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혜화역 4번 출구를 빠져 나와 꽤 시간이 흘렀지만 J는 좀처럼 그 자리를 꼼짝 않고 지키고 있다.
나는 저만치 뒤에서 J의 시선이 향하는 어딘가를 쫓고 있다. 아마도 지금 내리는 이 눈이 올 겨울 내리는 첫 눈 이기에
잠시 아련한 상념에 빠져있을 거라 지레 짐작해 본다.
나는 지금 J를 미행하고 있다다. 대체 어떤 생각으로 J의 뒤를 밟고 있는건지 나 조차도 도통 설명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약 반 시간 전 7년 만에 J를 지하철 객실안에서 발견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사실이다. 순간 나는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무진 애를 써야만 했고 환승을 하려던 충무로역을 지나친 것도 까맣게 잊은채 줄곧 이 곳까지 J를 쫓아온 것이다.
한 때 J를 위해 세상을 살아간다는 사실이 더 없는 행복이라고 여긴 적이 있었다. J는 유리알같이 맑고 깨끗한 눈을 가졌고
그런 J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첨탑위에 얹혀진 십자가 처럼 성스러웠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아름답고 완벽한 사랑을 주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아름다운 과거형에는 서글픈 현재가 내포되어 있기 마련이다. 의미없이 초라하게 퇴색한 오늘을 버텨내기
위해서라도 추억은 아름다워야 하고 설사 그렇지 못 하다 한들 추억을 얼마든지 조작하고 재생산 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 마주하게 된 뜻밖의 재회는 추억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나에게 꽤나 잔흑한 시련이었다.
무심한 눈빛으로 어두운 지하철 창밖만을 바라보던 J의 무감동한얼굴이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며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던 길일까? 아직 혼자 일까? 아무 당위성도 없이 옹색하기 그지없는 물음들이 내 머리속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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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볼품 없이 흩날리던 잔눈깨비가 마침내 멈추었다. 초겨울 오후의 한산한 거리는 조금은 쓸쓸한 풍경이다.
4시를 조금 넘긴 시각. J는 마침내 그 자리를 벗어나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쇼윈도에 진열된 상품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온 문자메세지에 답장을 보내기도 하면서 전혀 바쁠 것없다는 듯 아주 천천히.
J는 검은색 바지에 부츠를 신고 연녹색의 캐시미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J의 머리를 뒤에서 고정해주는 보라색 헤어핀이
왠지 불안해 보인다. J를 따라 나 역시 천천히 걸음을 떼어보지만 이렇듯 느린 걸음을 쫓아 가려니 얼마 못가서 들키게 될까
잔뜩 긴장 할 수 밖에 없었다. 몸을 구부리고 보폭을 조절하느라 나도 모르게 어정쩡한 걸음걸이가 되고야 만다.
손바닥에서는 땀이 계속해서 베어 나온다.
대체 나 정말 뭐 하는 거야?
아직 외부 미팅 일정 한 건이 더 남아있고 게다가 회사에 복귀해서 오늘까지 해치워야 할 보고서도 있다. 더는 이럴 시간이없다고
내 이성이 나를 몰아세운다. 그러나 생각과 다르게 내 눈은 주의 깊게 J의 뒷 모습을 살피며 그녀의 걸음을 쫓는 행위를 멈추지 못 한다.
J는 마로니에 공원을 지나 대학로 소극장들이 밀집되어 있는 골목으로 향했다. 손에는 방금 커피전문점에서 사온 커피가 들려 있다.
오래 전 J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J는 나에게 커피를 싫어한다고 밝혔다. 설탕조차 없다면 쓰디 쓴 액체일 뿐인데 사람들이 즐겨찾는
사실을 의아해 했다. 그런 그녀도 내가 마시던 커피를 한 두 모금 씩 뺏어 마시던걸 시작으로 결국엔 커피를 입에 달고 살게 되었다.
만약 그 옛날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과연 지금 J의 손에 커피가 들려있을까. 문득 궁굼해 지는 순간이다.
