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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그 여자 이야기(10).
게시물ID : love_408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철전열함
추천 : 22
조회수 : 1721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8/01/28 20:38:50
다음 날. 
울리는 알람 소리에, 망할 월요일이 되버렸어ㅠ.ㅠ라며, 꾸물대며 일어났다.

평소라면 혼자 사는 집이라 문 쾅쾅 열며 나갔지만, 자고 있을 D가 깰까봐, 조용히 나가서 물소리도 최대한 줄여가며 조용조용 씻었다...라고 생각했다.
한 15분 면도하고 샤워하면서 머리 대충 깜고 나오자, 부엌에 불은 켜져있고, 사실상 식료품 창고로 쓰고 있는 식탁에는 밥이 한상 차려져 있었다.

똑똑똑.
"D. 안자는거 안다. 나온나."
쑥스러운 표정으로 D가 나왔다.
"자라니까-_-;;;; 내 아침밥 잘 안먹어."
"반공기라도 드시고 가세요."
"...오늘만이다. 내일부턴 그러지마."
"네. 내일은 저도 아르바이트때문에..."
"그러니까 그 시간에 자라고-_-"
술먹고 난 다음에 먹는 콩나물국이 그렇게 시원한데, 맨 속에 먹는 콩나물국은 또 더욱 시원했다.
나도 자취 몇년 동안 스킬이 늘고 늘어, 전기밥솥으로도 밥 잘하는 편인데, 가마솥으로 밥 지은걸로 착각할 정도로 찰기 넘치는 밥이 완성되서 나왔다.
찹쌀 섞은 줄 알았다.

"음???"
사무실에서는 회사잠바를 입고 있기 때문에, 속에 와이셔츠는 거래처만날때나 다려입고 나가는데, 잘 다려진 와이셔츠가 방 옷걸이에 걸려있었고, 양말까지 침대에 놓여있었다.
이러면 내가 더 부담스러운데;;;;

아. 맞다.

자라는 잠은 안자고 D는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D."
"네?"
"이거 너 써."

살색영상(...)들을 제거한 내 예전 노트북.
"너 노트보니까, 레포트 거기다가 작업하고 있더라. 이거 나 안쓰는거니까 너 써. 다른건 다 지워도 되는데, 거기 내가 심시티 해놓은거 있어. 그것만 지우지말고, 너 써."

한쪽에는 검은색 다른 한쪽에는 빨간색 카드만 두고, 니가 고른 카드 다른 쪽에 넣고 섞으면 오빠가 찾아줄께...수리수리마하수리~요거?할때 보여주던 나이차 많이 나는 사촌동생들의 표정을 21살 여자애한테서 볼 줄은 몰랐다.
"이...이거...비싼거..."
"비쌋지. 살때는. 나 회사에서 지급받은거 있어서, 이거 안써. 너 써도 돼."
"고...고맙습니다..."
사실상 대학생들의 필수품이고, 1학년때야 어영부영 교양과목하느라 그렇다쳐도, 본격적으로 전공과목듣는 2학년부터 얼마나 필요한 컴퓨터인데...
D의 대학노트에는 레포트 초안이 잡혀있었고, 시간날때마다 학교전산실같은데서 레포트를 쓰고 있었을거다.
"고마울것 까지야. 잘 쓰다가 반납해줘. 언젠가 심시티 다시 시작할거니까."
"네. 정말 잘 쓸게요."
"열공해라. 어이쿠. 시간이. 난 간다."



"과장님."
"뭐?"
"집에 뭐 두고 오셨어요?"
"...정신머리??? 왜?"
"어째 오늘 주초부터 집중을 잘 못하시네욬"
"ㅎㅎㅎ. 너도 뭐 두고 온거 없냐?"
"뭐요?"
"개념. 탑재 안해오냐?"
"택배 올거 있어요? 몇번이나 핸드폰보시고 말이죠."
"택배 여기로 시키는데 무슨-_-"

남들 보기엔 그렇게 보였나보다.
그러면 안되는데, 꼰대아저씨처럼 D한테 무슨 연락 올까봐 전화오면 아씨...거래처...라며, 짜증이나 내는 내가, 몇번이나 핸드폰 들여다보고 있으니, 
수년째 내 부사수인 이대리보기에는 신기했나보다.




"김과장? 어디가?"
"법정근로시간이 지나서요. 가려구요."
"야. 월요일 아니냐. 월래대로 술빨러 가자."
"우리 팀장님이랑 가세요."
"마누라 생일이래. 벌써 튀었어."
"아. 형수 생일이네. 깜빡했다. 팀장님. 저도 오늘 일찍 가야되는데요;;;;"
"집에 어머님 오셨어?"
"...그런 셈이죠."
"오셨으면 오신거지, 그런 셈은 또 뭐야...하...누구랑...아!!! 박차장!!!"

