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일본군 입대를 거부하고 노동어용령으로 끌려가는 친구 최기일을 기차역까지 마중나가 전송했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그는 김창정(金昌禎) 등 소수의 친구들과 함께 최기일을 전송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그는 일제에 의해 강제징집된 것[7][8]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고향 친구 최기일은 자원 입대.[9]라고 진술하였다. 최기일은 그의 일군 입대를 열심히 만류하였으나 그는 듣지 않고 학도병에 자원하여 입대했다.[9]
후일 최기일에 의하면 '그는 어떤 뜻을 품었는지 일본군에 입대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9]'고 회고하였다. 그 역시 자신이 자원 입대했다고 밝혔다. 자원 입대한 이유를 그는 자신의 자서전 《돌베개》에서 밝혔다. '도쿄의 일본신학교에 다녔던 치요모토는 ‘우리 집안의 불행을 내 한몸으로 대신하고자 이른바 그 지원에 나를 맡겨 버렸다’고 회고했다.
[9] 최기일,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 (생각의나무, 2002) 75페이지
치요모토의 자원입대가 부끄러운지 독립운동가 최기일 씨가 거짓말을 했다고 몰아붙이는 사람도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