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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돌한 정치 신인 또는 딴따라 페미니스트 - 진선미 민주당 의원
게시물ID : sisa_41876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olidarite
추천 : 4
조회수 : 395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7/26 23:56:41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597298.html

민주당 진선미 국회의원


국정원 국정조사특위 위원직 사퇴 의사를 밝힌 7월17일 오후 진선미 의원을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났다. 진 의원은 인터뷰 내내 밝은 표정으로 자주 웃었지만, 국정원 사건의 물타기 시도에 대해선 “나라가 이렇게 돌아가선 안 된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분노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국정원 국정조사특위 사퇴는 
이 국면을 참을 수 없어서였다 
새누리당의 회의 불참을 
나와 김현 의원 탓으로 몰았다 
더 훌륭한 의원 모셔다 놓고 
매일 방청석에 앉아 있을 거다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나 
조신한 무수리로 살다가 
호주제 폐지 운동 뛰어들면서 
결혼 뒤에도 혼인신고는 안 해 
법 밖의 동거인들을 위해 
생활동반자등록법도 준비중

지난 7월17일 낮 12시. 추적거리는 빗줄기 사이로 국회의사당 벽면에 “65주년 제헌절 경축”을 알리는 대형 펼침막이 너풀거리고 있었다. 같은 시간, 전국 동시다발로 열린 1인시위의 참가자들은 “헌법 1조 어디 갔어?”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인증샷을 찍어 올렸다.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선출되지 않은 정보기관의 권력은 때로 헌법보다 강하다.

국가정보원의 정치개입 의혹을 조사하기 위해 구성된 국정조사특위는 2주째 파행과 공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새누리당은 민주당 진선미, 김현 의원이 국정조사특위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하루 전날인 16일 열린 국정조사특위 전체회의에 전원 불참했다. 제척 요구를 받아오던 두 의원이 사퇴했단 소식을, 제헌절 아침 진선미 의원을 만나러 가는 택시 안에서 들었다. “가장 큰 용맹은 옳고도 지는 것이며 새누리당이 떼쓰는 걸 사탕으로 달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말하는 진선미 의원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의 대변인으로 얼굴을 알린 진선미는, 지난 7개월간 국정원의 정치개입 의혹을 줄기차게 제기하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왔다. 46살의 비례대표 초선의원, 인권변호사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을 뿐, 과거 이력이 크게 드러나지 않은 진선미는 대체 어떤 인물일까. 결혼식만 올린 채 십여년이 되도록 혼인신고를 안 해 비혼 여성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국회 의원회관 502호. 복도 맨 끝 방이 그의 사무실이었다.

만지면 커짐

판단이 어려울 땐 ‘믿었던 사람들’을 본다

-어젯밤 잘 못 주무셨겠다. 사퇴를 앞두고 착잡했을 텐데.

“아니다. 백의종군이란 표현이 웃기지만 언제는 내가 특위 위원이어서 이 일을 했나. 더 훌륭한 의원들 모셔다 놓고 나도 매일 방청석 가서 앉아 있을 거다. 새누리당에선 (나와 김현이 빠져서) ‘투 마이너스’라고 생각할 테지만 특위 지원단장 맡은 나랑 대변인 맡은 김현 의원까지 (새로 투입되는 두 위원에 추가해) ‘투 플러스’로 되갚아 주겠다. 오히려 ‘메롱!’이다. 기대해도 좋다.”

-하룻밤 사이, 사퇴 불가에서 사퇴 결행으로 마음을 바꾼 이유가 뭔가? 민주당 지도부의 권고가 있었나?

“아니다. 내가 전격 결단을 한 것은 누구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이 국면이 참을 수 없어서다. 새누리당은 국정원 여직원 사건 현장에 5분간 들렀던 나를 감금죄로 고소했다. 이미 국정원 여직원이 대북심리정보국 소속임이 드러났고 거기서 댓글공작을 했다는 게 밝혀진 상태 아닌가. 음주운전 걸렸는데 문 잠그고 술 깰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와서 자길 감금했다고 경찰관을 고소하는 격이다. 이걸 조목조목 얘기하면 언론들도, 새누리당 지지자들도 수긍을 하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어제 새누리당의 회의 불참을, 언론들이 일제히 나와 김현 의원 문제로, 심지어 민주당 계파갈등으로 몰아가는 걸 보고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면이 전환되려면 나의 결단밖엔 없겠다 생각했다.”

