와. 라고 탈룰라급 답장을 또 냉큼 보내왔다.
받지않을텐데...계속 '할머니' 번호로 전화를 건다.
"할머니...안돼...거짓말이지...안돼...왜 안받아...전화하잖아...할머니..."
D달래랴. 장대리한테 전화해서 내일 해야할것들 토스하랴...
"네.네.네. 무슨 일인진 모르겠는데 내일 걱정마시고요...근데 과장님? 아까부터 D 목소리 들리는것 같은데?"
"잘못 들었겄지. 내일 자리 비워서 미안하고. 내가 말한것들 좀 부탁할께요. 미안해. 신세지네 또."
"하루이틀도 아니고. 운전중이죠?"
"핸즈프리."
"어휴. 보나마나 고속도로면 내달리고 계시겠네. 안전운전해요."
"쌩유베리감사. 통화 끝."
진짜 어떡게 밟고 내려온지도 모르게 나는 톨게이트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곧 도착한다고 전화하자 친구는 아파트 입구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야. 누구 돌아가신건데?"
"...이거 왜 들고 나왔냐?"
"어?...빌려주래매?"
"나보고 여기서 갈아입으라고?"
"아차...야 그리고 니 차 옆자리에 헛것이 보이는데..."
"지금 그럴 농담할 상황아니니까 일단 들어가자. 얼른 나와야돼. 다음에 갚을께."
"술사줘."
"올라오면 연락해."
장례식장도 몇 개 없는 작은 동네였다.
이 중에 하나겠거니.하고 네비에서 제일 처음 나오는 장례식장찍고 가는데, 그 사장님한테 연락이 왔다. 그 밑에꺼더라. 젠장.
그런 자리가 그닥 좋은 자리도 아니다만, 그렇게 기분더러운 장례식은 처음이었다.
모든 D의 친척들이 어? 쟤가 어떡게 알고 왔어? 하는 분위기였다.
막 여기저기 알은체하려들길래, 실례지만 상주고 뭐고 그 앞에 딱 가로막고 섰다.
당신 뭐냐. 쟤랑 할 이야기 있으니 비켜라.라고 쪽수들 믿고 오다가, 아무리 봐도 내 상판이 그리 만만한 상판이 아닌지라 일단은 좀 물러서더라.
지난 몇년간 연락 한번 없던 애가 갑자기 나타났는데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그 날 기분이 정말 안좋았다.
무엇보다 할머니 영정을 부둥켜안고 D가 너무나 슬프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질이 안 좋았다.
그 와중에 용케도 넌 착하게 자라왔구나. 싶었다.
옷빌려준 친구가 나 혼자 심심할까봐 술상대해주러 어찌 알고 찾아왔다가, 그 분위기 보고 내 대신에 D를 지키고 서 주었다.
처음에 그 놈도 상태안좋았는데, 다음에 온놈은 그야말로 산너머산급으로 상태가 안 좋은 놈이라, 그 친척들이 땡깡조차 부리지 못했다.
그렇게 친구에게 잠시 D를 부탁하고, 애프터서비스 차 찾아온 그 쪽 업계 사장님과 장례식장 밖으로 나왔다.
"김과장님은 담배 안태우시죠?"
"...한대 주시겠어요?"
"암요. 자, 불...펴보신 분이시네요?"
"...저 애 다른 가족들 없어요?"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셨고, 할머니가 데려와 살았어요. 원래 큰집 작은집 이렇게 있었는데, 하도 못살게 구니까 할머니가 데리고 나와서 살았대요."
"...아..."
"모르셨어요?"
"안 물어봤어요."
사장님 표정이, 허허~이거...하는 표정이다.
"저 친구분만 혼자 저렇게 세워놔도 되겠능교?"
"...쟤 원래 가드하던 애라 괜찮아요. 저기 사람들 다 달라들어도 쟤 못이겨. 여차하면 내가 가서 앰뷸런스 부르면 되요. 여럿다친다고."
"아니면 내가 여기 아는 애들 좀 불러줄까예?...돈걱정은 마이소. 실장님이 많이 도와달라 그러니까예..."
"아유. 이 밤 중에 이 시골까지 봐주시러 와 주신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드려요...캐치하자마자 연락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입니더. 우리 쪽 일에서 이런건 일도 아니라예."
"XX이...아니. 최실장한테는 사장님덕분에 일 다 잘 처리했다고 꼭 말할께요. 이거 많이 바쁘실텐데 와주시고 케어도 해주시고 하니까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그런말씀마시고요. 무슨 일 생기면 내가 애들 몇 명 바로 이 쪽으로 보낼께 연락주이소. 보니까 견적나옵니더. 껄렁껄렁은 한데, 여기 동네 양아치들하고도 하나도 모르는 그런 집구석인것 같으니카네..."
그렇게 사장님 보내고, 장례식장으로 들어왔다.
"야. 가. 너 내일 출근해야지."
"휴가냈는데?"
"...아니 공사판 소장님이 휴가내버리면 내일 공구리는 누가 쳐?"
"현장에 공구리 다 쳤는데?"
"주둥아리를 확...그럼 좀 앉어."
친구는 앉고나서 그제야 내 옆에 반쯤 실신해서 겨우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댄 D를 유심히 보더니...아!!! 이 아가씨가 그???하고 눈빛을 보낸다.
그래서 뭐?
와...소문만 들었는데, 미인이시네...야...너 진짜 지옥가려나보다.
