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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꿀꺽.
유민의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눈앞에는 꿈에도 그리던 유진 선배가 그의 품에 안겨있었다… 거기까진 좋은데. 그녀의 하얗고 조그만 몸을 덮고 있는 옷가지라곤 얇은 하얀색 티셔츠 한 장 뿐이었고, 그 아래…아래는……과도하게 노출된 허벅지, 보드라운 살결을 덮은 하얗고 삼각형의 형태를 띈 저것은…
“패, 팬……”
“움냐……”
그는 흠칫 숨을 들이마셨다. 여기서 함부로 움직이거나, 거친 숨을 내쉬거나, 큰 소리를 내는 건 매우 현명하지 못한 처사같았다. 일단은 상황 파악이 우선이었다. 대체 이 세계의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어제의 나는 유정 선배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건지…
하나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세, 세……!”
말문과 함께 머릿속 혈관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는 황급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진정해 이유민. 넌 지금 유정 선배의 남자친구다. 이,이정도는 연인끼리 당연한 거잖아? 그는 새삼스래 선배가 벤 그의 팔을 움찔 움직여보았다. 팔뚝 너머로 선배의 가느다란 목의 굴곡이 느껴졌다. 몇 가닥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선배의 얼굴은 길쭉한 속눈썹과 합쳐져,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로 느껴졌다. 이 이상 무언가를 한다는 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우으……”
선배가 눈을 떴다. 졸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졸린 눈이 유민의 얼굴을 더듬더니.
턱 하고 그를 꼭 끌어안았다.
“!?!!?”
유민은 그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선배의 작은 채구와, 밀착된 몸을 따라 완전히 느껴지는 선배의 몸의 굴곡에 그의 신경절은 하얗게 타들어갔다. 미친,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유민아……”
“네, 네?”
“나 졸려.”
“그, 그렇군요.”
그러더니 선배는 갑자기 그의 얼굴을 향해 볼을 들이밀었다.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없는건 둘째치고, 유민은 선배의 볼이 턱끝에 스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얼릉.”
“네?”
“얼릉 뽀뽀해줘. 잠 깨게.”
뽀…뽀요? 제가 생각하는 그 뽀…뽀 말입니까? 남녀의 특정 부위와 살이 맞닿는 애정과 친밀감의 표현 말씀이십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그러는건 좀… 선배한텐 몰라도 저한텐 진도가 미친듯이 빠른데요.
“아니 선배.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빠른거같은…”
선배의 눈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아, 알겠어요. 해볼게요.”
유민은 결연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의 표정은 ‘숨쉬는것처럼 당연한 일을 왜 그런 얼굴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세계의 나는 대체 얼마만큼이나 대담한거냐.
유민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며 선배의 볼로 다가갔다. 선배의 반쯤 감긴 눈은 보채듯 그를 흘겨봤다. 굼벵이마냥 느린 속도로 전진하던 입술이 드디어 볼의 보드라운 감촉을 희미하게 느낀 순간. 그는 재빨리 입술을 떼고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장하다 이유민. 넌 해냈어. 선배의 볼에 뽀뽀를…!
“이제 여기.”
선배가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유민은 갸아악 소리지르며 선배를 벌떡 안아 일으켰다.
“선배 저희 어디 나가죠! 영화 볼래요? 맛있는거 먹으러 갈까요?”
“응? …아직 아침인데?”
“아…”
그제야 핸드폰 시계를 보니, 아직 10시 30분이었다. 원래 데이트라는 건 아침에는 잘 안하는 건가…?
“아니, 나야 싫지는 않지만… 유민이는 괜찮아?”
“네? 저, 저야 뭐…”
완전 좋죠. 날아갈 것 같습니다. 선배도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그럼, 아침 먹고 가자. 준비할테니까 먼저 씻고 있어.”
“아, 아침이요?”
“응, 아침.”