평소같으면 자. 오늘의 도전자를 받겠습니다. 라는 표정으로 술상대를 찾던 내가, 평소보다 일찍 퇴근을 하려들자, 나의 주 술파트너 옆 팀의 송팀장님이 이 쉐킼ㅋㅋㅋㅋㅋ 나랑 술빨려고 벌써 준비중이었구나???하고 오셨다가, 퇴짜를 받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의 또 다른 주 술파트너 박차장님을 찾아간다. 
미안해요. 송팀장님. 

평소같음 집 근처에서 국밥말고 들어가거나 분식집에서 대충 떼우고 들어갔는데, 혹시나 하고 집으로 들어가니, 
역시나 아까 집에 왔다 아르바이트 갔는지,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 국에 반찬들이 식탁 위에 제대로 정렬되어 신문지로 덮혀있었다.
이거 참...안 먹을 수도 없고...

그거 먹고 회사일 몇 개 해놓고 까무룩 잠들었다가, 얼핏 잠결에 현관문 여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안 힘들어???"
"네. 전 괜찮아요."

월화수금토 저녁에 알바를 하는 D랑 모처럼 보게 된 목요일.
아. 왜 쉬는 날 밥을 하려고 그래??? 라면서, 내가 먹고 싶어서 그런다고 초밥집에 갔다...주방장이 올려주는데 말고 빙글빙글 도는데.

그 150중반 키에 날씬하다기보다 마른 편인 그 뱃 속에 참 잘도 들어가더라.
나도 어디가서 뭘 먹으면 먹방찍는 사람인데 나한테 전혀 밀리지를 않았다. 

D는 그런 애였다. 뭐 먹을거 사주면 진짜 아깝다는 생각 안 들 정도로 잘 먹어주었다. 그래서 더 사줬음.

물론 외식 한번 할때마다, 비싸다. 차라리 내가 밥을 하겠다. 오빠는 식비 좀 아껴야한다.며 온갖 잔소리를 해댔지만,
시러시러 단비는 외식할꼬야!!!하고 그러면 결국 얹혀사는 입장에 더 이상 밀어붙이지 못하고 따라나서곤 했다.

"레포트는 잘 돼?"
그 말에 D의 얼굴이 확 펴진다.
"???"
"우와. 진짜 최고예요. 노트북 진짜 감사해요. 정말 잘 쓰고 있어요."
"옛날꺼라 그리 안빠를텐데;;;;"
"아뇨아뇨. 진짜루. 인터넷도 금방 찾아보고 해서 정말 편해요."

아. 그냥 알바하지말고 그 시간에 공부해라. 라는 목구녕을 치고 다시 내려갔다.
나도 그래본적 없는 주제에 말할 자격이나 있나 싶고, D의 생활을 보건데, 집에서 한푼도 지원못받거나, 정말 벌새눈물만큼 지원받고 있을터였다.

원래는 밥만 먹고 집에 들어가서 재우려고 했지만, 모처럼 긴장이 풀려서 평소보다 말이 많아진 D를 보니, 더 놀다 들어가고 싶어졌다.
"밥먹고 놀러갈래?"
"네? 아뇨. 레포트써야되고 오빠 오늘 이것만 해도 돈 많이 들었어요. 이거 먹구 얼른 집에 가요."
"꾹 참으면 쾅!!!하고 터져."
"네?"
"너는 모르겠지만서도, 쌓이면 터진다구. 내일만 나가면 나도 쉬지만...아니...또 토요일에 출근할지도 모르지. 놀다 들어가자."
"저 내일 아침에 알바있어요."
"저도 내일 6시에 사장님 회의있어서 오늘보다 30분 일찍 나가야됩니다. 가시죠."

겨우 네.라는 답을 들었는데, 노는거라고는 술 당구 피씨방 밖에 모르는 나랑,
학비며 생활비를 버느라, 남들 놀때 바쁜 삶을 산 D나...뭐하고 놀아야 하나. 여기서 또 답이 안나왔다.
커피마시러가자니, 여기서 더 먹으면 넘어올것 같았다.

"아, 그래. 너 볼링 쳐봤어?"
도리도리.
"가자. 지금은 좀 움직여야 돼."

아마, 저녁시간 볼링장 게임비를 알면 죽어도 안 갈 애였지만, 다행히 D는 그날 볼링장을 처음 가보는거였다.

"여자신발 230이랑, 남지신발 270이요."
"아...신발도 빌려주는구나..."
그 말에 또 가슴이 아련해진다.
"가자. 공 고르러."

나도 볼링은 잘 치는 편은 아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친구들한테서 볼링열풍이 불었을때 게임비 안낼라고 이를 악물고 치다보니 150은 왔다갔다하게 치는 편이었다. 

