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시,
종로 사거리 옆 공원에 찬바람 덕분인지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다.
손목시계를 쳐다본다. 초침은 틱틱 거리면서 왔던 자리를 돌고 또 도는 중인데,
분침이랑 만났다가, 시침이랑 만났다가... 요란하다.
맑은 콧물이 수줍게 고개를 내비치려나 보다. 오른 손등으로 코를 훔쳤다.
손등에 맑은 콧물 대신 빨간 케찹이 흥건하다. 어지럽다. 세상이 돈다.
빨간 케찹을 보니까 어렸을 적 길에서 사먹던 500원짜리 핫도그가 생각난다.
항상 흐르는 케첩 때문에 손이 끈적끈적했는데.... 눈이 한 번 더 떠진다.
핫도그 생각을 하고 나니 하얗던 하늘이 하얀 천장으로 바뀌어 있고 몸이 추워졌다.
핫도그 때문인가? 불현 듯 왼 팔뚝이 아려오고 오른 쪽 머리가 띵하다.
옆으로 돌아누우며 설탕이 가득 묻은 달콤한 핫도그의 냄새를 떠올려 보았다. 초등학교 때였나? 그래.. 초등학교 때였구나.
열두 살, 그 때는 집에 가는 차비로 군것질을 하고 대신 집에 걸어오기가 일쑤였다.
갖은 불량식품들, 몸에 안 좋다는 걸 알았지만 입에 넣을 때만큼은 그게 그렇지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길바닥에 얼음이 얼어붙은 날이라 덜덜 떨며 오늘은 버스를 타고 집에 가야겠구나 마음을 굳히고 나서 책가방을 둘러메고
오른 쪽 다리에 걸리적거리는 실내화 가방을 리듬에 맞춰 걷어차면서 주머니에 동전을 짤랑거리며
흥겨운 하교를 하는데...
갑자기 향기로운 핫도그의 냄새가 내 속에 고이 숨겨져 있던 지름신의 램프를 비비고 말았다.
나는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이 부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설탕이 잔뜩 발려진 핫도그에
멋지게 Z자로 케찹을 바른 핫도그를 깨물고 있었다.
아... 물론 손과 입은 명령 불복종 상태로 욕심을 채우고 있었지만 이성과 논리로 점철된 좌뇌에서는
얼어 뒤질지도 모르겠다는 절망적인 수치분석만을 열심히 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걷다가 얼어 뒤지겠구나... 그래도 아직 핫도그가 반이나 남았다.
괜찮아.. 괜찮아.. 하는데
갑자기 쿵! 소리와 함께 하늘이 하얘지면서 세상이 돌았다.
내 핫도그에는 설탕 양념에 영양만점인 흙이 잘 드레싱 되어 있었고,
사태를 파악해보려는 노력을 시작하기도 전인데
옆에 웬 여자아이가 넘어져 있었다.
동갑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였는데 피부가 희고 눈썹이 긴... 그러니까 평소에 구경을 잘 못해본
신기한 생물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나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괜찮지 않으면 정말 쪽이 팔리기 때문에 벌떡 일어났는데,
추운 겨울이라 그런지 맑은 콧물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려고 하는 것이었다.
반사적으로 스윽 닦았는데 냄새가 비린 것이 그만 손등이 새빨갛다.
눈이 휘둥그래진 여자아이는 내 손을 붙잡고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피차 초딩인데 꽤 침착한 것이 여자들이란 원래 이런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고는 있었지만
초딩의 몸으로 이런 불상사를 울고 지나치기에 심신이 너무 여린 것이 흠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정말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 여자아이는 나보다 한 살 어렸지만 내가 운 걸 봐서인지 이후 동네에서 지나칠 때 마다 나에게 반말을 했다.
그 뒤에 나는 남자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별로 만날 일이 없었다.
반쯤 먹은 핫도그를 볼 때 가끔 생각나기는 했지만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던 찰나에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슬프지만 여기는 남고였다. 운동도 별로고 공부도 별로인 나에게는 여간 재미없는 일이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학교 가고, 밤이 찾아오면 집에 온다. 등교, 하교, 등교, 하교 지겨운 나날의 연속이다.
고등학생이 되자 용돈이 좀 늘어서 이제는 핫도그 사먹고 버스도 탈 수 있게 되었다.
친구들이랑 인사하고 핫도그 가게를 들렀다. 룰루랄라.. 핫도그를 사들고 버스를 타러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데
슬프게 흐느끼는 소리가 오른쪽 귓전을 때려왔다.
