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흔히들 여름을 동적인 계절이라 생각하고 있을 테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다.
대외적으로 비춰지는 여름의 이미지란 단순히 몇 안 되는 긍정적인 부분들이 미디어에 의해 미화된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우리의 피부에 닿는 여름이란 뜨겁고, 끈적하고, 나른하고, 질척이는... 그런 불쾌한 감각들의 총결산인 것이다. 아이스크림이 정말 시원하게 느껴진다느니 바다에서 재밌게 놀 수 있다느니 하는 것들은 전부 여름을 지배하는 불쾌한 감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발버둥에불과한 것이다.
"그만 그만~! 호타로, 여름을 그런 식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거야?"
이 생각을 사토시에게 말하니 녀석은 더 듣기 싫다는 듯 손을 절래절래 내저었다. 내 말을 농담으로 흘려들을 지언정 싫어하는 내색은 보이지 않는 녀석이건만, 귀찮은 투로 내 말을 끊는 걸로 보아 녀석도 더위에 지친 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럼 그렇지. 제아무리 사토시라 할지라도 여름이 내뿜는 불쾌함 속에서 제 성격을 온전히 지킬 리가 만무했다.
"그래도 여름이 아니라면 이렇게 시원한 바람을 느껴볼 수 있을까?"
"글쎄, 지금 이 바람은 내가 페달을 밟고 있는 만큼 느껴지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그리고 애초에 나는 가만히 있어도 느껴지는 바람 쪽이 훨씬 더 기분 좋단 말이다"
이렇게 쏘아붙이니 사토시는 크게 웃어제꼈다. 평소의 녀석이라면 그저 가볍게 웃어버렸을 말이었을텐데, 그 만큼 여름이 무서운 계절이란 얘기겠지.
"하하하... 정말 신조대로 사는구나. 그러면서 어떻게 치탄다의 부름에는 응할 생각을 한 거야?"
"...시끄러"
건성으로 흘려 버렸지만 실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평범한 사람도 여름이란 계절이 찾아오면 움직이기를 꺼리거늘 어떻게 에너지 절약주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굳이 거절하고 싶다면 거절해도 되었을 일에 출두하기로 한 것일까. 혹시 내가 더위를 먹어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치탄다의 전화를 받았던 것이 아닐까, 지금 생각해 보니 생각나는 것이라곤 와주기를 부탁하는 치탄다의 목소리에서 간절함을 느꼈던 것이 전부였다. 좀 더 본격적으로 생각하면 그 이유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뙤약볕을 직격으로 맞고 있는 머리를 더 데우긴 싫으므로 깊은 생각은 지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일단은 여름의 변덕이라고 해둘까.
그렇게 몇분을 달렸을까 저 멀리서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나서야 주위에 있는 사람이 나와 사토시 뿐이란 걸 알아차렸고 저 손짓하는 사람이 우리 둘 중 누군가를, 혹은 우리 둘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에 하나 저기 있는
사람이 나를 부르고 있었을 경우를 대비해 날 손을 흔들면서까지 반겨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 결과 아무도 없을 것 같다는 조금 슬픈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내 생각대로 손을 흔든 사람은 나를 반기는 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더욱 자세히 말하자면 날 아예 무시해 버렸다.
"마야카, 오래 기다렸어?"
"그렇게 많이 안 기다렸어. 후쿠쨩이야말로 오느라 힘들진 않았어?"
사토시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던 사람의 정체는 바로 이바라였다. 몇달 전 드디어 붉은 연을 잇게 된 두 사람은 남 부럽지 않을 정도로 알콩달콩 지내고
있다... 라고 치탄다가 말해주었다만 정작 실상은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 딱히 궁금할 일이 없기에 굳이 물어보진 않았지만 사토시
는 남에게 자신의 연애를 말하는 것이 다소 버거워 보이는 듯 했다. 그 만큼 이바라가 사토시를 꽉 부여잡고 있는 거겠지.
그나저나 오늘의 이바라는 옷차림이 다소 이질적이었다. 뭐.. 여성이 지극히 여성스런 복장을 입고 있는 것에 놀란다면 실례겠지만 아닌 게 아니라 여지껏 이바라가 보여줬던 옷차림은 여성스러움을 다소 절제한 듯한 느낌이었지만 이번엔 달랐기 때문이었다. 챙이 넓은 밀짚모자와 하얗디 하얀 원피스의 조합은 마치 자신도 어엿한 여성이라는 걸 강하게 주장하는 것만 같이 느껴졌고 실제로도 제법 잘 어울리는 차림새였다.
사토시는 자신의 여자친구가 옷차림에 큰 변화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본 적이라도 있는 듯 밀짚모자가 잘 어울린다는 사소한 칭찬을 해주었을 뿐
이었다. 나 또한 호들갑 떠는 일 없이 평소와 같은 인사를 건넸다.
"여"
"....."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군. 사시사철 날 일관적으로 대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기쁠 따름이다.
