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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노무현을 있게한 부림사건을 아십니까
게시물ID : sisa_39217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ss989
추천 : 14
조회수 : 1000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5/20 03:45:04

 

 

 

 

 

조금씩 별난 변호사’노무현에게 ‘내 삶을 바꾸었던 바로 그 사건’은 1981년 9월에 일어났다.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충직했던 부하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18년 6개월에 걸친 장기독재의 막을 내리고, 또 다른 충직했던 부하 전두환이 12.12에 이어 5ㆍ17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찬탈했다. 전두환 일당은 광주시민 수천명을 무차별 살상하면서 피의 5공 정권을 수립하고 전임자보다 더한 폭정을 자행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살육으로 시작된 5공 정권을 용납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학생들이 반독재 투쟁의 선두에 섰다. 정권수립 1년도 채 안 되어 숨을 죽이게 하는 공포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의 반독재 투쟁이 도처에서 전개되었다.


광주항쟁 1주년이 된 5월과 6월에는 서울뿐만 아니라 전남대, 충남대, 부산대 등에도 앞뒤로 하여 서울과 같은 형태의 집회와 시위가 이어졌다. 특히 5월 12일 성균관대의 경우, 처음으로 ‘5월 광주항쟁을 기억하자’는 플래카드를 걸었으며, 종로 4가와 동대문경찰서까지 진출해 경찰과 충돌했다. 학생 상당수가 부상을 입었다. 이들은 14일부터 29일을 광주항쟁 희생자 위령제 기간으로 선포했다. 권선준ㆍ심재환 등 10명이 구속되었다.

 

 

 


9월 중순에는 부산지역의 재야, 노동운동ㆍ종교단체ㆍ학생운동 등 민주인사를 하나의 조직으로 임의 조작하여 친북단체로 용공조작하는 대대적인 탄압을 획책했다. 부산학 학림이라는 의미로 ‘부림’으로 이름한 이 사건은 부산지역의 이상록ㆍ고호식 등 민주인사 22명이 구속되어 혹독한 고문 아래 놓였다. 변호사 노무현은 이때 변호인단에 참여함으로써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사실 노무현은 이즈음까지도 시국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유신쿠데타가 일어날 때는 평범한 고시생이었다. 그의 소견이다.

제가 고시공부를 한다고 절에 들어가 있는데, 그 때 공부하고 있는 와중에 10월 유신이 났어요. 학생 몇 사람도 절에 들어와 있었는데 술 먹고 울고 그러더라구요. 나도 심정은 비슷했지요. 그런데 그 헌법책, ‘유신헌법’으로 공부를 했지요. 유신이 되었으니까 헌법을 새로 사야 했어요. 10월 유신은 나에게 헌법책을 새로 사야 한다는 것, 공부를 새로 해야 한다는 걸 의미했습니다. 또 그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서 모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구요. 시험을 위해서 책에 있는 이론을 외우기는 외우는데 이론이 억지이지 않습니까. 그 어거지 이론을 공부하니까 모멸감이 쌓이지요. (

 

 


노무현에게 박정희의 유신쿠데타는 ‘헌법책을 새로 사야 한다는 것’정도로 인식되었다. 마치 이승만을 생일축하 글짓기에 ‘동맹파업’사건으로 인식되었던 것과 비슷했다. 박정희 시대에는 평범한 고시생이었고 전두환 초기에도 평범한 변호사일 뿐이었다.

노무현의 생애를 바꾸게 된 ‘부림(釜林)사건’은 유신과 5공시대 독재정권에서 ‘공안정국’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이면 어김없이 조작했던 사건 중의 하나였다.

 

 



‘부림’이란 용어는 1980년 12월에 있었고, 서울대 운동권 사건인 이른바 ‘무림사건’, 1981년 5월의 ‘학림사건’ 등 ‘림’자 돌림에 맞춰 부산지역의 ‘림’자 즉 ‘부림사건’이 된 것이다. 앞서 발생한 공안조작사건 ‘무림’과 ‘학림’의 ‘림’자도 사실상 1960년대 동백림 사건에서 빌려온 말이다. 조작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부림’은 노무현의 6월항쟁 등 민주화 운동과 인연을 맺게 한 최초의 사건이다. (15)

 

 

 


공안당국은 반국가단체를 만들어 정부 전복을 획책했다는 혐의로 이호철ㆍ장상훈ㆍ송병관ㆍ김재규ㆍ노재열ㆍ이상록ㆍ고호석ㆍ송세경ㆍ설동일 등 부산지역 지식인과 교사, 대학생 22명을 구속했다. 그런데 이들이 실제로 한 일은 사회과학 책을 읽고 독서 모임을 하면서 자기들끼리 정부를 비판한 것이 전부였다.

