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나무' 인기에 편승해서 이 글을 씀^^
한글(훈민정음)이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후 많이 쓰이지 않았다고 일부는 말하시는데...실상은 다르다고 함.
마치 한글이 그 동안 배척당하고 조선후기나 일제강점기부터 널리 보급되었다고 하는 말은 다소 오해.
간단히 말해서, 한글은 왕부터 시작해서 사대부, 일반 백성들까지 널리 쓰임. 다만, 주요 공문서나 공식상에서 한문을 사용. 조선은 중국의 신하라 자청하는 당시 시대상으로는 당연한 현상.
그러나 겉으로는 한문을 사용하면서 한글을 언문이라 팽했지만, 실상은 사대부들조차 그런 한글을 이미 깨우치고 사용하는 현실, 즉 한글은 이미 창제된 후부터 전계층이 다 쓰는 글자라 생각하시면 됨.
다음과 같은 자료를 보면 더 쉽게 알 수 있음. 더 많은 자료는 인터넷에^^
(참고로, 이 글에서 맞춤법이 틀려도 욕하지 마세요^^ 제가 못 배운 놈이라 ㅋ)
1. 왕과 관리층의 교육에 필수적인 보조 자료인 언문 : 헌종 7년 10월 11일 상소문에 다음과 같은 언급이.
"원자가 현재 강독하고 있는 책을 다 마치면, 언해에 잘못된 곳이 꽤 있으니 지금 바로 잡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왕실이나 사대부들이 한문을 배울 때 언해서가 필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2. 국가 포고문을 한문과 언문으로 동시 발표 : 영조와 정조는 구휼(가난 구제)에 관한 윤음을 한문과 언문으로 옮겨서 동시에 발표했다. 비록 백성을 대상으로 실생활에 관한 내용을 적은 글이지만 한글은 한문과 거의 대등한 모습으로 조정의 발표에 쓰인 것이다.
3, 왕실 여성들의 제도적 언문 사용 : 조선 시대 훈민정음 보급의 일등 공로자는 왕실 여성들이다. 왕실의 여성들이 발행한 공식 문서는 언문으로 되어 있다. 수렴청정을 했던 대비나 대왕대비의 글 역시 언문으로 되어 있으니, 이것은 언문으로 된 문서가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같은 명작이 나올 수 있었다.
- 이상 네이버 오픈백과사전에서 -
4. 세종과 세조 시대에 과거 시험과목으로 채택될 만큼 위상이 높았던 언문은 그 후 유생들과 관리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 나간다. 이렇듯 언문이 성행하자 숙종대에 이르러 남구만 같은 학자가 언문의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그의 상소에 따르면 문과에 응시하는 유생들 중에 어려서부터 언문으로 글을 익혀 읽기 위주의 공부만 하다가 정작 과거에 오르면 한문 편지 한 장을 쓰지 못하는 유생들이 많다고 비판하고 있다. 언문 때문에 한문 실력이 낮아졌다고 상소할 만큼 언문이 유생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5. 이중 문자생활을 한 사대부 사대부 남자들이 공식적인 문자 생활에서 한문을 쓰고 비공식적인 문자생활로는 언문을 사용하는 이중 문자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그들은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한자와 언문을 선택적으로 사용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내용 중에는 사대부들의 언문 생활을 짐작하게 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의 첩의 죄과를 덮어주기 위하여 언문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건을 조작하려고 하다가 들통이 난 유인홍 사건<조선왕조실록 연산 2년(1496년) 윤 3월 14일>, 연산군의 기녀 모집에 선발되지 않도록 자신의 첩에게 꾸미지 말라는 당부의 언문 편지를 썼다가 발각이 되어 참형을 당한 한곤이라는 선비 사건<조선왕조실록 연산 11년(1505년) 5월 24일>이 있다. 그 외에도 사대부들이 관계된 사건의 중심부에는 남녀 사이에 오간 언문 편지가 단서가 된 경우들이 많다. 우리는 그 사건들에서 언문이 사대부의 삶에 얼마나 보편적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 '알기쉬운 역사교실', ezhistory.org -
6. 1613년 발행된 기초 한자교재인 <훈몽자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