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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애가 찾아온 건 일주일 전이었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잉여쓰레기같은 생활을 하고 있던 무더운 여름 한낮. 유민의 자취방 벨이 울리며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세요~?"
높게 통통 튀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유민은 홀린듯 현관문을 열었다.
"누구세..."
"아코."
툭 하는 소리에 내려다보니, 그의 명치쯤에 붉은 단발머리에 노란 리본을 묶은 여자아이가 코를 슬슬 문지르고 있었다. 유민은 저도 모르게 한두 발짝 뒤로 물러났다. 누구지 얘? 우리집에 여자가 찾아올 리가 없는데?
"이유민 고객님?"
"고객...님이요?"
"맞으시죠? 맞구나? 안녕하세요~"
그녀는 고개를 불쑥 숙이며 예의바르게 인사를 해왔다. 날씨에 영 어울리지 않는 핑크빛 스웨터가 폭 하고 접히고, 하얀 니삭스 아래로 동글동글한 갈색 구두가 또각 소리를 내며 시멘트 바닥에 닿았다. 그 장면에 유민은 저도 모르게 할 말을 잃었다. 황당함보다도, 눈을 뗄 수 없었다고나 할까. 그는 무심코 묻고 싶어졌다. 너 몇 살이니?
그러나 나온 질문은 다른 것이었다.
"...누구세요?"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는 당신의 연애를 도와드리러 온 ‘연애 에이전트’에요!"
"네?"
그녀는 스웨터폭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는 가슴을 쭉 내밀며 말했다.
"이유민씨, 나이 스물하나, 연애경험 키스경험 스킨쉽 전부 없음. 음.....그러니까....모쏠! 맞죠?"
녀석은 맞죠? 저 잘했죠? 하는 눈으로 그를 또랑또랑 쳐다봤다. 그러는 넌 꼬맹이주제에 연애경험 풍부하고 키스에 스킨쉽은 누워서 식은죽먹기냐?
"아니... 일단 당신은 몇살인데요."
몇살인데 초면에 이렇게 실례되는 말을 하세요.
"음...53년?"
유민은 예의바르게 웃었다.
"수고하세요."
"자, 잠깐만요!"
생후 53년짜리 아이는 닫히려는 문을 재빨리 움켜쥐었다. 미친, 뭔 힘이?
"으으으...제 말좀 들어봐요옷!"
아이에게 잡힌 철문이 기이익 소리를 내며 미세하게 우그러졌다. 유민은 기겁하며 문손잡이를 놨다. 그러자 문이 꽝 소리를 내며 벽에 쳐박혔다. 시멘트 가루가 몇 조각 부스스 떨어졌다. 여자아이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의 손을 덥썩 잡고선 말을 두다다 쏟아냈다.
"제, 제발 들어가지 말아요. 다른 고객들도 다 까이고, 유민씨가 마지막이란 말예요. 저 이대로 돌아가면 안돼요. 저도 저도, 돈도 벌고 맛있는 것도 사먹고......우흑."
유민은 미칠 노릇이었다. 콩알만한 귀여운 여자애가 손을 덥썩 붙잡고 우는 상황이 이리도 공포스럽게 느껴질 수 있을까. 물론 그런 상황은 평생 처음 겪어보지만. 그 와중에도 이 아이가 조금 불쌍하게 느껴지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착해빠진건 그의 최대 약점이었다.
"아... 그러면 일단...울지 마요. 울지 말고, 무슨 일인지 들어줄테니깐."
"가, 감사합니다."
그리하여, 유민과 소녀는 자취방 안의 무릎탁자를 마주두고 앉게 되었다. 소녀는 유민이 갖다준 우유를 호록 하고 마시며 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의 모든 행복을 가진 듯 노곤한 미소와 함께. 유민은 저도 모르게 소녀를 쳐다봤다. 통통하고 새하얀 볼과 폭신한 스웨터, 팔락이는 스커트 아래로 조신하게 정좌한 다리…… 시선이 그 지점에 이르렀을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벽의 무늬 개수를 셌다. 심장이 자기도 모르게 날뛰고 있었다. 미친, 진정하라고.
“…그래서 그 연애 에이전트?가 뭔데요?”
소녀는 핫! 하고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옆구리의 조막만한 크로스백에서 무언가 서류 같은 것을 꺼냈다.
“그니까 말이죠. 한 마디로 평생 모쏠로 지내온 사람들에게 연애를 체험하게 해 주는 거예요.”
“…어떻게?”
“음… 운명을 뒤틀어서?”
“아 그러시구나.”
유민은 그냥 웃었다. 슬슬 저 아이의 말에는 아무 대답도 안 하는 편이 낫다는 걸 깨닫는 중이었다. 덧붙여 솔직히 저 아이는 꽤나 그의 취향에 가까웠지만, 만에 하나 저 소녀가 스무살 이상의 적법한 성인이라 해도 절대로 딴 마음은 먹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운명을 뒤트니 하는 소녀하고 현실 속에서 만화 같은 연애를 하고 싶지는 않거든.
