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맞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보지 않아도, 아니 볼 수 없어도, 그녀일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천천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눈밭에 울려퍼지는 그녀의 향기부터, 잣나무 가지처럼 거친 그녀의 손,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녀의 모든 부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큰 행복과 기쁨이었다. 나는 그녀의 붉은빛 머리를 살포시 어루만졌다.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녀와 나의 첫 만남은 사탕처럼 달콤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그녀는 운명처럼 내게로 다가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껌딱지처럼 옆에서 도와주고 보살펴 주었다. 때로는 엄마처럼 아낌없는 보살핌과 사랑을 주고, 때로는 누나처럼 따끔한 충고도 하고, 때로는 여동생처럼 어리광도 곧잘 부리곤 했다. 그녀에게서 무한한 사랑을 받는 내가 부럽기라도 했는지, 같은 반 아이들은 그녀가 보일 때마다 괴롭혔다. 입에 담기도 힘든 욕을 하고 침을 뱉는 건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예사스러운 일이고, 돌을 던지거나 밀어 넘어뜨리는 일은 물론, 심한 경우에는 발로 힘껏 걷어차기까지 했다. ㅡ아마 내가 보지 못한 더 심한 일도 있었으리라ㅡ 나는 그럴 때마다 몇 백 번이고, 몇 천 번이고 되뇌었다. 차라리 나를 때려. 욕먹고 맞는 건 나 하나로 족해. 나 때문에 괜히 상관없는 애까지 패지 말란 말야.ㅡ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당시에 난 이미 그 폭행의 원인이 나라는 것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ㅡ 그러나 생각처럼 말은 쉽게 나오질 않았다. 바보처럼 말도 못하고 서 있는 내가 너무나 한심했다. 더 이상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어, 담임 선생님께 곧바로 달려가 아이들이 한 짓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사과와 반성을 요구했다. 선생님의 반응은 늘 같았다. 알았다, 애들한테 잘 말해둘테니까 걱정 말고 조심해서 집에 가라. 나도 처음엔 선생님의 말씀을 철썩같이 믿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내가 그토록 사정한 것이 무상하게 똑같은 하루하루가 반복되었다. 오히려 그녀에 대한 구타와 폭행은 갈 수록 심해졌다. 단순히 때리고 놀리던 것이, 라이터로 머리카락을 태우고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발로 밟는 등의 폭행으로 심화되었다. 더욱 나를 가슴아프게 했던 것은, 그녀의 태도였다. 그녀는 폭행을 당하고도 속으로 분을 삭히고만 있었다. 게다가 나와 단 둘이 있을 때면 이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내게 넘치는 사랑을 선물해주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안쓰럽고 미안하면서,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에 대한 무력감과 절망의 골짜기는 더욱 깊어졌다.
그녀는 딸기우유를 참 좋아했다. 학교에서 힘든 하루를 보내고 와도, 내가 건네는 딸기우유 한 잔에 그녀는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한 잔을 다 비우면 나는 내 몫의 우유까지 주곤 했다. 그렇게 받은 우유를 마시는 그녀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사과이자 무력한 나에 대한 일종의 참회였다. 문득, 아빠가 내게 그녀의 머리는 딸기처럼 붉다고 한 것이 떠올랐다. 나는 그녀의 별명을 '딸기' 라 짓게 되었다. 그녀는 내 인생을 달콤하게 해 주는, 그런 딸기같은 존재였다.