‘뭘 당연한 걸 가지고 그래?’ 가 생략된 표정이었다. 이세계의 나는 매일 아침, 선배에게서 아침을 대접받고 있었던 건가…! 그것도 밤에는 그, 그렇고 그런 일을 하고서! 유민은 즐거운 한편, 이세계의 자신에게 질투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배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다. 유민은 바로 씻으러 가는 대신, 선배가 그의 부엌에서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리가 덜 되어 군데군데 뻗쳐있는 부스스한 머리카락, 조금 구겨진 티셔츠 자락, 뒤집개를 흔들며 흥얼거리는 선배의 콧노랫소리. 그가 꿈꾸던 장면이었다. 그는 이 순간, 그 이상한 사랑의 천사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 한 순간이 그의 10년 연애운보다도 더 소중하고 가치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왜 그러고 있어?”
선배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유민은 웃으며 말했다.
“그냥, 선배가 너무 이뻐서.”
선배의 볼이 눈에 띄게 빨갛게 물들었다.
“왜, 왜 그래 부끄럽게.”
말하는 유민의 얼굴도 빨개지긴 마찬가지였다. 왜, 이건 나를 위한 연애 체험인데, 이정도는 말해도 되잖아.
밥을 먹고 준비를 마친 뒤, 그들은 나란히 자취방을 나섰다. 선배는 오래된 연인처럼 자연스럽게 유민의 팔짱을 껴왔다. 유민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선배의 낯선 감촉에 긴장하며, 로봇처럼 뻣뻣하게 길을 나섰다.
“…그래서, 우리 어디 갈까?”
“어.”
생각 안 해놨다…아니, 생각할 생각조차 못했다. 젠장,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어쩔 수 없다고. 인터넷에선 보통 남자가 데이트코스를 짜온다고 했는데… 우리도 그런 커플일까?
“에휴… 또 생각 안 해왔구만. 기다려봐. 이 선배가 좋은 데 알아봐 줄게.”
선배는 너무 당연한 듯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꺼내어 데이트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뭐지? 이 세계의 나는 이게 일상인 건가? 묘한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그는 일단 선배의 행동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선배가 그를 이끈 곳은 연극의 거리, 대학로였다.
“보고 싶은 연극이 있거든.”
선배와 단 둘이, 그것도 연인으로 연극이라니… 유민은 행복해 죽을 지경이었다. 마치 자신의 행복을 위해 세상이 모든 것을 세팅해놓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인연 엔터테인먼튼지 뭐시긴지, 일 하나는 꽤 똑바로 하잖아?
대학로에서 약도를 보며 극장을 찾아가는 와중, 유민은 익숙한 실루엣과 마주쳤다.
“하아...”
반짝이는 눈빛으로 노점상의 와플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저 작달막한 생명체. 붉은 머리카락에 날씨에 영 어울리지 않는 핑크색 스웨터… 그의 에이전트였다. 저 녀석,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아저씨, 저거 하나 주세요!”
이윽고 소녀의 가방에서 튀어나온 5만원짜리 뭉탱이에 노점상의 아저씨와 유민은 동시에 경악했다.
“선배, 저 급한 일이 생겨서요. 먼저 극장에 가 계세요.”
“응?”
선배의 대답을 기다릴 틈도 없이 그는 소녀에게 향했다. 저 비상식적인 행동에 복장 하며, 저대로 놔두면 분명히 안좋은 일이 일어날 게 틀림없었다…… 주로 사상자를 내는 방향으로.
“앗, 거기 거기 크림치즈 듬뿍 발라주세요!”
아저씨는 한 손에는 5만원짜리 뭉탱이를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와플에 크림치즈를 치덕치덕 바르고 있었다. 유민은 슬며시 다가가 소녀의 어깨를 툭 쳤다.
“야.”
“네? 히익!”
소녀는 무언가 못 볼 장면이라도 본 듯 그에게서 재빨리 멀어졌다.
“이, 이건 아니에요 유민씨. 저는 절대 농땡이 피고 있던 게 아니라, 그, 그러니까… 데이트 코스 사전 탐방 중이었어요! 유민씨의 행복한 3일을 위해!”