“그러니까, 저희 ‘인연 엔터테인먼트’에서는 고객님들께 연애를 체험할 기회를 드리는 거예요. 어떤 방법보다도 생생하게, 바로 고객님들께서 직접 그 운명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연애를 해볼 수 있게요. 게다가 무려, 고객님께서 직접 상대를 고르실 수도 있다구요!”
“아, 그렇구나. 그거 참 대단하네요.”
유민은 인자하게 웃었다. 소녀의 표정은 부루퉁해졌다.
“…지금 제 말 안 믿는 거예요?”
“아뇨, 완전 믿죠. 그래서 저는 뭘 하면 되나요? 막 계약서같은걸 쓰고 마법주문같은걸 외우면 되나요?”
“일단 제 말을 믿어주세요.”
“하하 그거말구요.”
“믿어달라구요!”
“하하 네.”
“으으…..”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부들부들 떨었다. 눈에는 분한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너무 심했나 싶어, 말하려는데.
“…이 방법만은 안 쓰려고 했는데.”
“네?”
“…보고 도망치지 마세요. 도망치면 다시 붙잡아올거야.”
“아니 저기…”
유민이 쎄한 불안감을 느낀것도 잠시, 소녀의 반신이 철컹 하고 ‘열렸다’. 이후 철커덩철컥 하는 소리를 내며 소녀의 모습이 무언가 형이상학적이고 기하학적이며 기괴하고 경건한 무언가로 변신했다. 유민은 “…어…” 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눈앞의 무언가는 사랑스런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제 믿으시죠?”
소녀는 빙긋 웃었다. 유민은 멍하니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내가 방금 뭘 본거지.
“…그럼 당신이 그… 연애 엔터테인먼트의… 뭐예요?”
“음… ‘사랑의 천사’ 정도랄까?”
사랑의 천사는 그런 기괴하고 형이상학적이며 경건한 모습인 걸까.
“…그런데 왜 그런…사람 같은 모습으로 다니는 건데요?”
“아, 제가 변신한 게 아니에요. 유민 씨의 눈에 그렇게 비치는 거지.”
“비친다고?”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람의 가장 이상적인 이성의 모습으로 비치거든요. 방금은 잠깐 제 진짜 모습을 볼 수 있게 해드린거구요.”
“그, 그래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같은데, 이젠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근데 저 말이 사실이면 아까 그 조막만하고 귀여운 모습이 자신의 가장 이상적인 여성이란 말이 되는 건가?
“아, 그래도 걱정 마세요. 말투나 성격은 진짜 저거든요.”
“하하 그래 고맙네.”
아주 많은 위로가 되는구나. 소녀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고객님께서는 딱 두 가지만 해주시면 돼요. 이 계약서에 싸인해주시고, 원하는 상대를 골라주시기만 하면 돼는 거예요.”
그러고선 주섬주섬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다가, 앗 하고는.
“아, 저는 안 돼요.”
하고 슬쩍 부끄러운 웃음을 지었다. 유민은 허허 웃었다.
“아 네.”
그래, 저런 말은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건 저 말이, 여전히 헛소리같긴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진짜일지도 모른다는거. 정말이라면? 그는 누구를 선택할까?
“…그거 누구라도 가능한 거예요?”
“그럼요! 저를 믿어요. 아까 보셨잖아요?”
“기한은 얼마나 되는데요?”
“음… 가격에 따라 다르긴 한데.”
“가격?”
“아, 연애 체험의 대가로 고객님의 연애운을 조금 가져가거든요.”
“연애운…?”
“네.”
“어느정도?”
“음, 고객님의 경우는… 한 10년치?”
“뭐 미친?”
그 말은 설마 10년동안 아무도 못 만나고 못 사귀고 평생 모솔로 늙어 죽어야 한다는 건가?
“유민씨가 생각하는 바로 그거예요.”
사랑의 천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체험기간은 얼마정돈데?”
“3일?”
“미친. 그건 바가지잖아.”
그의 나이 스물한 살. 십 년 뒤면 서른 하나. 서른한 살 먹도록 연애 한 번 못해본 한심한 인간을 그 뒤에라도 누가 만나준단 말인가, 혹여 있다고 해도, 가장 꽃다운 청춘을 지금같이 주말이건 여름 방학이건 컴퓨터 앞에 구겨앉아 애니와 게임 속 자캐나 보며 히히덕대는 인생을 향후 10년동안 확정적으로 살아야 된다는 건데, 그 대가로 3일? 3일이라고?
“…좀 깎아주면 안 되냐?”
“안 돼요.”
소녀는 미소로 철벽을 쳤다.
“아니 그래도 사람 인생 10년 동안 조지는데, 3일은 너무 심하잖아.”
“…하아. 생각을 해 보세요, 유민씨.”
“뭔 생각.”
“유민씨. 21년동안 사셨죠?”
“응.”
“그동안 연애 한 번 못해보셨죠?”