이바라가 자연스럽게 사토시의 안장 뒷부분에 앉고 나서야 다시금 페달에 힘이 가해졌다. 마를 틈 없이 흐르던 땀은 그제서야 시원함을 만들어 주는
촉매가 되어 젖은 정도에 비례한 시원함을 가져다 주었다.
아아... 그럭저럭 버틸만한데.
잠시 동안의 청량감을 즐기면서 페달을 밟고 나니 어느샌가 학교에 도착해 있었다. 날씨는 다른 이들이 보기엔 그야말로 놀기에 화창한 날씨였지만 운동장엔 뛰어노는 사람 하나 없는 게 마치 메마른 사막을 연상케 할 정도의 삭막함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치쨩이 왜 우리를 부른지 알고 있어?"
"글쎄..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만 했었어"
기억을 못 하고 있었기에 다소 지탄 받을 거라 생각했지만 다행히 둘도 자세한 이유는 듣지 못 했었던 모양이다.
"일단 만나 보면 알겠지"
그렇기에 자신감 있게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나는 맨 먼저 부실의 문을 열며 치탄다가 있는 지를 없는 지를 확인하려 했다. 마저 못 읽은 문고본을 부실에 두고 왔었기 때문에 아른 치탄다가 아직 오지 않았다면 오기 전 까지 얌전히 문고본을 읽고 싶은 마음이 조금 있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오레키씨"
...이 또한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군. 치탄다는 자신의 지정석에 자리를 잡은 채 날 비롯한 고전부의 부원들을 공손히 맞이해 주었다. 하기사 부장이 부원
들을 불러놓고서 자리에 먼저 도착해 있지 않는 것도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그래도 치탄다가 먼저 있어서 다행인 점은 이미 창문이 열려 있어 환기가
되어 있다는 점이었고 덕분에 우리는 별다른 불쾌함을 느끼지 않고 부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앗 마야카씨, 그 옷 정말 어울려요!"
"치쨩이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 다행이야.. 사실 입는 걸 좀 망설였거든"
"마야카씨는 오히려 이런 옷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자주 입어주세요 후훗"
예상대로 마야카의 옷차림에 가장 큰 반응을 보인 것은 치탄다였다. 마야카 또한 치탄다의 반응에 수줍어하는 반응을 보였다. 옷이 달라서 그런지 왠지 더 소녀답다고 느껴진다. 옷이 날개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이후 잠시 동안 방학 도중에 있었던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나누고 나서야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려 했다. 치탄다는 나름 기합을 주려는 듯 헛기침을 하며 부원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향하게끔 했다.
"아.. 다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모여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여러분들을 부른 이유는 이것 때문이에요"
치탄다는 품 속에서 화려한 전단지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레 전단지로 옮겨졌다.
"나츠 마츠리...?" (일본의 여름 축제)
"이게 대체 뭐냐?"
"보시다시피 시에서 개최하는 나츠 마츠리 홍보 포스터에요"
"우리가 그걸 모르는 게 아니잖아? 이게 우릴 부른 이유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야?"
"그게.. 말이죠..."
치탄다는 말을 잇기를 망설였다. 말로 표현하기에 복잡한 일일 수도, 직접 이야기 하기엔 곤란한 사정이 있는 일일 수도 있었고 혹은 둘 다 해당하는 일일 수도 있었다.
"이유는 차차 듣는다 치고 간단히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말해줄 수는 없을까?"
이 때 사토시가 잘 치고 들어와 치탄다의 부담감을 덜어 주었다. 치탄다는 나와 이바라의 동의를 구하는 듯 우리의 눈을 차례차례 바라보았고 우리
또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치탄다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끔 만들어 주었다. 치탄다는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며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한 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주었다.
"올해 열릴 나츠 마츠리의 표어를 만들어 주셨으면 해요"
"....."
"....."
"...너 방금 뭐라고 한 거냐?"
"...네? 올해 있을 나츠 마츠리의 표어를 만들어 주셨으면..."
"그.러.니.까 우리가 왜 그걸 해야 하냔 말이야. 그런 건 시청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 아니던가?"
적잖은 당혹스러움을 느꼈지만 치탄다가 이런 것으로 거짓말을 할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고전부의 부원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 얘기는 사실이란 게 되는데 실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어디서 이런 일을 가지고 온 것이고 이 일을 부탁한 사람은 대체 무슨 이유로 우리에게 이런 일을 부탁한 것이고, 치탄다가 어째서 이렇게 중요한 일을 우리와 일체의 상의도 하지 않은 채 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인지... 여러가지로 생각할
점이 많아 귀찮다.
"이유는 듣지 않으셔도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치탄다는 주눅 든 목소리로 나름의 항변을 했다. 하지만 그런 변명으로 끝날 정도의 일이 아닌 건 치탄다 본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이 일을 받아들인 이유를 제쳐두고서도 따질 점은 많다고 본다. 이런 일은 대체 어디에 사는 누구한테 받은 것이고, 왜 이 정도로 중요한 일을 우리와의 상의도 없이 네 멋대로 하겠다고 승낙한 거냐?"