“이미 와 있다 이 자식아.”
녀석이 알아서 술술 불어준 덕분에 생각났다. 어저께 뭐 계약 맺은 분을 관리 어쩌고 했었지?
“…제가 대신 낼게요. 죄송합니다.”
그는 지갑에서 아저씨께 만 원 짜리를 꺼내어 주고, 대신 오만원 뭉탱이를 받았다. 아저씨는 아쉬워하며 그에게 뭉탱이를 넘겼는데, 대충 봐도 오십 장은 넘어보였다…… 이런 돈은 어디서 난 거야?
“어… 유민씨가 사주는 거예요? 안 그래도 되는데.”
“넌 좀 가만히 있어라.”
잠시 뒤, 유민은 크림치즈가 듬뿍 발린 와플을 들고 세상 다 가진 표정을 한 소녀와 나란히 길가 벤치에 앉았다.
“대체 그 돈은 뭐야?”
“웨? 우구웨약움이요.”
“먹던지 말하던지 하나만 해라.”
소녀의 입가와 볼에는 크림치즈가 잔뜩 묻어있었다. 당장 손수건을 꺼내어 볼과 입가를 단정하게 정리해주고 싶은 충동이 들게 하는 모습이었지만, 유민은 그러지 않았다. 나한테는 유정 선배가 있다고.
와플의 크기가 무색하게 꿀떡꿀떡 잘도 넘기던 그녀는 마지막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먹고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쉰 후에야 유민에게 입을 열었다.
“하~ 잘 먹었다.”
“…그거 말고 할 말이 많지 않냐?”
“…헤헷.”
헤헷은 무슨.
“그, 일단… 고맙다.”
“네? 뭐가요?”
“계약, 맺길 잘한 것 같아.”
“네에? 그 노예계… 아니 고객님께서 만족하셨다니 다행이에요~”
“…그래.”
어찌됐든 그 말은 진심이었다. 단 3일이라고 할지언정, 10년의 인연과 맞바꾸어도 전혀 부족함 없는 체험이었다… 끝날때는 아쉽겠지만.
“그래도 좀 뭐라도 알려줘야 되는 것 아냐?”
“뭘요?”
“왜, 있잖아. 지금 나하고 선배는 뭐 사귄지 며칠 됐는지, 어떤 상황인지, 그…. 어디까지 갔는지.”
“헐… 유민씨, 지금 유정씨하고 사귄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런 생각을…”
“야, 니가 오늘 아침 내 상황을 못 봐서 그래!”
“무슨 상황이었는데요?”
“아니, 그… 그래, 그건 그렇다치고. 그래서 그런 건 좀 알려줘야지.”
“음… 모르는데요?”
“뭐?”
“아니, 그야 저희도 알 수가 없는걸요… 저희는 그냥… 음… 인과율을 살짝 비틀어놓는? 것 뿐이라. 결과 외의 나머지 과정은 세계가 알아서 끼워맞추는? 그런 느낌이라서요.”
뭐 그런 적당적당한 설정이 다 있어.
“아니 그래도 뭐 다른 도와줄 수 있는거 없어? 고객을 관리하는 게 너희 일이라며.”
“움……”
소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없는 것 같은데요?”
“하하 그래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그럼 이 돈은 선배하고 데이트하는데 쓰도록할게.”
그렇게 말하며 오만원짜리 뭉탱이를 주머니에 쑥 집어넣었다. 두툼한 느낌이 여간 좋은 게 아니었다.
“아안돼요! 그거 제 계약보너스란 말예요! 난생 처음 번 돈인데…!”
소녀는 그의 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유민은 재빨리 돈을 꺼내, 돈뭉치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소녀가 폴짝폴짝 돈을 향해 손을 뻗으며 울상을 지었다.
“우으…! 놀리지 말란 말예요!”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하다못해 데이트 코스라도 짜오든지, 정보라도 알아보든지 해야지.”
“할게요! 할테니깐!”