“…그랬지.”
“21년동안 유민씨의 연애 운이 0이었을 거라 생각하세요?”
“어…”
유민의 동공이 바르르 떨렸다. 소녀는 가방 속에서 꽤 두꺼운 종이 뭉텅이를 책상에 턱 얹었다. 종이 위에는 복잡한 도표가 그려져 있었다.
“이건 근 21년간 유민씨의 연애운을 도표로 나타낸 거예요. 그리고 이건 앞으로 10년동안의 연애운을 도표화한 거죠.”
유민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유민씨의 인성이 앞으로 획기적으로 변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 10년 동안, 어쩌면 평생 힘들 수도 있다는거죠!”
“아, 좀…”
소녀는 유민의 손을 덥썩 잡았다.
“유민씨… 이건 저희가 유민씨를 도와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그, 그만…”
“이대로 평생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 해보고 살 바엔 차라리 10년쯤 더 모솔로 살고, 한 번이라도 제대로 꿈꾸는 연애를…”
“그만하라고!”
유민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소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의 마음은 빗발치는 진실의 죽창에 너덜너덜해졌다. 젠장, 이 녀석이 왜 앞선 고객들에게 전부 퇴짜맞았는지 알 것 같아.
“…그래서, 누구든 가능한거야?”
“…네에.”
소녀는 슬슬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아. 막 만화속의 인물이거나 그러면 안 돼요. 오직 실존하는…”
“아 나도 그정돈 알아!”
유민은 우울한 심정으로 눈앞의 계약서를 쭉 훑었다. 고객님은 향후 10년간 연애를 할 수 없고, 연애 사업 관련 법령에 의한 적법한 어쩌고, 갑과 을이 어쩌고 저쩌고… 마지막 이름칸에 싸인을 하며 말했다.
“…유정 선배로 해줘.”
“유정 …선배요?”
소녀는 두꺼운 뭉텅이의 뒷부분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나의 개인 신상까지 철저히 조사한 모양이었다.
“…의외네요. 무슨 연예인이나 그런 사람 말 할 줄 알았거든요. 대부분 그랬다던데.”
“그것도 괜찮지. 그렇지만…”
그는 현실감 없는 연애보다, 생생하고 가까이 있는 무언가를 원했다. 물론 유정 선배도, 그의 입장에선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멀고 현실감 없었지만. 게다가 그에게 그녀는 특별했다. 그녀에게 그는 아마도 스쳐지나가는 후배 1쯤 되겠지만.
“뭐… 그러면 그렇게 해 드릴게요. 계약서는 다 작성하셨죠?”
“응.”
소녀는 계약서를 꼼꼼히 검토하더니, 상 위에 널부러져 있던 종이뭉치들을 부시럭거리며 정리하여 가방에 넣었다. 그러고선 짝, 손뼉을 마주쳤다.
“다 끝났어요!”
“끝났다고?”
“네. 이제 고객님의 운명은 아주 잠시간 바뀌었습니다!”
아무 느낌도 없는데. 뒤틀린 시공으로 빨려들어가거나, 정신차려보니 과거와 현재가 뒤죽박죽이 되어있다거나 하는 위화감도 없고.
“…그래서 난 뭘 하면 돼?”
“음… 굳이 말하자면. 침대에 가서 누우시면 돼요.”
“그리고?”
“코- 자는 거예요.”
소녀는 볼에 자신의 손바닥을 가져다대며, 잠든 시늉을 해보였다.
“그리고 눈 뜰 때면, 많은 게 바뀌어 있을 거예요.”
“…그래?”
“네. 음… 저는 내일쯤 돌아올게요.”
“또 오는 거야?”
“계약을 맺은 분을 관리해드리는 게 저희의 일이니까요.”
“그, 그래…?”
그녀가 나의 연애 체험에 무슨 도움이 될까.
“그럼, 즐거운 체험 되세요~”
“야, 잠깐.”
눈을 깜빡였을 뿐인데, 소녀의 모습은 흔적조차 없었다. 유민은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감각도 분명히 느껴지고, 기억도 분명한 걸로 봐서 꿈은 아닌 것 같은데. 그는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웠다. 초여름의 후텁지근한 열기가 자취방 안을 감돌았지만, 신기하게도 아무 불쾌감 없이 잠기운이 몰려왔다. 그는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생각했다. 만약 이 모든게 정말이라면……
퍼뜩 눈을 떴다. 무심결에 팔을 움직이려 했는데, 팔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우웅……”
이상한 소리도 들렸다. 얇고 동글동글하게 굴러가는 것이, 마치……
그는 퍼뜩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턱 하고, 숨이 막혀왔다.
그의 품 안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사람. 폭신한 밤색 숏컷에, 애기같이 통통한 볼과 오밀조밀하게 다물린 선홍빛 입술.
유정 선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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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라는 이세계 생존학은 안쓰고...!
단편의 단은 짧을 단입니다. 두편정도는 더 나올 것 같군요.
재밌게 읽어주셨음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