 

 

노무현은 얼떨결에 이 사건을 맡았다. 노무현은 구속자들을 만난 뒤 충격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배운 법으로는 48시간 안에 구속영장이 안 떨어지면 피의자를 석방하게 되어 있으나, 송병곤은 구속영장 없이 60일을 대공분실에 감금당해 있었다. 가족들은 어느 날 갑자기 행방불명된 자식을 찾으려고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다 두 달만에 간신히 소재를 알아냈으나 면회조차 안 되었다.

 

“집에서 연락조차 못했던 그 학생을 내가 처음 접견했을 때 그는 경찰의 치료를 받아 고문으로 인한 상처의 흔적을 거의 지운 후라고 했다. 한창 피어나야 할 젊은이의 그 처참한 모습이란…. 눈앞이 캄캄해졌다. 세상에 이런 일이….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는 그 모습에 기가 막혔다. 분노로 인해 머리 속이 헝클어지고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노무현이 『여보, 나 좀 도와줘』에 쓴 자기 고백이다. 피의자 접견 과정에서 충격을 받은 노무현은 법정에서 또 한 차례 놀라운 경험을 한다. 워낙 사건 관련자가 많아 공판은 새벽 1시가 넘도록 진행됐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법정에서 떳떳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이었다.

 

‘부림 사건’은 아직도 진행중

 

‘부림 사건’은 노무현을 ‘돈 잘 버는 변호사’에서 ‘운동하는 변호사’로 변화시켰다. 어쩌면 ‘부림 사건’이 노무현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만드는 데 가장 공헌을 했는지 모른다.

 

 

 

 

 

 

 

나는 그때 그들로부터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읽다 붙잡혀온 그 책들을 읽길 권했다. 바쁜데다 경황이 없어 책이 잘 읽히질 않았다. 나 또한 짧은 식견으로 토론을 하며 오히려 그들을 설득시키려고 하기도 했다. 학생들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그땐 잘 이해도 못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들로부터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관심사에 대해서도 차츰 눈을 뜨게 되었다. 훗날 그들이 석방되어 나올 때쯤에는 나도 꽤 많은 책을 읽고 있었다.” (노무현의 『여보, 나 좀 도와줘』 중에서)

 

1990년 월간 『말』 3월호에 실린 의식화된 노무현의 변론 모습이 실려 있다. 그가 재판정에서 변론을 하던 중 “알리하고 포먼하고 권투시합을 하는데 김일성이 알리 편을 들었을 때 피고인도 알리 편을 들었다면 그것도 이적행위냐”고 따져 묻자 당시 최병국 검사(현 한나라당 국회의원)는 “북괴를 찬양하는 발언을 자제해 주십시요”라고 소리쳐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부림 사건’이 아물지도 않은 1982년 3월 18일 부산 도심 한가운데서 ‘봉홧불’이 솟아오른다. 다름 아닌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른바 ‘부미방 사건’. 이 사건은 1980년대 반미자주화 투쟁에 획을 긋는 사건이 된다.

 

‘부미방 사건’의 변론인 선정 과정에서 노무현은 ‘부산 민주화 운동의 대부’ 송기인 신부를 만난다. 부산지역의 1970년대 유신반대 투쟁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민주화 운동의 버팀목은 송기인 신부, 김광일 변호사, 최성묵 목사로 대표된다. 송 신부는 노무현과의 처음 인연을 이렇게 설명한다.

 

“부미방 사건을 변론하기 위해 이돈명 변호사를 비롯해 모두 8명이 서울에서 내려와야 하지만 당시 부산의 이흥록 변호사가 찾아와 박찬종 변호사가 유신헌법에 관여하는 등 별로 (색깔이) 선명하지 않다며 신부님이 이야기해 빼달라고 했지. (동업자인) 자기들끼리는 이야기하기가 좀 그렇다면서. 그렇게 뺀 자리에 노무현이 들어간 거지. 한마디로 박찬종 대타였지, 뭐.”

 

현실에 ‘눈을 뜬’ 노무현 변호사는 1984년 공해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1985년 5월 3일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이하 부민협, 회장 송기인 신부)에 발기인으로 참가하는 등 부산지역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계속

 

 

 출처

http://blog.daum.net/bucheonstory/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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