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교 2학년, 9살때 부모님이 이혼하셨다. 그리고 아빠와 어린동생과 나, 이렇게 세 가족이 살게 되었고, 이혼 후 집에 자주 오셔 우리를 돌봐주시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어느새 우리집 식구가 되어있었다.
어머니 아버지와, 어린 자식 둘. 아빠가 부양해야 할 사람은 넷이 되어있었다.
그렇지만 우리집은 굉장히 가난했다. 그렇지만 가난한 우리집 속에서 나와 내 동생은 참 풍족하게 살았다.
엄마가 없는 집안이었지만, 아빠는 절대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아니 오히려 더 당당하게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할머니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집이 가난하니 처신을 제대로 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살았지만, 그렇게 크게 와닿지 않았다.
이런 날들 속에서 아직도 충격적이고 가슴이 아린 사건이 있다.
중학교 1학년 정도였을까?
아빠는 이른 아침, 항상 내가 학교를 가기 전에 출근 준비를 다 하고 나가셨는데, 그날은 나가시기 전 내 방으로 들어오셨다. 인기척에 잠이 깨었지만, 비몽사몽한 상태였기에 나는 자는 척을 했다. 그런데 아빠는 내가 자는 것을 확인하시고는 내 용돈 주머니에서 돈을 집어 가셨는데, 확인을해보니 그 액수는 기껏해야 천원 이천원이었다.
남들은 아빠를 욕하고 나무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얼마나 궁하셨으면 매주 우리에게 맛있는 것을 먹이면서, 항상 좋은 것만 사주시면서, 그럼에도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한다고 자식들에게 항상 죄책감을 가지고 계시면서, 자는 딸 몰래 차비밖에 안되는 돈을 가져가셨을까. 그런 행동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아빠는 어떤 비참한 마음이었을까?
그날 이후 나는 더욱 철이 들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남들 다니는 학원을 '학원 필요없어~ 진짜야! 혼자 공부하는게 난 더 편해.'라 말하며 거부했고 고가였지만 비교적 흔했던 메이커- 나이키, 아디다스 등도 내겐 너무 부담되는 가격이었기에, '그 가격이면 다른거 몇 개를 더 사겠다~'라며 저렴한 것을 찾아 다녔고,
아빠가 최대한 나에 대해 죄책감을 갖지 않게, 미안함이 없고,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해 하지 않게, 부담없는 딸이 되고 싶은 마음에,
항상 갖고 싶은거나 먹고싶은 것 입고 싶은 것이 있어도 '에이! 그런걸 왜 사, 왜 입어, 왜 먹어! 돈아깝다! 난 이해가 안가~~!! 그런거 필요없어' 라며 스스로가 주문을 외듯 먼저 선을 그었다.
내게 유일한 장점이 하나 있다면, 정말 학교에서 공적인 학비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아빠에게 용돈이든 뭐든 돈을 달라고 한적이 없는 것.
그리고 좋은 장녀이자, 아빠가 항상 강조하던 좋은 누나가 되기 위해 동생을 온 마음 온 정성을 다해서 돌보았다.
이런 내 행동이 아빠가 조금은 편했을지 아니었을지는 모르겠다. 돌이켜 보면 못된짓만 하고 더 힘들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우리아빠가 조금이라도 힘들지 않게, 좋은 딸이 되고자 노력했었다.
그렇게 살아왔다. 엄마 없이 아빠와 사는 10년 동안, 풍족하진 않지만 우리 가족은 사이가 참 좋았고, 나도, 내 동생도 부족한 삶이지만 불만없는 삶을 살았다.
할머니가 나를 정신적으로 학대하는 것도 꾹 참았고, 때론 엄마 없는 서러움에 눈물을 쏟았지만, 아빠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할 때마다 강해져야 겠다고 다짐을했다.
중간에 아빠가 사기를 당해 모아두었던 돈을 다 날리기도 하고, 취업이나 사업에 관한 절망으로 아빠가 무너질 때도 있었지만, 우리 가족은 알콩달콩하게 잘 살고 있었다.
그렇게 10년. 아빠는 2009년 8월, 수능을 불과 3개월 남은 시점에서 간암으로 1개월 시한부를 받아왔다.
그런데 아빠가 돌아가신 것은 11월 13일, 수능 다음날. 병원에 누워있으면서 항상 걱정하던 것은 딸의 수능… 결국 아빠는 나를 위해 오랜 시간을 더 견뎌주었다.
아직도 기억한다. 돌아가신 그날 아침, 아빠가 병원에 입원한 이후로 단 하루도 빼지 않고 그날도 병원에 아빠를 보러 갔다. 자고 있던 아빠가 깨어나 나를 보면서 가장 먼저 했던 말 한 마디.
'와, 예쁘다. 천사가 강림한 것 같아.'
활짝 웃으며 이야기하던 그 말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전혀 예쁜데 없는 외모인데, 아빠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딸로 보였나보다.
그리고 그날 밤 돌아가시기 한 두시간 전부터, 의식이 없으면서도 아빠는 끊임 없이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는데, 나는 안다. 그것이 내 이름이라는 것을.
또… 아빠가 이제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의식없는 아빠에게 엉엉 울며 일어나라고 하자, 의사가, 할머니가, 그 누가 말을 걸어도 일어나지 않던 아빠가, 내 목소리에 눈동자에 초점을 찾으며, 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왜 울어. 울지마. 난 괜찮아, 괜찮아……' 힘겹게 마지막까지 내뱉은 말. 이게 아빠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럴 거면 날 이렇게나 사랑하지 말지. 전에도, 후에도 없을- 나라는 존재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준 사람. 이렇게 사랑해주고 날 놓고가면 어떡하라고.
언젠가 아빠에게 물었다. 아빤 꿈이뭐였어? 그러자 아빠는 봉사활동을 다니고 싶으셨다고 했다. 해외로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돕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나보고 간호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때 부터 꿈이 생겼다. 간호사는 아니었지만, 그때 부터 내 꿈은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 되었다. 빈말이 아니라, 지금도 내 꿈은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오만한 꿈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간절한 진심.
아빠가 나를 사랑했던 것처럼, 나를 위했던 것처럼 이 세상의 행복의 무게를 최대한 많이 늘리고 죽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유중 하나.
그래서 내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아빠, 이게 흔들리고 있어서 너무 힘들어. 나를 너무 힘들게 하는 사람들, 사건들이 많아. 오랜 기간앓고 있던 병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먹고, 약은 늘어만 가고 너무 아파. 더 힘든건 누군가를 미워하고싶지 않는데, 자꾸 미운사람이 늘어나. 내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면 어김없이 짓밟히는 경우도 많하. 절대 울지 않던 내가 요새 하루 걸러 하루 울게 되.
어떡하지? 내가 이 삶을 포기해서 아빠 곁에 갈 수 있다는 보장만 있으면, 그러하고 싶어.
이렇게 힘든 삶속에 아빠가 너무 보고싶고, 아빠가 제일먼저 떠오르는데, 아빠를 생각할 때마다 더 마음이 아파.
아빠가 없는지 2년이 되었지만, 난 지나가던 아빠 연배의 아저씨만 봐도 혹시 아빠가 저 속에 있지는 않을까, 영화같은 일이 일어나서 아빠가 살아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시선이 자꾸 옮겨져.
너무 보고싶어. 어떡하지. 나 너무 힘든데.
밝은 아침. 성 김, 밝을 희, 아침 단. 아빠가 떠난이후로 내 삶에 밝은 아침은 오질 않고 있어.
남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내 마음. 그런데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은 아빤데. 이제 나는 누가 행복하게 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