"오레키, 치쨩을 너무 몰아붙이지마"
"그럼 넌 지금 이 상황이 기쁘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건 아니지만... 조금 더 치쨩을 생각하면서 말해줄 수는 없는 거야?"
"그래 호타로, 치탄다에게도 사정이란 게 있는 거겠지. 이 일을 무조건 하고 싶었던 그런 사정이..."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나와 눈을 마주친 치탄다의 눈동자엔 그늘이 져 있었다. 하기사 본래 성격을 생각하면 남에게 실례를 끼치기를 정말 싫어하는 녀석이다. 마음이 편하진 않겠지.
"...미안하다"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여러분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걸요"
그렇게 우리들이 치탄다의 사과에 손사래를 치는 것으로 당장의 사태는 일단락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이 일을
하기 위해선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필요로 했다.
"말 하기 곤란한 부분이 있다면 하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때가 되면 가르쳐 줘야 할 거야. 우리도 계속 모른 채로 있을 수는 없을테니까"
그제서야 흔들리고 있던 치탄다의 눈이 초점을 되찾았다. 내게 허락을 구한 치탄다는 사토시와 이바라에게도 허락을 구하는 시선을 보냈고 사토시와 이바라도 흔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다들 정말 죄송해요... 그리고 고맙습니다..."
치탄다는 고개를 꾸벅 숙이는 것으로 자신만의 감사 표현을 보여주었다.
"....일단 이것 하나만 말씀드릴게요. 이 일은 카미야마시와 카미야마 고교가 연계된 일종의 켐페인 같은 거에요"
"어? 나한텐 그런 얘기가 오지 않았는데?"
"아마 그럴 거에요. 사적으로 부탁을 받은 거니까요. 아마 다음 주 쯤 공식적으로 시 쪽 에서 연락이 올 거라고 하네요"
총무 부위원장도 결코 낮은 위치가 아니지만 부농 치탄다가의 명예가 실질적 지위 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은 모양이었다. 사토시는 잠깐 동안 아쉬운 표정을 보이다 이내 평소의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써야 할 표어가 그 표어를 말하는 거냐?"
"네. 우리가 아는 그 표어에요"
표어란 간결하면서도 힘있는 문장을 써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름만 고전부일 뿐 작년에 문집을 낸 것 말고는 딱히 이렇다할 문학적 활동도 하지 않은 동아리한테 이런 일을 해내는 건 무리라 느껴졌다. 차라리 학교 축제의 표어를 맡는 것이라면 그나마 부담감이라도 덜 수 있었을텐데 시에서 대대적으로 개최하는 나츠 마츠리의 표어를 맡는다니,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아마 지상 최강의 누이인 오레키 토모에의 파란만장했을 고교시절에도 이런 추억거리는 없었을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대체 어느 할 일 없는 인간이 일개 고교 문학 동아리에게 이런 일을 부탁한 것일까, 솔직히 표어가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나츠 마츠리를 홍보할 팸플릿의 커버를 장식하는 것 중 하나가 표어라는 것을 생각하면 생각 없이 넘어갈 일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치탄다의 말마따나 시와 고교의 연계 켐페인이라면 그럴싸해 보이는 계획이라 생각되긴 하지만 당사자가 나 자신이다 보니 전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
쳇, 쳇, 담당 부서에 있는 사람들은 어디 단체로 휴가를 간 거냐, 아니면 뭘 잘못 먹어서 단체로 식중독이라도 걸린 거냐, 후자 쪽이라면 조금은
동정해주마.
"그런데 치탄다, 우리가 정확히 어떤 표어를 적으면 되는 거야? 축제와 관련된 거라면 아무거나 해도 괜찮은 거야?"
역시 총무 부위원장 다운 예리한 질문이다. 언젠가 사토시는 자신이 알고 있던 축제에 관한 지식을 자랑스레 나열한 적이 있었다. 그 때의 난 다
들어주기 귀찮은 나머지 뭔가 그럴싸한 일부분만을 기억 속에 남기기로 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축제를 설계할 때의 맨 처음 단계는 컨셉을 잡는
것이란 사실이었다. 카미야마제 같은 경우에도 매년 똑같은 축제를 하는 것 같아 보여도 항상 다른 컨셉을 가져왔었다고.. 사토시가 말해 주긴 했었다만... 글쎄, 내가 총무위원이 아니니 그런 세세한 느낌을 알 턱이 없지 않나. 어쨌든 축제엔 일정한 컨셉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올 해 열릴
마츠리도 어떠한 컨셉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무작정 하기 보다는 축제의 컨셉을 알고 표어를 쓰는 것이 보다 좋은 선택인 것 같았다.
"최근 들어 10 ~ 20대 층의 참여율이 저조해진 만큼 청년층의 참여를 권유하는 방식의 표어를 써달라고 그러시더라구요"
"정말? 나츠 마츠리는 왠만해선 다들 즐기는 거 아니었어?"