"나도 진짜 야매로 배운건데...이것만 기억해둬."
마치 처음 영점사격쏘러 사선에 배깔고 누워 조교 설명을 듣는 듯한 훈련병의 눈빛을 하고 있는 D. 너무 귀여웠다.
"이걸 던진다고 생각하지말고...여기서 저기 1번핀까지 100까지라고 할때, 한 110정도 갈 정도로 '굴린다'라는 느낌으로 볼을 바닥에 놓고 밀어.
너가 야구를 좀 알아서 너클볼을 던진다거나, 군대에서 수류탄을 던지지 않고 민다는 느낌으로 투척하거든...
나는 딱 그런 느낌으로 던지지 않고 굴리거나 민다는 느낌으로 볼링치거든."
"던지지 말고...굴리거나 밀라구요?"
"그렇지. 일단 내가 하는거 잘 봐..."

원래는 좌측 끝에서 출발해서 스핀먹여서 던지는데, 초보자에게 알려줘야 하니, 가운데에서 살짝 우측으로 서서 1번핀 스치고 3,4번핀 뚫고나가는 느낌으로 공을 밀었다. 
이거 최소한 8개는 그냥 넘어감.

"엌ㅋㅋㅋㅋㅋㅋ"
초장부터 스트라이크. 

"우와아아아아아."
"봤지? 이런 식으로 어찌됐든 1번핀 옆을...정면으로 치면 좌우가 남아버려서 스페어처리가 힘드니까, 가급적 1번핀 옆구리를 치고 지나가는 방향으로 공을 굴리면 돼."
"네!!!"

D의 사상 첫 투구는 역시나 거터.

저번 토요일. 그 맥날에서 보여줬던 부루퉁한 표정이 다시 나왔다. 

"ㅋㅋㅋㅋㅋ."
탁탁탁 소리를 내며 걸어오더니, 내 팔뚝을 찰싹 치고 다시 나온 볼을 들고 레인 앞에 섰다. 
그때 정말 기분이 좋았다. 이 아이가, 이제 나한테서 긴장을 많이 풀었구나. 

"어어어어?"
다음은 공이 흐리멍텅하게 구르는것 같은데도 용케 스페어처리를 해내었다.
"꺄아아아아~봤어요??? 봤어요???"
'어...어...저게 넘어가네?"
꺄악꺄악. 원래대로면 뭔데 이래 시끄러운데???하고 다들 째려볼테지만, 
쪼끄만 애가, 너무 신나서 폴짝폴짝 뛰는걸 보더니, 동호회 아저씨들고 아빠미소를 하고 있었다. 
아님, 그 옆에 파트너쉬키 인상이 너무 더러워서 표정관리들을 하셨거나.

나는 평소대로 150 왔다갔다하게 쳤고, D는 합해서 100점도 안나왔다. 그래도 애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될 정도로 너무 즐거워했다.

"가자. 이제...아. D야. 오빠 차키랑 핸드폰 두고왔다. 좀 가지고 와."
"네."
D가 내 차키랑 핸드폰 두고 간 사이에 얼른 계산을 했다. 

저녁시간대 볼링비 알면 다시는 안올려고 할 것 같아서, 깜빡한 척 핸드폰이랑 차키 두고 온거였다.



집까지 슬슬 걸어오는데, 볼링이 너무 즐거웠는지 D는 평소 이상으로 재잘재잘 말이 많았다.
몇번인가 게임비이야기를 꺼냈지만, 나는 능구렁이처럼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D는 그게 참 좋았다. 별것 아닌거에도 정말 즐거워한다는거.
한창 이것저것 해봐야 할 나이에 안해본게 많아서, 정말 뭐든지 즐거워했다.
친구들이나 회사사람들이랑 술마시거나 할때 아니면 혼자 있는게 좋고, 말많은 사람은 질색인 나조차도 D의 그 즐거운 재잘거림은 너무나 좋았다. 



훗날, 우리의 첫 데이트.라고 D가 정의한 이 날. 우리는 너무 즐거웠다.

마침 집에 가서 틀었던 스포츠채널에서 볼링이 나와서 우리는 마트에서 산 맥주 한캔을 나눠마시며, 스핀 오오...폼 장난아닌데??? 저 옷 색깔 너무 언발란스햌ㅋㅋㅋㅋ라며 신나게 떠들다가 각자 내일 일정이 있어서 잘자.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랬다. 처음 사귄 남자친구가 나였고, 어지간한건 나랑 하는게 처음이던 10년 가까이 사귀고 헤어진지 2년이 넘었던 그 여자를...
잊을래야 내 20대 전부여서 잊지못하던 그 여자를...나도 모르게 D를 통해서 다시 떠올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랬다. D와 나는 그냥 신세지는 오빠, 도움 좀 주는 나이차많이 나는 동생. 딱 이 사이가 좋았다. 

내가 D와 그 여자를 겹쳐보면 안되는거였다.
출처 내 가슴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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