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암살
김구는 암살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제보를 접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도 살해하지 못했는데 동포가 어떻게 위해를 가하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총격당하였다.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절명하였다.
여운영 암살
1946년부터는 김규식, 안재홍과 함께 통일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이를 반대하는 좌·우익 양측으로부터 테러를 십여 차례 당했으며, 좌파 단체의 주도권을 놓고 박헌영 등과 경합했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차량으로 이동 도중, 백의사의 집행부장 김영철이 선정한 한지근(본명 이필형)외 다섯 명의 저격을 받고 암살되었다.
여운형 암살 30년 후, 한지근은 월남 청년 출신으로 백의사의 행동대원이었으며 서울에 사는 김영철이 백의사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한지근에게 권총을 준 것으로 밝혀졌다.[9] 배후로 지목된 김모씨는 사상검사 조재천에게 불려갔으나, 불려간 자리에서 자신의 수첩에 적힌 총기번호를 보여 주고 이만하면 잘 알것 아니오 라며 한지근 선에서 윗선으로 수사를 확대하면 조 검사는 물론 그 아들까지 살해하겠다고 협박하여 그 이상의 수사 진전을 저지시켰다.
백의사(白衣社)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정국의 우익 테러단체이다.
장면 암살미수
대한민국의 제4대 부통령 장면(張勉)이 서울 시공관에서 김상붕 등의 총에 피격된 사건이다.[1], 서울 시공관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 연단에서 연설을 마치고 하단하던 중 복도에서 쏜 최훈, 김상붕 등 5인이 쏜 총에 왼손을 관통당하였다. 손에서는 피가 흘렀으나 장면은 괜찮다고 손을 흔들며 내려왔다. 왼쪽손 관통상을 당하였으며, 저격범 김상붕 등은 조병옥 박사 만세 등을 외치며 내부 소행인 것처럼 조작하려다가 도주하였다. 저격범들은 바로 현장 근처에서 체포되고 피격 사건 배후 인물로 지목된 최훈은 10월 1일 구속되었다.
당시 장면 부통령을 저격한 최훈, 김상붕 등은 현장에서 조병옥 박사 만세 를 외쳐 민주당 내부의 파벌갈등인 것처럼 왜곡하려 했으나, "장면박사 저격사건은 전 서울시장 임흥순이 지시했다"고 폭로함으로써 사건의 배후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즉 사건 40일 전 자유당 2인자인 이기붕이 임흥순에게, 임은 내무장관 이익흥에게, 이는 김종원에게, 김은 장역복에게, 장은 박사일 중앙사찰분실장에게, 박은 오충환 시경사찰과장에게, 오는 이덕신에게 범행을 차례로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저격범인은 모두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장면 부통령의 선처 호소로 모두 감형되었다.
윤보선 암살미수
1967년 5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육군 중령 방준모를 직접 불러 놓고는 ‘이 선거가 아무래도 위험해. 백중지세야. 까닥하다간 지겠어. 박 대통령의 혁명과업 완수와 경제계획을 완수하려면 할 수 없소. 암살할 준비를 하시오’라고 윤보선 암살을 명령했다. 표 대결에서 박 대통령이 패배한다면 ‘윤보선씨를 총으로 저격한다’는 암살 명령이었다. 방준모는 김형욱의 이 지시에 따라 개표 날 장총을 든 저격수와 함께 윤씨 집 안방이 내려다 보이는 서울 종로구 덕성여고 2층에서 비밀리에 대기했으나, 실제 개표 결과 박 대통령이 승리하는 바람에 그냥 철수하게 되었고 후일 방씨의 이런 폭로는 책으로까지 출판됐지만, 국내 일간지에는 윤보선에 대한 암살미수 관련 기사가 한차례도 보도되지 않았다.
장준하 의문사 (타살 밝혀짐)
장준하는 약사봉에서 약사계곡 방향으로 뻗은 절벽 아래에서 김용환 및 호림산악회 회원들에 의해 사체로 발견되었다.[87] 이날 형식적인 사고 조사와 시신 수습이 이뤄진 이후, 시신은 유족들에게 인계되었다.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다. 장준하는 세상을 뜨기 20여일 전인 7월 말 김대중을 찾았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국민당에 몸담고 있던 장준하는 김대중을 공격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약간의 앙금이 있었다. 이제 장준하가 준연금상태에 있어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김대중을 찾아가 당신이 못 움직이니 내가 움직이겠다며 희생을 각오하고 싸울 터이니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다. 장준하는 광주로 홍남순 변호사를, 원주로 지학순 주교를 찾아다니며 김영삼과 신민당이 빠져나간 공백을 메우려 했다. 장준하와 김대중이 손을 잡는다는 것은 박정희로서는 영 꺼림칙한 일이었다. <김대중 자서전>은 장준하의 죽음을 독재정권에 의한 살인으로 확신했던 함석헌이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장준하는 김대중과 화해한 것이 죽음을 불러왔어. 저놈들이 둘이 합치면 어찌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했을 것이야.”
장준하는 박정희에게 윤보선이나 김대중 같은 정적이나 정치적 위협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군 장교와 얼치기 광복군 출신으로 두 차례나 국헌을 짓밟았던 박정희에게, 진짜 광복군 출신이자 진짜 민족주의자 장준하는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존재론적 위협이었다.김영삼 초산 테러 및 의원직 박탈, 부마항쟁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중, 1969년 6월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였던 김영삼은 자택 인근에서 괴한들에게 습격당하였다.[34] 매복하고 있던 괴한들은 김영삼 원내총무의 차를 둘러싸고 승용차 창문에 초산을 뿌렸다. 다행히 미수에 그쳤지만 김 전 대통령 측은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정권 차원의 테러"라고 주장했다.[34] 수류탄으로 생각했던 김영삼과 비서는 고개를 숙였으나 차량 일부와 아스팔트 바닥이 녹아내리는 것을 목격했다 한다.
김영삼 측은 이 사건이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정권적 차원의 테러'라고 주장했고[34] 이후 김영삼은 박정희의 주요 정적 중 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김영삼 역시 이후 박정희 정권과 가열찬 투쟁을 벌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