"뭐, 통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청년층들 중에서 오레키 같은 사람이 많다는 건 조금 두려운 얘기인 걸"
축제를 안 간다는 게 어떻게 에너지 절약주의와 연관이 된다는 말이냐, 그건 좀 웃긴다. 게다가 난 작년에 누나가 해외를 여행하던 때를 제외하고선 매년 축제에 참여했단 말이다. 물론 내가 원해서 간 게 아니라 누나의 손에 붙들려 강제로 간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맞아. 나도 작년 나츠 마츠리엔 가고 싶은 마음이 딱히 없었으니까 말이지"
"뭐?! 그럼 후쿠쨩은 나 때문에 가기도 싫은 나츠 마츠리에 억지로 간 거 였어?"
"그렇게... 되겠지?"
나로선 딱히 화를 낼 이유가 없어 보이지만 이바라의 연애관은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기' 인 것 같았다. 물론 작년의 둘은 연애를
시작하지 않았으니 번외로 쳐도 좋을 얘기 같았지만 이바라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바라는 사토시에게 솔직한 말을 해줄 것을
따지듯 당부했고 사토시는 이바라에게 사과하며 그러지 않겠다 다짐했다. 뭐, 연인끼리 싸울 수도 있기야 하다지만 여기서까지 그러는 건 좀... 눈꼴이 시린다.
"흠.. 흠.. 그럼 우리가 써야 할 표어의 주제는 청년층들의 마츠리 참여 장려, 이 정도가 되는 건가?"
"네, 맞아요"
청년층들의 나츠 마츠리 참여 장려라.. 제일 확실한 방법은 마츠리에 청년층들이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추가하면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아닌 게 아니라
거의 매년을 마츠리에 가다 보니 느낀 것이지만 나츠 마츠리는 거의 바뀐 것이 없었다. 작년 나츠 마츠리는 가지를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1년 사이에
뭐가 크게 바뀌리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은 건 당연한 사실이다. 노점에서 군것질 할 거리들을 산 뒤 그것들을 먹으면서 붕어 낚시나 불꽃놀이 구경을 하는 등 너무나도 틀에 박힌 일정이다. 뭐, 그게 나츠 마츠리의 재미라고 하면 난 할 말이 없다. 그것도 엄연한 사실이니 말이다.
"그래서, 치탄다 네가 표어로 생각한 건 뭐가 있냐. 아무래도 가장 먼저 들은 만큼 생각을 안 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아.. 그게.. 말이죠. 좀처럼 쉬운 게 아니더라구요.. 생각난 게 있어도 이걸 보고 사람들이 정말 마음에 들어해줄지도 궁금하고..."
"우리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어. 그리고 일단은 우리도 청년층이라고?"
"..그렇네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치탄다는 메고 왔던 가방에서 종이 몇장을 꺼냈다. 그냥 타이핑한 걸 출력한 종이인 줄 알았더니만 붓으로 정성스럽게 쓴 글씨를 담은 화선지가 책상 위에 펼쳐졌다. 아무래도 진심으로 기합을 넣은 모양인데. 화선지에 적힌 붓글씨엔 '충실하게 청춘을 즐겨요' 라든지 '수백년의 전통, 우리가 지켜야죠' 등등의 표어가 적혀 있었다. 소감은, 글쎄.. 나쁘다 할 정도는 아닌데.. 뭔가...
다른 녀석들도 나랑 비슷한 느낌을 받은 듯 어중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좋은 표어가 아닌가 보군요"
"아니야 치쨩, 그런 게 아니라..."
"원래 이런 일을 혼자서 해내는 건 힘들어. 같이 생각해 보면 분명 좋은 표어가 나올 거야"
"...."
사토시 녀석, 참으로 낙관적인 말을 하는군. 아마 말을 하는 본인도 저 말이 완전한 진심이라곤 여기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대충 치탄다를 달래고 난 뒤 우리는 어떤 표어를 쓸지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청춘이라는 단어는 가급적 배제하는 게 어떤가 싶어"
사토시는 총무 부위원장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수월하게 회의를 이끌어 나갔다.
"네? 청년층의 마츠리 참여를 장려하는 표어인데도요?"
"그렇기도 하지만 마츠리가 청년층들만을 위한 축제도 아니잖아. 청춘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게 중장년층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해"
"그렇게 되면 표어의 전달력에 힘이 실리지 않을 수도 있어"
이바라의 날카로운 직언은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사토시는 잠시 생각하더니 나름의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마음의 청춘' 같은 정신적인, 마음가짐 면의 청춘을 언급하는 건 어떨까? 그렇다면 청년층에게 어필을 하면서도 중장년층을 무시하지 않을 수 있을 거야. 치탄다는 어떻게 생각해?"
그렇게 말하면서 사토시는 치탄다의 의견을 물었다. 아무래도 고전부의 부장은 치탄다이니 말이다. 진행은 자신이 하되 마지막 결정은 언제나 치탄다가 내릴 수도 있도록 사토시는 당연하면서도 세심한 배려를 보였다.