J가 도착한 곳은 연극만을 공연하는 작은 소극장이었다. J는 전화기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곤 곧바로 소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평일 낮에 혼자 연극을 보러 온다? J가 언제부터 연극을 좋아했는지 혹은 소극장에 아는 지인이 있는건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사실은 J와 나는 단 한번도 함께 연극을 보러 온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잠시 망설이며 몇 분의 시간을 흘려 보내고 결국 J를 따라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입구에서 안내를 하고 있는 여성이 내게
공연이 5분 후에 시작된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티켓을 구입한 후 조심스레 객석출입문으로 다가선다. 대략 50 석 규모의
소극장이라 그런지 불과 서른 명 정도의 관객이 들어찼을 뿐인데 꽤나 빼곡해 보인다. 나는 무대 앞 두 번째 줄 가장 자리에 혼자
앉아 있는 J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객석 맨 뒷 줄에 자리를 잡고 전화기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오후 5시.
회사로 부터 나를 찾는 부재중 전화와 문자 메세지가 잔뜩 와 있는걸 확인하곤 전화기 전원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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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겨울”라는 이 연극은 2시간 동안 이어졌다. 여주인공을 중심으로 그녀의 애인과 가족, 친구가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며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코믹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그린 이야기다. 나는 시종일관 J가 있는 곳과 무대를 번갈아 바라보며 관객들이
웃을 때 그녀도 따라 웃는지를 살핀다. 그러나 무표정하게 무대만 바라보는 건지 혹 내가 알아채기 어려울 만큼의 엷은 미소만
띄고 있는 건지 좀처럼 판단하기 힘들다.
연극 후반 객석 전체가 눈물바다가 되버렸을 때는 J 역시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뚜렷이 알 수 있었다. J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에서 나는 과거의 어떤 장면을 오버랩시키지 않을 수 없었고 이윽고 그녀를 향한 까닭모를 연민이 피어났다.
그 언젠가 이별의 순간 나는 왜 그렇게 J의 눈물을 냉정하게만 대했을까. 조금의 배려도 없던 나를 무던히도 원망했을테지.
연극을 마치고 배우들이 무대인사를 할 때쯤 나는 슬그머니 소극장을 빠져 나왔다. 그리곤 오후에 J를 따라 왔던 길을 되짚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하지만 두 다리를 움직여 걸음을 내딛는 일조차 무척 힘이 들었고 혼란한 마음을 다스리기가 여간해서 쉽지 않았다.
혜화역 4번 출구에 도착한 나는 오후에 J가 눈을 맞으며 서있던 바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본다. J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무어라 형용 할 수 없는 복잡하고 불편한 감정들 사이로 문득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 한것이 후회가 되었다.
J를 다시 찾아볼까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 먹는다.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오후의 그것과는 다르게 조금은 굵은 눈발이다. 갑자기 내리는 눈 때문에 사람들의 걸음이 빨라진다.
한 층 더 분주해진 퇴근길. 일단 회사로 돌아가야 겠지.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오려 하는 중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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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였다. 누군가 내 왼쪽 팔꿈치를 톡하고 건드린다.
“미행...... 더는 안 할 건가요?”
J였다.
그녀가 내게 한 말이 좀처럼 현실감있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단어의 의미와 문맥을 정리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J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알고 있었구나. 미안해.”
나는 겨우 힘겹게 입에 공기를 불어넣는다.
“전혀요. 나도 방금 오빠 미행 해봤는데... 꽤 재미있던 걸요.”
장난기가 섞인 J의 말을 알아먹는데 또 한참 시간이 걸린다. 아직도 J의 목소리가 왠지 아득하게만 들린다.
“일단 저녁먹으로 가요. 나 배고파.”
내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았다는 듯 또 다시 J의 말이 이어진다.
“......”
그 사이 더욱 굵어진 눈발은 오늘 밤 폭설로 변할 조짐을 보였다. 거리에 사람들은 갑자기 굵어진 함박눈을 피하려 지하철 역사안으로
급하게 움직인다. J와 나의 머리 위에도 어느새 굵은 함박눈이 조금씩 쌓이고 있다.
“눈사람 같애 .”
피식 웃으며 던진 J의 말이 조금 전 보다 약간은 더 또렷하게 들린다.
나와 J는 분주한 인파들 한가운데 한동안 말없이 마주보며 눈을 맞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