-지난 7개월간 국정원 문제를 국정조사로 끌고 오기까지 일한 사람이 진선미, 김현 두 사람인데, 민주당은 뭐 했나. 너무 미온적인 것 아닌가?

“사실 내가 그렇게 일할 수 있었던 것도 민주당 소속이라 가능했던 거다. 민주당에서 여러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일을 했는데, 한두 건이라도 건진 게 나고 그게 언론에 대서특필되니 새로운 제보도 들어오고… 나만 일한 것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큰며느리가 죽어라 일해도 표 안 나고 막내며느리가 와서 용돈 드리면 효부라고 하는 격이다. 나는 민주당 의원이다. 민주당이 인기 있어야 나도 같이 산다.”

-개인적 소신과 조직적 결정 사이에 간극이 있을 때 조직의 결정을 순순히 수용하는 편인가?

“나는 사실 경험이 매우 일천한 사람이다. 시골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고 운 좋게 성적이 좋아 서울로 훌쩍 왔다. 대학 졸업하고 연애하며 십년간 고시공부하고, 정말 그 경험밖에 없어서 내가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 판단을 하는 데 충분한 기반이 있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나마 내가 변호사 시절부터 지금까지 중심을 잡고 올 수 있었던 건 ‘믿었던 사람들’ 덕분이다. 내가 바로 판단 못하는 게 있으면 그동안 내가 봐왔던 제일 믿음이 가는 사람의 선택에 손을 들어준다. 아주 흔쾌히.”

-믿을 만한 사람인지 어떻게 판단하나?

“그냥 필(feel)?(웃음). 설명하기 어려운데 변호사 생활을 통해 터득한 직관 같은 게 있다. 내가 일했던 덕수(법무법인)의 이석태, 김창국, 김형태 같은 선배 변호사들은 지극히 진지하고 이성적인 분들이었는데 한동안 나는 그게 콤플렉스였다. 나는 왜 이렇게 감정적일까, 덜 이성적일까 하고….”

어설픈 비혼, 그리고 두 번의 유산

열변을 토하며 민주당을 감싸고 억울함을 토로하던 국회의원 진선미가 “느슨하고 감성적인” 인간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1967년 전라북도 순창 출생. 4남1녀의 막내딸로 태어난 그에게 아버지는 미스코리아처럼 예쁘게 자라라는 뜻에서 진선미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중3 때 순창문화원장을 하던 부친이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탁구장과 독서실을 운영하며 5남매를 키웠다. 성균관대 법대 84학번으로 입학한 후, 그는 학생운동권과 담을 쌓고 살았다. 큰오빠(진봉헌 변호사)가 학생운동을 하다 제적을 당한 뒤 블랙리스트에 올라 사시 3차에서 낙방하고, 막내오빠마저 고려대 운동권으로 부모님 속을 썩이는 걸 지켜보면서 막내인 진선미는 “그런 데서 벗어나 있자”고 일찌감치 작정한 터였다.

-4남1녀 중 막내딸, 게다가 문화원장과 탁구장 집 딸이니 지역에선 선망의 대상이었겠다.

“밖에서 보는 것과 실상은 무척 다를 수 있다. 평양사범학교 다니다가 단신 월남한 아버지는 순창에서 인쇄업도 하고 예식장도 했지만 하는 족족 망했다. 순창문화원도 자비를 들여 설립한 거지 돈 버는 게 아니다. 5년 투병 끝에 암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가 탁구장을 했는데, 시골 탁구장이 뻔하지 그걸로 무슨 돈이 되었겠나. 더구나 어머니는 내가 오빠들 밑에서 행여 선머슴처럼 자랄까봐 나를 드세게 단속하셨다. 모든 것이 오빠들 우선이었고 난 오빠들의 조신한 ‘무수리’였다.”(웃음)

-대학생활은 어땠나? ‘운동권’이 아니라 ‘연애권’으로 지냈다고 말했던데?

“나한테는 남자친구가 완전히 새로운 우주였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오빠들은 멀고, 되게 외로웠는데, 여섯살 위 복학생인 남친은 내 눈엔 너무너무 똑똑한 천재였고 권위적인 오빠들하곤 전혀 다른 남자였다. 처음 보는 유형의 남자여서 볼수록 신기하고 궁금했다.”

-그 첫사랑과 14년을 연애하고 98년 결혼했다. 결별의 위기는 없었나?