"잠깐, 나도 청춘이란 단어는 쓰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뜻밖의 인물이 의견을 제시한 탓인지 다들 희한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왜, 뭐, 난 의견도 제시 못 하나.
"오레키씨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다른 게 아니라 진부해. 그리고 알다시피 우리 같은 청년층이 진부한 것들에 대해서 제대로 된 관심을 준 적이 있나 싶다"
"그럼 오레키, 너는 청춘이란 단어 없이도 대단한 표어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보장은 없어. 하지만 일정 기간은 배제를 하고 정 생각이 안 난다면 그 때 쓰는 것도 괜찮지 싶다"
"그러고보니 물어보지 않았구나. 치탄다, 기간은 얼마나 돼?"
"아! 죄송합니다. 기간을 말씀드리지 않았네요. 기간은 오늘부터 2주일 동안이에요"
2주일이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애매한 기간이다.
"그럼 일주일 동안은 청춘이란 단어 없이 표어를 써보도록 노력해보죠. 저도 최대한 다른 사람들이 많이 봐줄만한 좋은 표어를 만들고 싶으니까요"
그렇게 치탄다의 정리로 당장은 청춘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표어를 만드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원래의 치탄다라면 확인차 다시 한번 우리들의 의견을 물어보았을 테지만 이렇게 결단력 있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후 회의는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사토시의 적극적인 주장과 그에 따른 나와 이바라의 반박 그리고 치탄다의 강단 있는 결론으로 어떤 식으로 표어를 쓸 지가 정해져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표어를 쓰는데 있어 대강의 방침이 정해졌다.
"그럼 다음 만남은 3일 뒤, 다시 부실에서 만나기로 하죠. 오늘은 첫 날이니 만큼 다들 무리하시지 말고 편하게 생각해주셨으면 해요. 저도.. 노력할게요"
첫날이니 편하게 생각하라고 하면, 끝에 날에 가선 불편하게 생각하란 건가. 어째서 이렇게 부정적이면서 비꼬는 성격을 가진지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선천적인 모양이다. 이내 모임은 해산이 되었고 하나씩 부실을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
사토시와 이바라가 나오고 난 뒤 내가 부실을 나가려고 하는 순간 치탄다가 나의 옷소매를잡아 당겼다. 나는 당혹감 가득한 눈빛으로 치탄다를 쳐다 보았다. 하지만 치탄다는 내 옷소매를 놓거나 하는 일 없이 나와 계속 눈을 맞추려 드는 것 같았다. 결국 난 치탄다의 시선에 부담을 느껴 고개를 돌리며 다른 손으로 옷소매를 잡고 있는 치탄다의 손을 살짝 뿌리쳤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거냐?"
"....아뇨, 정말 죄송해요. 더워서 잠시 정신이 이상해졌었나 봐요"
신경전을 벌이듯 나눈 시선에서 먼저 꼬리를 내린 쪽은 치탄다였다. 치탄다는 사과의 표시 겸 작별의 인사로 꾸벅 인사한 다음 부리나케 부실 밖을
빠져 나갔고 나는 반 쯤 얼이 빠진 채로 부실 안에
홀로 서 있었다.
"조금 늦었는 걸"
덕분에 사토시에게 핀잔을 듣고 말았다.
"후쿠쨩에게 고마워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이바라는 바로 집에 가는 것을 원했던 것 같았다. 여자친구가 있어도 여전히 친구를 위해주는 마음이 있다니, 사토시 이 녀석 생각 외로 의리있는 녀석이다.
"미안, 이제 출발하자고"
나는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면서 생각에 빠져 있었다. 가뜩이나 더운데 골머리를 썩히는 것이 좋을 리가 없었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부실에서 마지막으로 보여준 치탄다의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었다. 일단 더위를 먹었다는 말 부터가 통풍이 잘 되어 선선한 부실 안에 있었던 치탄다에겐 성립할 수가 없는, 거짓말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째서 날 붙잡았다가 이내 그것을 포기한 건지 여러가지로 의심스러운 곳이 많았다.
"그나저나 호타로, 너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생각되는데.."
"뭐가"
"의견 제시 말이야"
"아,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겠네. 얘기하자면 길어"
확실히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 쓸데없는 수고를 늘리는 것은 에너지 절약주의와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하지만 그 보다도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누나가 거의 매년 빼먹지 않고 날 마츠리에 데려갔거든. 올해도 그럴 테고 말이야. 누나가 볼 마츠리 팜플렛에 우리가 쓸 표어가 있다는 게 두려웠을 뿐이야"
"그 정도 이유는 약하지 않나?"
"모르는 소리. 누나가 고전부 선배였다는 걸 말해줬을텐데. 그만큼 누나는 활자에 민감하단 말이다. 예전엔 표어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시청에 항
의 전화를 넣었을 정도라고"
이렇게까지 자세한 전말을 말해주니 이바라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사토시는 호탕하게 웃으며 역시 호타로의 누나 답다는 헛소리를 지껄일 뿐이었
다. 직접 당해본다면 저런 웃음은 절대 함부로 짓지 못 할 것이다.