골목 안쪽일까... 붉은 색 벽돌로 좁게 만든 골목 안쪽에서 검은 생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울고 있었다.
말을 걸어볼까, 그냥 갈까.. 고민고민하다가 말이나 시켜보자 하고 2m쯤 다가갔다.
‘저기...’
그 여자아이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는데 나도 모르게 놀라서
‘너.. 핫도그?’
라고 외치고 말았는데 그만 핫도그가
‘으앙!!!!!!!’
하면서 울어버렸다. 안절부절 못하고 나는 그 옆에서 어찌 할 줄을 몰라 왔다 갔다 하다가 옆에 앉았는데..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건
‘울지마...’
라는 말 밖에 없었다.
갑자기 샴푸 냄새가 났다,
엘라스틴인가? 아냐, 엘라스틴보다는 향이 진해, 케라시스인가? 아냐 그것보다는 좀 더 달콤한데?
근데 왼쪽 뺨이 간지러웠고 왼쪽 어깨가 들썩였다.
아주 부드러운 곰 인형이 기댄 느낌이다. 핫도그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 내리고 있었고,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나는 핫도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렇게 십 분이 지났을까...
진정된 듯한 핫도그는 일어서서 고개를 돌리고 나를 등진채 세 번째 집 철문을 닫고 들어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핫도그의 아버지께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것이었다.
‘준호야! 편지왔데이~ 니 연애하노?’
엄마가 아침부터 나를 불러 깨웠다. 편지라면 올 곳이 없는데?
연한 분홍색의 편지 수신인에 주소는 안 적혀 있었지만 분명 내 이름 세 글자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오....마이 갓.... 지저스... 내 인생이 드디어 피는 것일까?
편지봉투도 소중히 간직하고 싶어졌다.
칼로 조심스럽게 풀로 붙인 부분을 분리해서 봉투를 열었는데 엄마가 편지지를 빼앗아서 읽으려고 하셨다.
아..엄마 이러지 말아요! 엄마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그때는 정말 고마웠어요, 첫눈 오는 날 우리은행 옆 사거리에서 만나요.’
엄마가 갑자기 푸핫! 하시면서 배를 잡고 웃는다.
‘니 ㅋㅋㅋㅋ 가시나 꼬싯나? ㅋㅋㅋ’
엄마 놀리지 말아요... 문득 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시발 대구에는 눈이 잘 안 온다!!!!
핫도그의 집 근처를 지나가다 문득 보고 싶어졌다.
작년에도 제 작년에도 눈이 안 왔기 때문에 핫도그의 그림자도 구경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빨간 벽돌이 있는 좁은 골목, 세 번째 철문이 달린 집 대신에 아파트가 서 있었다. 으..응?
옆집아저씨 말로는 작년에 공사를 하느라 원래 살던 사람들이 다 이사 갔고,
핫도그네 가족은 멀리 서울로 떠났을 거라고 했다.
갑자기 온 몸에 힘이 다 빠졌다. 땅만 보고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핫도그에 대한 기억은 이제 희미하다. 나는 고3이니까 그런 곳에 정신을 쏟을 여력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꼭 까만 눈동자에 흰 얼굴, 품 안에 쏙 안기던 곰인형,
샴푸 냄새 나던 그 곰인형을 이제 찾을 방법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아닐 거다.
나는 대학에 합격해서 서울 촌놈이 되었다.
사투리를 고치는 것은 정말 어렵다.
‘밥 먹었니?’ ‘밥→먹↗었↘니↗?’
서울말은 끝을 올려야 한다던데... 모르겠다. 1학년이 끝날 무렵에 친한 친구와 종로 사거리에서 약속을 잡았다.
날이 추운데 기말 레포트 때문에 2일을 밤을 새면서 붕붕드링크 하이포션으로 버틴 게 좀 찝찝했지만 내가 누구인가?
20대 초반 강철체력! 하하! 날이 춥다 춥다 드디어 눈이 내린다.
첫 눈이다. 대구에서는 흔히 볼 수 없었던 눈이다. 여섯 시 약속인데 친구놈이 나타나질 않는다.
귀가 떨어져 나갈 듯 바람이 쌩쌩 분다. 시계 초침이 야단이다. 문득 흰 천장과 병원 소독약 냄새, 팔이 아린다.
옆으로 돌아누웠는데 세상에나. 웬 여자가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다, 그런데.
엘라스틴 보다는 향이 진하고 케라시스보다는 달콤한
샴푸 냄새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