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잿빛 공기 너머 희미하게 보이는 산 말고는 주위에 아무 것도 없었다. 발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쌓인 눈에 발목이 묻혔다. 부는 바람에 옷자락이 눈 위를 스쳤다. 젖다 못해 아예 얼어버린 것일까, 옷깃은 팔락인다기보다는 흔들거렸다. 헐렁한 소맷자락에서 뻗은 손목이 가냘팠다. 머리카락 사이로 비치는 콧날이 외로워보였다.
눈발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옷을 여몄다.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날숨이 바람을 따라 코끝을 잠시 데우고 사라졌다. 남자는 눈이 스친 볼을 문질렀다. 장갑은 축축했다. 그는 장갑을 벗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손가락이 빨갰다. 옷깃을 세우고 팔짱을 꼈다. 남자는 잠시 그가 걸어오던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가 남긴 발자국 마지막 걸음 위로 눈이 내려앉고 있었다. 몸서리치던 그는 한 발짝 내딛었다. 무릎이 삐걱거렸다. 욕이 입김에 섞였다. 여자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움찔했다.
“아, 그쪽한테 한 말 아니에요. 날이 너무 추워서 그만….”
어색하게 손사래를 친 남자는 말을 이었다.
“저기, 죄송한데 전화 한 통 쓸 수 있을까요? 오다가 차가 고장이 났는지 멈춰버렸는데, 전화도 갑자기 먹통이 돼서요.”
여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얼핏 웃는 것도 같았다.
“이 곳은 전화가 되지 않아요.”
남자는 입을 벌렸다가 들어오는 눈에 얼른 닫았다.
“아니, 아직도 그런 데가 있어요?”
여자는 가만히 웃었다. 바람이 귀를 스쳤다. 남자는 어깨를 움츠렸다. 여간해서는 멈출 눈이 아니었다.
“저기, 그럼 전화 되는 곳으로 가려면 얼마나 가야 해요? 여기서 멀어요?”
“좀 걷긴 하셔야 할 거예요.”
“어느 쪽으로요?”
“따라오세요.”
그녀는 몸을 돌렸다. 남자는 감사하단 말을 주워섬기며 한 발짝 떼었다. 눈 밟는 소리가 귀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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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장난이 아니네요, 일기예보에 눈 온단 말은 없었는데.”
“계속 걷다보면 좀 덜할 거예요.”
“그런가.”
여자는 가만히 웃었다. 머리카락이 흩날리면서 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옷깃을 곧추세우며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날씨에. 그렇게 입고 춥지도 않아요?”
“그런가.”
남자가 중얼거린 말을 따라하며 여자는 쿡쿡 웃었다. 입매가 살짝 올라가면서 드러나는 이가 가지런했다. 남자는 허허 따라 웃다 잠시 발을 헛디뎠다. 점점 쌓여가는 눈을 헤치고 딛는 걸음이 버거웠다. 바짓단이 젖어 다리에 감겼다. 이번엔 여자가 말을 걸었다.
“도시에서 오셨나 봐요?”
“예, 서울에서 왔어요.”
“멀리서 오셨네요.”
“출장이에요. 근데 중간에서 길을 잃어버렸지 뭐예요. 그쪽에서 가르쳐준 대로 주소 찍고 왔는데, 주소를 잘못 불러준 건지 기계가 문제인 건지. 어째 자꾸 외진 데로 들어가는데 연락은 안 되고, 그러다 이젠 자동차까지 멈춰버리고.”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된 거죠 뭐.”
여자는 안됐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살짝 일그러지는 눈이 깊었다. 남자는 움츠린 어깨를 펴며 씩 웃었다.
“에이, 그냥 재수가 좀 없었을 뿐이에요. 그래도 덕분에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이랑 같이 눈 덮인 들판을 걷게 됐잖아요? 차라리 잘 된 거죠 뭐.”
여자도 웃었다. 콧잔등에 세로로 주름이 잡혔다. 남자는 가슴이 뻐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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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은 넓었다. 어느새 어깨를 들썩이는 그를 보고 여자가 멈추었다.
“제가 너무 빨리 걸었나 보네요. 힘드시면 잠깐 쉬었다 갈까요?”
“아뇨, 아니에요. 책상 앞에만 종일 있으니 이러나 봐요.”
남자는 숨을 크게 쉬었다. 코와 허파를 파고드는 공기가 칼날 같았다. 걸음이 멈춰졌다.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여자에게 괜찮다고 너스레를 떨며 남자는 다시 발을 옮겼다. 큰소리친 것에 비해 남자는 힘겨워보였다. 찬바람 속에 너무 오래 있었는지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점점 속도가 떨어지는 남자를 여자가 잡아끌었다.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자꾸 추워져요…. 숨도 잘…못 쉬겠고…. 저체온증인가….”
“숨이 잘 안 쉬어져요?”
“네…, 답답해….”
가슴께를 움켜쥐는 남자를 보며 여자는 서 있었다.
“저기…나 좀 도와줘요, 너무 힘들어…. 자꾸 숨이 차….”
그녀는 가만히 웃었다. 일렁이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이가 가지런했다. 남자는 허우적거렸다. 눈앞에 부옇게 물모래가 일었다. 몸이 점점 강바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발버둥을 쳤지만 발이 무언가에 붙들린 듯했다. 고함을 질렀지만 공기 대신 물로 찬 허파는 성대를 울리지 못했다.
점점 앞이 흐려졌다. 그는 문득 주소를 불러주던 거래처 직원이 늘어놓던 말을 떠올렸다.
‘이 동네 오는 길에 보면 되게 큰 저수지가 있어요. 어지간한 평야는 저리 가라니까 보면 바로 아실 거예요. 그거 끼고 죽 달리세요. 거기가 워낙 커서 좀 도는 것 같긴 해도, 그게 가장 빠른 길이에요.’
‘그래요…. 지금 가면 얼었겠죠? 기온 뚝 떨어진지 한참 됐으니까.’
‘그랬던가? 얼마 전에 보니 얼음 덮이긴 했던데…. 아니다, 그래도 워낙 넓으니까 가운데는 아직 좀 위험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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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공기 너머 눈 사이로 팻말이 하나 있었다. 바람을 타고 달라붙은 눈이 군데군데 글자를 가렸다. 가려지지 않은 부분도 페인트가 벗겨져 내용을 알아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낯선 이는 옷소매로 팻말에 덮인 눈을 쓸어내려다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맞으며 그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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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많이 다듬어야 할 텐데, 손도 못 대고 바로 올립니다.
급한 일만 끝내면 다른 분들 쓰신 거 감상하며 배우려고요.
포근한 잠자리에서 즐거운 꿈 꾸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