가서 니 자리도 하나 마련해놓을께 지금처럼만 살어. 이제 와서 천국가겠다고 착한 짓하고 그러지마. 사람이 안 하던 짓 하면 금방 간다는게 거짓말이 아냐. 지옥에서 염라대왕이 어? 이러면 이 쉐키 지옥안가고 천국가겠는데???하고 바로 데려가는거여. 넌 이미 늦었으니 그냥 지금 이대로 살어. 알았지?
뒤질래?
그래!!! 계속 그렇게 살란 말야.
지 일도 아닌데, 이 먼 동네까지 뜬금없이 와서 줘. 옷. 묻지마. 이유.라고 휙 가버린 친구놈 걱정되서 와준 정성이 고맙긴한데,
고맙단 말은 얼른 안나오고 같이 지옥이나 가자. 이러고 앉아있었다.
평소같음 내 이런 실없는 만담에 ㅋㅋㅋ거렸을 D가 반응이 없다.
아니. 내 옷에 스며든 눈물이 가슴팍까지 축축하게 적시는게 느껴질 정도로 소리죽여 울고 있었다.
야. 가서 이온음료같은거 가져와. 애 수분 다 빠져나간다.
오케이오케이.
그렇게 뜬 눈으로 지새고 팀장님 휴가 하루 더. 라고 통보하고 오고, 친구도 휴가를 내도 못 쉬어 쉬부럴.하고 현장에 잠깐 다녀온다고 나간 다음 날 점심즈음. 또 잠깐 시끌시끌한것이, 누군가 D만큼이나 친척들과 연락안하고 사는 사람이 왔나보다.
그 쪽도 역시나 할머니이이이이이!!!!하고 통곡을 했고, 빈소 앞은 또 시끌시끌했으며, 그 난리굿을 해치고 나와, 겨우 내 무릎베고 잠든 D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D...애 자요?"
"...아. 네. 아까 금방...어. 일어나네."
"...어..."
"D!!!!"
둘이 부퉁켜안고는 또 한참을 울었다.
할머니 다음으로 자기를 보살펴주던 사촌언니란다.
자기 엄마아빠한테도 왜 자꾸 D 못살게구냐고 막 그러다가 자기 부모님하고도 사실상 연끊고 사는 사촌언니란다.
"우리 D...보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예요."
"...D가 그렇게 여기 떠나고...할머니하고도 연락 다 끊어버려서...이해해요....이 애 어떡게든 여기 떠나려고 그랬었거든요."
없는 수분 다시 뽑아냈더니 애가 다시 기절하다시피 누워버려서 친구한테 야. 니 비밀번호.라고 연락해서 친구 집에 뉘어놓고, 그 사촌언니랑 남의 집 부엌에 앉았다.
"전혀 연락을 안하더라구요. 명절때 고향에도 안내려가고...그래서 그냥 애가 털어놓을때까지 둬보자.하고 묻지는 않았는데..."
"우리 D...여기까지 데려다주시고 같이 있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저도 일본에 있어서 이제야 온거라..."
그 사촌언니도 그러다가 감정이 복받쳐서 울면서 중국회장님. 그쪽업계 사장님이 다 알아봐줬겠지만, 굳이 내가 안보고 D가 알려주길 기다렸던 과거이야기들을 다 해주었다.
너무 친척들에게 시달려서 항상 풀이 죽어있는 D를...왜 이렇게 예쁜 동생을 엄마아빠작은아빠작은엄마랑 다른 사촌들이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되서 많이 싸웠고, 그렇게 풀이 죽어 있어 친구도 별로 없는 D가 10대 때 거의 유일하게 친구처럼 지낼 수 있었던 언니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들이...그리고 사촌들이 D한테 했던 일들을 들었을때...
진짜 내가 장소옮긴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어제 내가 부르려고 했던 앰뷸런스 다른 사람이 부를 뻔했다. 싶었다.
눈이 너무 따끔거려서 잠시 화장실 좀.하고 가서 거울을 봤더니 양 눈에 실핏줄이 터져있었다.
"야 아직 안갔...어이쿠. 손님이 또 와계시네."
부디 내 집처럼 편하게 있다가세요. 헤헤. 거리길래, 이 분 결혼하셨는데???라니까 급실망하더라.
"오늘은 D 거기 안보내고, 여기서 재울께요. 보시다시피 쟤 지금 너무 지쳐있어서 거기 보내면 안될것 같애요. 그리고 지금 제가 가면 큰일 하나 낼것 같으니까...내일이 발인이라니까 그때 따라갈께요. 이거 제 명함인데, 무슨 일 있으면 연락주세요. 야. 거기 멀뚱멀뚱 서서 뭐해. 모셔다 드려."
"어?"
"어는 뭔 어야. 안 움직여?"
"어? 어어. 그래그래. 가실까요?"
"야."
"왜?"
"올때 메로나."
"...넌 지금 그게 목구녕으로 넘어가냐?"
"그럼 콧구녕으로 먹을까. 올때 좀 사와. 속에 천불나서 그래."
"...카드 줘."
"달아놔. 서울오면 돼지고기 먹제도 소고기 사줄라니까."
"약속지켜라."
약속은 어기라고 있는거지.
오빠 나이가 이제 누구랑 연애해보고 결혼할 나이 아니라니까,
나 얼른 공부마치고 좋은 직장 잡으면 내가 오빠한테 바로 시집갈께.
그 약속 어겼거든.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