“이렇게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건 그 사람이 내 변화를 아무 조건 없이 받아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는 내게 끊임없이 뭔가를 요구하는 사람이었다. 이거 해라, 저거 하지 마라…. 남친은 내가 엄마한테서도 받아보지 못한 ‘무한대의 전폭적 지지’를 베풀어준 유일한 사람이다. 18살에 처음 만난 후 지금까지 끊임없이 ‘넌 잘할 거다’ 격려를 해준다. 지금도 내가 거울 보면서 ‘주름도 많고 나이 들고 못생겼어’ 하면 ‘내가 볼 땐 열여덟살 때보다 이제 겨우 한살 더 먹어 열아홉 같은데’라고 말해준다.”(웃음)

-왜 혼인신고를 안 했나?

“98년 11월 사법연수원 마칠 무렵 결혼을 했는데, 서로가 한창 바쁠 때라 혼인신고를 못했다. 변호사가 되고 호주제 폐지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호주제 없애자면서 남편을 호주로 하는 혼인신고를 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호주제 폐지될 때까지 기다려볼까?’ 했더니 남친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고, 살다보니 익숙해져서 또 몇 년이 훌쩍 지났다. 난 굉장히 어설픈 비혼이다. 냉정하게 고민해서 결정한 게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셈이다.”

-자녀는 일부러 안 가진 건가?

“아니다. 말하자면 긴데… 유산을, 계류유산을 두번 겪었다. 두번째 유산 땐 정말 처참했다. 첫 유산의 아픔도 있고 해서 조심조심 지내다가 5개월이 돼서 아기 숨소리 듣자고 병원에 갔는데 애가 숨을 쉬지 않는다고 했다. 의사가 ‘산모를 위해 수술 말고 유도분만으로 태아를 꺼내자’고 하더라. 그게 얼마나 정신적으로 잔인한 일인 줄 그때는 몰랐다. 유도분만도 출산이라고 애들 낳는 분만실에 날 넣어 놨는데, 주변에선 아이 낳는 산모들 비명 소리가 들리고… 남들은 애 낳으려고 비명 지르는데 죽은 태아 낳으러 들어간 나는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 그러기를 몇 시간째. 그 상황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 결국 의사가 자궁을 건드렸다 피가 터지는 바람에 응급수술을 받게 됐다.”

그 일 이후 다시 임신할 생각을 접었다. 그 에너지로 사회활동을 더 열심히 하고 나이 들면 아이들을 위한 활동을 하며 살자고 ‘남친’과 약속했다.

-가사노동이나 시부모 봉양은 어떻게 하나? 일반 부부들과 다른 점이 있나?

“별로 다른 점 없다. 비혼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경계하는 게 많았던 것 같다. ‘이런 것(여성주의)을 주장하는 애들은 이쁘지도 않고, 부모한테도 못하고, 제 역할을 안 해…’ 하는 세간의 공격을 의식해서 오히려 전통적인 것에 더 매여 있는 편이다.”

진선미는 스스로를 덜 여문 ‘딴따라 페미니스트’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비주류적 삶의 방식을 택한 그는, 남들이 지나치기 쉬운 법과 제도의 허점에 누구보다 민감하다. 그가 요즘 준비중인 ‘생활동반자등록법’은, 가족이면서도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법 테두리 바깥의 동거인들에게 최소한의 법적 권리를 부여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변호사로서 인권문제와 여성, 가사사건을 두루 거친 그의 이력도 입법 활동에 많은 도움이 된다. 99년부터 변호사 일을 시작한 진선미는, 호주제 폐지를 필두로 트랜스젠더 하리수의 성명권 분쟁, 최진실 친권소송,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철거민 등을 위한 소송에 참여했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여성인권위원장으로 일했다. 그 공로로 2011년에는 여성신문사의 ‘미래를 이끌어 갈 여성지도자상’을 수상했다.

-학생운동에도 거리를 두고 연애에 푹 빠져 고시공부만 했던 사람이 어떤 계기로 인권변호사가 되고 정치인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내 삶이 바뀐 가장 큰 계기는 95년? 고시공부만 10년을 했다. 한번 떨어지고, 95년 다시 시험 봐서 1차에 붙고 2차를 앞둔 상황이었는데, 정말 딱 공부하기가 싫어졌다. 우울증이 왔던 것 같다.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는 것같이 갑갑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단전호흡을 소개해 줬는데 그걸 통해서 정신세계에 대해 새로 눈을 뜨게 되었다. 그때부터 고시는 뒷전으로 미뤄놓고 미친 듯이 티베트 불교와 인도 명상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수행에 집중했다. 내 20대가 너무 억울하고 허무했다. 내가 이 자격증을 따겠다고 이리 오래 공부를 했어야 했나. 보다 근원적인 인간 삶에 대한 공부를 하고 그 메시지를 전하는 게 더 가치 있는 일 아닐까. 그래서 고시공부를 접고 수도를 하러 떠날까 했는데, ‘운 나쁘게’ 2차에 덜컥 붙어버린 거다.”(웃음)

친노? 친문? 이용만 당했다?

