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올해 첫눈이라서 그랬을까. 손을 호호 불며, 발을 동동 구르며 그녀는 서 있었다. 단순히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이 좁은 버스 정류장에서 그녀와 있는 단 몇 분이 정말 행복하다고 느꼈다.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약 1개월 전. 눈이 아직 내리기전인 11월이었다.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 출근준비를 한 나는 천천히 그리고 여유롭게 집을 나섰다.
신이 그런 나를 기특하게 여긴 걸까?
그때 그녀를 보았다. 긴 흑발의 윤기 있는 머릿결을 가진 그녀를. 이후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빠져든 것처럼
매료된 것처럼
마치 조종당하듯 그녀를 의식하게 되었다.
매일 집을 나서면서도 생각했다.
'오늘도 있을까?'
집을 나서는 그 시점부터 괜스레 가슴이 뛰고 이런 마음이 주변에 들킬까 부끄러워 눈치를 보았다. 일부러 일찍 나가 기다린 적도 있었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회사에 나가지 않는 주말이 너무나도 심심했다.
나 같은 것 따윈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그녀에게 빠지고 말았다고 통감했다. 이게 사랑이라는 건가, 무심하게 바라보던 세상이 조금은 밝게 보이기 시작했다.
- '바보 같지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 '소심 하지만'
'먼저 말을 걸어 친해지고 싶다.'
그녀와의 핑크빛 생활도 상상해버렸다. 창피하고, 기분이 좋다.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을까 하는 괜한 생각을 하며 혹시나 비가 올지 모르니 가방에 우산을, 혹시나 뭐가 묻을지도 모르니 바지 주머니에 손수건을.
나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있기에 '나답지 않은 나'또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눈을 맞으며 서 있었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가질 무렵 회사로 가는 버스가 옴으로써 그 시간도 깨졌다. 아쉽지만 내일을 기약하며 버스에 올랐다.
***
눈을 맞으며 나는 서 있다. 올해의 첫눈이라서 그랬을까. 귀가 깡깡 얼 정도로, 칼바람이 불며 눈이 내렸지만 나는 그저 멍하니 서 있다.
이맘때가 되면 그녀가 떠오른다.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혹시 나라는 사람을 기억하고 있을까.
만약 그 때 내가 말을 걸어 주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그 때 내가 가지고 있던 우산으로 눈을 맞지 않게 해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 '바보 같지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 '소심 하지만'
'먼저 말을 걸어 친해지고 싶었는데.'
이제는 아물 법도 한 이 작은 흉터는, 이맘때가 되서야 되살아나 나를 괴롭게 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즈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눈이 멈춰있었다.
그래, 끝난 거다. 올해의 첫눈이. 나와 그녀의 작은 추억이.
괜히 뭉클해진 마음을 다잡고 나는 버스에 올라 출근길에 오른다. 그리곤 휑한 버스에서 맨 뒷좌석에 앉은 나는 멍하니 창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눈을 맞지 않은, 깔끔한 모습의 그녀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