일주일에 적어도 이틀은 그녀와 나의 데이트가 있었다. 데이트라고 해 봤자, 집 앞 공원까지 걸었다가 오는 게 전부였다. 그 짧은 여정동안 우리 둘은 많은 것을 나누고 공감했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발걸음으로 걷는 것 자체가 대화였고, 우리의 사랑이었다. 눈이 오는 날이면 그녀는 더욱 기뻐했다. 하늘에서 하얀 사탕같은 것이 온 거리를 뒤덮는 것을 본 그녀는, 어쩔 줄 몰라하며 어서 나가자고 나를 졸랐다. 그녀와 같이 하얗게 색이 벗겨진 거리를 걸을 때면, 그리고 그녀의 즐거운 모습을 볼 때면, 나도 언젠가는 눈처럼 하얗고 맑은 사람이 되어 그녀를 평생 즐겁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친척들은 나에게 졸업선물을 미리 주셨다. 그 중에 가장 맘에 들었던 것은 붉은 실로 촘촘히 짜여진 털실 목도리였다. 그 목도리를 하고 있노라면, 그녀가 내 옆에 바짝 붙어있는 느낌이 들어 유독 더 좋아했었다. 학교 갈 때나, 그녀와 데이트를 할 때나, 항상 목도리를 하고 나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평소에 그녀를 괴롭히는 무리 중 한 아이가 내 목도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목도리를 가지고 싶었는지, 그 아이는 내 목도리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뺏기지 않으려고 목도리를 잡았고, 투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털실 목도리는 반쯤 뜯어져 볼품없는 모습이 되었다. 그 아이는 멋쩍은 듯 목도리를 대충 내팽개치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울면서 목도리의 뜯어진 부분을 만졌다. 선생님이 들어왔고, 나를 대강 달래며 목도리는 새로 사면 된다고 그 붉은 목도리를 쓰레기통에 집어 넣었다. 더 이상 그 목도리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더욱 서러웠다. 그리고 이 모습을 그녀가 교실 밖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날, 학교가 끝나고 그녀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학교에도, 집 근처에도, 같이 데이트하던 거리와 공원에도, 그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가 좋아하던 눈이 수 십, 수 백 번 내릴 때 까지도, 냉장고의 딸기 우유는 줄어들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녀가 내 곁을 떠나갔다는 생각에 실망감과 배신감이 들었다. 어떤 때에도 항상 옆에 있어줬던 그녀인데. 결국 그 날 이후로 내 기억 속에서 점차 사라져갔다.
어느새 나는 청년이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안 그래도 허약했던 내 건강 상태는 날이 갈 수록 나빠졌다. 결국 중학교를 자퇴하고 집에서 쉬며 치료를 받았다. 이제 그녀란 존재는 더 이상 나의 세계에는 없는 것이 되었다. 오히려 그녀를 볼 때마다 느꼈던 죄책감과 미안함이 사라져 한편으로는 가뿐한 마음도 들었다. 눈이 후두둑하고 창문을 두드렸다. 첫 눈이구나. 10년이 넘게 지났지만, 그래도 첫 눈이 내릴 때만큼은 그녀가 떠올랐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창밖에서 익숙하지만 낯선, 미묘한 느낌이 들었다. 피곤해서 그런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날 밤, 여느 때처럼 잠자리에 누웠지만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았다. 물이라도 한 잔 마실까 하고 거실로 나왔다. 그 때였다. 창 밖에서 무언가가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눈이라고 하기엔 좀 둔탁했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겨울에는 체온 떨어지니까 절대 밖에 나가지 말라는 의사의 충고에도 코트를 대충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내딛는 발마다 푹푹 파이는 걸 보니 거리는 또 새하얗게 변했겠구나,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런 날이면 그녀와 함께 걷곤 했었는데. 걷다보니 예전 그 공원까지 다다랐다. 마법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눈을 맞으며. 발 밑에는 따뜻한 느낌에 폭신거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목도리였다. 나는 그녀를 꼭 껴안아 주었다. 10년만에 돌아온 그녀에게 내 남은 체온과 사랑을 아끼없이 주는 것.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 밤이 다 가도록 우리는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아이고, 젊은 나이인데 불쌍도 허지... 쯧쯧..."
"그러게 말이에요, 원래 몸이 안 좋다고는 들었는데, 근데 왜 한 겨울에 공원까지 나와서 이러고 있었을까 모르겠네."
"옆집 사람이 그러는데 말여, 그 개 말이여."
"개라니요?"
"아 왜, 그 청년이 죽을 때 품에, 그 껴안고 있던 그 뻐얼건 개말여, 고 녀석이 10년 쯤 전에 실종되았었나벼. 그 전까지 쭉 같이 살았었는데 사라졌었었으니 얼마나 가슴아팠겄어?"
"태어날 때부터 눈도 안 보이고, 게다가 벙어리니까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청년한테는 그 개가 그 뭐지, 수호천사 같은 거 였겠네요 그럼."
"암, 말도 말어. 그렇게 소중한 개가 10년 만에 돌아왔으니, 오죽 기뻤겠냔 말이지. 미안하기도 하고 말여. 근데 그럼 뭐 혀. 겨우 다시 만났는데 이렇게 둘다 가 버렸으니 말여."
"둘이 이 세상엔 같이 있진 못해도 저기 저어 하늘에서는 평생 같이 있을 수 있겠죠? 우리 그렇게 생각하자구요."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