"웃어 넘길 일이 아니라고. 만에 하나 우리가 쓴 표어가 수준 이하라면 한바탕 난리가 벌어질 거다"
"...무서운 분이시구나"
"그래도 덕분에 더더욱 해야 할 마음이 생기는 걸"
이렇게까지 말해줬는데도 긍정적인 전망을 바라보고 있다니, 사토시도 1년 사이 많이 변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의식 적으로 사토시를 바라보던 순간 사토시는 내 시선을 의식한듯 고개를 내 쪽으로 잠깐 돌리더니 짓궃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익살스런 녀석인 건 맞는 사실이지만 뭔가 허를 찔린 느낌이 든 듯 나는 당황한 나머지 페달을 헛밟아 땅바닥에 구를 뻔 했다. 뭐야 저 녀석, 언제 저렇게 소년 만화 스러워 진 거냐.
"....."
하여튼 간에 생각할 것 들이 너무 많다. 당장 녹아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에 뇌가 과부하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고민거리들을 담고 있으려니 정신이 아찔해질 것만 같았다. 일단은 페달을 열심히 젓는 것만 생각하자. 나머지 생각들은 집에 도착하고 나서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 같다.
2.
생각만 하며 지내기엔 3일이란 기간은 짧은 것 같았다. 나 답지 않게 필수적인 생활양식을 할 때를 제외하고선 하염없이 생각에 빠져 있었다.
적어도 누나의 기준에 턱걸이로 들 수 있는 수준의 표어를 써내야만 했는데 그 기준이란 게 원체 까다롭기 그지 없었다. 때문에 좀처럼 좋은 표어가
떠오르지 않았고 간혹 떠오르다 했더라도 '청춘'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어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날은 표어를 생각하는 데에 지쳐
깊은 잠에 빠져 버리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가다 보니 2차 회의 당일이 되어서도 마땅한 표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아무렇게나 휘갈긴
표어라도 들고 갈까 했지만 왠지 그러는 게 더욱 모양이 빠지는 것 같아 결국엔 아무런 결과물도 없이 학교로 향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오레키씨"
역시나 부실에 맨 처음 있는 것은 고전부의 부장인 치탄다였다. 치탄다는 평소와 다르게 머리를 포니테일 형식으로 묶고 있었고 몇일 전 이바라가 입었던 것과 유사한 느낌의 하늘색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있어 평소에 느껴지던 청순함을 보다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진전은 있으셨나요?"
"미안하다. 좋은 게 좀처럼 생각이 안나더라"
"아니에요. 저라고 해서 그렇게 많이 진전이 있었던 건 아닌 걸요"
이 대화를 끝으로 나와 치탄다 사이엔 침묵이 감돌았다. 아무래도 나나 치탄다나 몇일 전 부실에서 있었던 그 일을 의식하는 모양이었다. 치탄다는 대체 나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지금에라도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까 했지만 이내 사토시와 이바라가 부실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후쿠베씨, 마야카씨"
치탄다는 어김없이 공손한 태도로 사토시와 이바라를 맞이했고 사토시와 이바라 또한 웃음으로 치탄다를 반겨주었다.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해 볼까요?"
그렇게 치탄다의 산뜻한 한마디로 두번째 회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회의 분위기는 산뜻하지 못 했다. 다들 마땅한 표어를 생각해내지 못 했는지 약간은 의기소침한 모습들이 주류였으며 이바라는 정말 많은 고민을 한 듯 수척한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고 사토시 또한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지만 연신 하품을 하는 것을 보아 밤을 지샌 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예전과 다를 게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라고 노력을 안 한게 아니라지만... 이왕이면 티가 날 정도로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그런 노력에 비해 결과물들은 전부 좋지 않은 편이었다. 나는 아예 만들어낸 표어가 없었고 치탄다, 사토시, 이바라 전부 만들어낸 표어가 많지 않았을
뿐더러 딱히 촌철살인의 느낌은 들지 않는 표어들 뿐이었다. 물론 그거야 오레키 토모에란 비범한 인물을 의식하는 나의 입장에서나 그런 것이었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세명이 만든 표어들은 고개를 끄덕거릴 수준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
저... 죄송하지만 이 표어들은 차선책으로 생각해 두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요?"
하지만 치탄다의 반응은 나와 똑같았다. 객관적인 입장에선 괜찮다고 봐도 좋을 표어들이 2군으로 밀려나자 사토시와 이바라는 난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헬쑥해져 가면서, 밤을 지새면서 까지 만든 표어가 거의 반 쯤 퇴짜를 맞았다는 게 좋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그래도 사토시는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돌연 특유의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바뀌더니 괜찮다는 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좀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르지만 뭔가 낯설다. 치탄다는 타인을 배려하지 않은 채 (평소의 그녀에 비해) 자신의 주관을 강단 있게 밀고 나갔고 사토시는 예전 보다 더욱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일에 매진하는 것 같았다.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니 너무 지나치게 믿진 않겠지만 벌써 1년이란 시간을 지내면서 대략적인 분위기를 알고 있는 터라 낯설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략적인 회의가 진행되었고 다시 한번 마땅한 표어가 정해지지 않은 채 회의가 흐지부지 끝나려 하고 있었다.