이왕 힘들게 딴 자격증이니 좀 의미있게 써볼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게 됐고 생태와 여성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환경법학회와 환경연대에 관여하면서 조금씩 활동 폭을 넓혀갔다. 요즘도 매일 아침 혼자만의 수행시간을 갖는다. 늘 마음에 새기는 문구는 “불이”(不二), 겉으론 별개인 것 같지만 그 근간엔 모든 게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다. 다른 사람, 다른 생명체들과의 관계와 연대를 통해 자신도 발전한다는 깨달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정치인 중에 종교나 영적인 수련에 관심 가진 이들이 많지만 그걸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백담사 가서 절 많이 해도 달라지는 게 없지 않나. 아무리 마음을 닦는다 해도, 권력이나 지위에 초연해지기 어려운 직업 아닌가?

“그렇다. 정치라는 건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의 집결지다. 이해관계가 분명하고 시시비비가 격렬한 희로애락의 정점이다. 그런 것에 초연하게 삶의 일관성을 지키는 건 쉽지 않다. 의원 300명 중에 예전부터 정치해온 분, 한번 했다 못한 분, 계속 해보려는 분, 이제 시작한 분, 이 모든 사람들의 욕망이 가득한데, 자기 신념이나 욕구대로 구현되는 건 극히 적으니, 못 이룬 욕망으로 똘똘 뭉쳐 있을 수밖에 없다. 자기가 제안했는데 선택이 안 되고 밀리면 ‘무슨 보이지 않는 힘이 있지 않나, 계파가 있지 않나’ 의심도 한다.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게 되는 것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내가 문재인 후보 수행대변인으로 7개월을 같이 다녔는데, 누구는 나더러 친노라 하고 심지어 친문이라 하고, 또 누구는 나한테 넌 그 파도 아니면서 이용만 당했다고, 너만 모른 거라고 하고… 그게 다 실체는 없고 보고자 하는 대로 보이는 것뿐이다.”

-앞으로 정치인으로 계속 승부를 걸 생각인가? 지금 비례대표인데 지역구로 가는 것도 미리 고민해야 하지 않나?

“난 당장 이 시점에 필요한 일들만 하기에도 벅차다. 앞으로의 일이나 지역구 고민에 에너지를 쏟을 여력이 없다. 애초에 난 무얼 미리 계획해서 하는 사람이 아니다. 가사사건을 맡아보면, 완벽하게 자기 삶을 계획하고 주도하면서 산다고 믿었던 이들이 일시에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인생이 재편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사람들은 ‘멀리 봐라, 미래를 위해 뭘 해라’ 하는데, 사람의 앞날을 어찌 아나. 내 주변에 있는 소중한 사람, 내가 지금 이때 만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게 훨씬 값진 일이다.”

진선미는 공천심사 면접 때 “아주 좋은 정치는 한편의 예술이다. 나는 예인의 정치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에게 정치란, 정치공학적 계산과 설계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가슴 두근거리며 펼쳐가는 한 편의 드라마인 듯하다. 직관이 시키는 일에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뛰어드는 그의 아마추어리즘이, 노련한 프로선수들로 가득 찬 정치생태계에서 어떻게 버텨낼지, 혹은 그 생태계에 어떤 의미있는 파열구를 낼지, 아직은 미지수다. 진선미는 지금도 “만들어지는 중”이다.

-욕망의 도가니인 정치판에 들어온 게 그래도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나?

“절~~대 아니다. 내가 미쳤었나 보다.(웃음) 나한테 수행 가르치는 스승이 나를 혼냈다. ‘너더러 업을 떨쳐내라고 공부를 가르쳤더니 결국 네 업에 놀아나는구나.’ 다시 1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공천 신청 절대 안 할 거다. 알고는 못한다. 근데… 왜 다들 하시려고 하지?”

녹취·정리 윤형중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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