그제서야 유민은 팔을 내렸다. 소녀는 재빨리 돈뭉치를 낚아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 돈뭉치를 꼭 끌어안았다. 저런 세속적이고 순수한 광경이라니.
“심술쟁이.”
“…니가 너무 날로 먹는다는 생각은 안 드니.”
“알겠으니까 얼른 가요. 이 악마.”
그러고보니 선배를 너무 오래 방치해뒀다. 이러면 안 되지.
“아. 가기 전에 말해두는데, 그거 한 장씩만 뽑아 써라. 아까처럼 뭉탱이로 내밀지 말고.”
“흥, 말 안 해도 알아서 할 거거든요?”
알아서 하긴 개뿔이.
“아무튼 난 갈거니까, 잘 알아놔.”
“아, 그거 아세요 유민씨?”
서둘러 극장으로 뛰어 가려던 나를 소녀가 불러세웠다.
“있잖아요. 제 모습은 유민씨하고 제가 보이길 원하는 사람한테밖에 안 보여요.”
“그게 무슨 소리야?”
“한마디로, 다른 사람들 눈엔 유민씨가 혼자 쌩쑈하는 걸로 보였다는 거죠.”
소녀가 혀를 빼 내밀었다. 유민은 자신이 했던 짓들을 떠올리곤,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저…저게! 그러나 이미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에휴. 무시하고 말지.”
유민은 터덜터덜 극장을 향해 걸어갔다.
연극은 신파풍의 흔한 로맨스 연극이었다. 평소 연극에 관심은 있었지만 보러 갈 사람이 없었던 유민에게, 그것은 특별하고도 매우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는 옆자리에 앉은 선배를 의식하며, 단 3일동안이지만 선배가 그의 연인이라는 점을 때때로 떠올리며 행복한 순간을 보냈다. 연극 이후에 갔던 이탈리안 레스토랑과 분위기 좋은 칵테일 바…… 선배는 그보다 불과 한 살 더 많을 뿐이었지만 데이트에 관해서는 도사에 가까웠다. 그녀가 이끄는 곳은 유민에겐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그리고 헤어져야 할 시간. 그들은 서로 손을 깍지낀 채 나란히 선배의 집으로 향하는 버스정류장으로 걸었다. 벌써 열두 시 가까운 시간이라 도로에 사람들은 많이 줄었고, 넓은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만 들려왔다. 유민은 그곳이 그들만을 위해 준비된 공간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 말은 사실일지도 몰랐다. 그의 인연 10년치를 바쳐 만들어낸 3일. 온전히 그를 위한 시간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
“선배.”
“응?”
“고마워요.”
“왜?”
“아니, 그냥. 오늘 이렇게 즐거운 장소에 데려다주신 것도, 저하고 같이 걷고 있는 것도… 그냥 전부 고마워요.”
“…뭐야, 새삼스래.”
선배를 고개를 푹 숙였다. 어느새 정류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유민은 저도 모르게 미적미적 걸었다. 마음같아선 좀 더 있자고, 요 앞 카페라도 좋으니 들어가서 무슨 얘기라도 하자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비록 3일 뒤엔 사라질 시간이라도, 유민은 선배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이제 가세요?”
“응…”
선배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좀 슬픈 듯도 보였다. 유민도 아마 그런 표정이었을 것이다. 슬픔이라기보단 아쉬움에 가깝겠지만.
“유민아.”
“네?”
“너한테 주고 싶은 게 있어.”
선배가 잡았던 손을 풀고, 가방 속을 주섬주섬 뒤졌다. 잠시 후 선배는 유민의 손에 자그맣게 포장된 빨간 상자를 쥐어주었다.
“이게 뭐예요?”
유민은 위화감을 느꼈다. 선물인데, 게다가 선배한테 난생 처음 받는 선물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우리 1주년 선물.”
선배는 지친 표정이었다.
“그리고 우리… 이제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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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보다 글이 훨씬 길어지는군요... 얼마나 갈지 모르겠습니다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