"저.. 잠시만요. 또다른 부탁을 하나 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치탄다의 말이 모두를 얼어붙게 했다. 이바라는 난색을 표하고 있었고 사토시 또한 억지로 올린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니 나의 표정 또한 오죽 우거지상이겠는가. 치탄다는 내 표정을 보고선 흠칫 놀라더니 금새 말을 이어갔다.
"
아... 표어 만들기와 관련된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뭐냐 하면..."
"단순한 바캉스지"
문 쪽에서 갑자기 들려온 낯선 음성에 모두의 고개가 문 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엔 사토시가 주장하는 카미야마시의 4대 명가에 못지 않은 병원 가문의 아가씨이자 지난 해 2학년 F반의 영화 제작을 감독했던 이리스 후유미가 서 있었다. 옷차림은 작년에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하복을 입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학교 운영과 관련된 일로 학교에 온 듯 싶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그래, 후쿠베군"
맨 먼저 반응한 것은 사토시였다. 사토시는 앞으로 나가 재빠르게 인사를 한 다음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이리스도 그 사이 사토시를 알게 되었는지 바로 이름을 불러주며 악수를 받아주었다. 역시 총무 부위원장 쯤 되니 무시받는 일은 없는 것 같다. 근데 그것 보다 사토시를 바라보는 이바라의 시선이 따갑다. 선배기도 하지만 엄연한 이성인데 여자친구 앞에서 저렇게까지 구는 걸 보니 그 사실을 간과한 모양이다. 사토시 녀석 조금 있다가 해명하느라 고생 좀 하겠군.
"안녕하세요 이리스 선배"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이바라는 아무래도 사토시가 오해의 소지가 있게 행동했던 나머지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지 못 했지만 이리스는 그런 것 따위 안중에도 두지 않고 넘어갔다. 내 인사도 그렇게 성의가 느껴지는 편이 아니었다만 그것 또한 무시하고 넘어갔다.
"치탄다, 설명을"
"네"
치탄다 옆에 선 이리스는 치탄다와 짤막한 대화를 주고 받은 뒤 창가로 물러났다.
"다름이 아니라 이리스 선배께서 작년의 일로 큰 신세를 졌다고 저희에게 2박 3일로 이리스가의 별장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셨어요"
"별장을?"
"네, 별장을요"
별장이라, 한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느낌은 궁금하긴 하다만 별장 같은 곳은 흔히들 바닷가와 인접해 있는 경우가 많은데... 난 물놀이는 번거로워서 싫어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집에 일이 있다는 식으로 거절을 하는 게 편할 것 같은...
"치쨩, 바쁜데 별장 같은 곳에 놀러갈 여유가 있을까?"
"아, 그 점 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처음에는 이리스 선배의 보답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별장 같은 곳에서 쉬면서 표어에 대한 생각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렇게 말을 해버리면 거절할 염치가 생기질 않는다. 결국 나를 비롯한 고전부의 부원 전원이 내일 당장 이리스가의 별장으로 2박 3일 간의 휴가를 떠나게 됐고 당장에 2박 3일 동안 우리가 쓸 용품들을 사기 위해 인근 마트에 가기로 했다.
"그나저나 선배,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상황이 마무리 되고 이리스가 부실을 나가려고 할 때 나는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뭐지?"
"왜 이제와서 저희에게 이런 보답을 하는 것이죠?"
"....!"
치탄다가 이리스를 대신해 무언가 답을 해줄려고 했지만 그것을 이리스가 제지했다. 이리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간략한 답을 내놓았다.
"마침 여름이 되어서 작년의 일이 떠올랐고, 내가 그 당시의 일에 대해 확실한 보답을 해주지 못 했다는 게 생각이 났을 뿐이야"
"그 말씀은 이 일을 빌미로 저희에게 또다른 부탁을 하시지 않으시겠다는 의미인 것이겠죠?"
"그럴 일은 없으니 안심해도 좋아"
주제넘고 외람되는 말인 것을 알지만 두번이나 이용되는 것은 정말 싫었기 때문에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다. 허나 이리스는 불쾌하다는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차분한 답을 내놓았기에 오히려 내가 속좁은 녀석이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
"정말 철두철미하구나"
"....죄송합니다"
그녀는 오늘 처음으로 웃으면서 부실을 떠났다. 이리스가 떠나자 모두들 긴장이 풀린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작년에 이리스 선배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일은 무슨, 또 영화 봐달라고 할까봐 한 소리다"
난 사토시의 질문을 대강 넘겼다. 작년의 일은 떠올릴 때 마다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에 이리스와 단 둘이서 나눴던 대화는 가급적 다른 사람이 알고 싶지 않았으면 했다.
"오레키씨, 이리스 선배는 좋은 분이에요"
"...나도 알고 있어. 이상한 소리 해서 미안하다"
치탄다도 이 부분에 있어선 따끔한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나한테야 안 좋은 인상을 남기긴 했지만 치탄다에게 있어 이리스는 친절하고 좋은 학교 선배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치탄다가 이리스의 차가운 속 마음을 느껴본다면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있을 지가 궁금할 따름이다.
"일단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님에게 말씀을 드리고 뭘 살지 생각해 가지고 오죠"
치탄다는 부실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켰다. 현재 시각은 오후 2시, 재집결 시간은 오후 5시였고 장소는 편의를 위해 대형마트로 가고 싶긴 했지만 식재
료를 보는 눈이 높은 치탄다의 주장에 의해 싼 값에 질 좋은 농산물들을 구할 수 있는 시장 골목 쪽으로 정해졌다. 내일 멀리 떠날 생각만 하더라도 아찔할 지경인데 시장 골목을 들쑤시게 되다니, 정말 올해 여름은 최악의 에너지 효율을 보이고 있는 것만 같다.
3.
오전 8시, 누나가 조깅을 하고 있을 동안 몰래 집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현관문을 여는 순간 조깅을 끝마치고 돌아온 누나랑 맞닥뜨리고 말았다. 누나의 성격 상 코스를 줄였을 리는 없고 평소 보다 빠른 속도로 뛰었던 모양이다.
"이 이른 시간에 어딜 가려는 거야?"
"내가 어제 여행 간다고 말했었잖아"
"아~! 그거 진짜였어? 난 또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내가 뭣하러 거짓말을 하는데"
그러자 누나는 묘하게 기분이 나빠질 정도로 박장대소를 하더니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만날 에너지 손실율을 따지던 동생 녀석이 스스로 밖에 나오다니 놀랄 수 밖에. 오늘 해는 분명 동쪽에서 떴었는데.."
"나도 가고 싶어서 가는 건 아니야"
"그럼 그렇지. 그래도 거절하지 않았다는 건 약간은 가고 싶었단 마음도 있었단 얘기 아니야?"
"....갈게. 어머니 아버지한테도 말씀 드렸으니까 따로 얘기할 필요 없어"
"도망치는 버릇은 버리는 게 좋아"
누나의 말을 무시하며 문을 닫는 순간 누나는 내게 후벼파는 듯한 말을 던졌다. 나는 그 말에 대해 항변을 하려 했지만 이미 문 손잡이를 놓아버린 뒤였
기 때문에 문은 금새 닫혀 버리고 말았다.
"...."
난 문을 잠깐 바라본 뒤 약속 장소인 카미야마 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오레키씨, 안녕하세요"
약속시간인 8시 30분이 될려면 아직 10분이나 넘게 남아 있었기에 역에 도착할 때 즈음엔 내가 맨 먼저 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역시 치탄다는 누구를 기다리는데 이골이 난 녀석인 것 같았다. 치탄다는 당황한 내 모습도 고려하지 않은 채 항상 그래왔듯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대체 언제부터 나와있던 거냐?"
이쯤 되면 이런 질문을 안 할 수가 없다.
"별장에 간다고 하니 잠이 잘 오지 않아서요... 이른 시간부터 준비하다 보니 빠르게 도착한 것 같네요"
"...그러냐"
준비를 끝마쳤으면 집에서 쉬다가 때 맞춰 갈 수도 있지 않냐는 말을 할까 했지만 그게 치탄다의 본 성격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수긍했다.
"...."
"...."
그것 보다는 지금의 침묵이 더욱 신경이 쓰인다. 딱히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나와 치탄다는 어색하게 겉돌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치탄다는 내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 했지만 주저하는 듯 했고 나 또한 치탄다가 말하려는 것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더욱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먼저 다가가려 하진 않았다. 물론 치탄다가 다가와 준다면 응해 줄 것이다.
언제나 그래왔듯.
결국 나와 치탄다는 인사 외의 대화도 나누지 못 했다. 잠시 후 사토시와 이바라가 나타나고 나서야 어색했던 침묵이 깨졌다.
"오레키,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이렇게 일찍 온 거야?"
"그냥 일찍 일어난 것 뿐이다"
어쩌다 보니 치탄다와 비슷한 대답을 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표는 어떻게 됐어?"
"예, 이리스 선배께서 표 까지 전부 예매해 주셨더라구요"
표 까지 예매해 줬을 줄이야, 정말로 그 때의 일을 보답하려는 의미에서 그런 건가. 그녀의 선의란 것을 온전하게 느껴본 적이 없어서 당최 그녀의 의중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보니 치쨩, 이리스 선배의 별장이 어디 있다고 했었어?"
"시라하마에 있다고 말씀 하셨어요. 별장의 위치는 약도로 표시해 주셨으니 길 잃은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티비에서나 몇번 봤던 유명 휴양 도시를 직접 가본다 생각하니 조금은 흥이 돋는다. 그나저나 듣기로선 그런 곳은 땅값이 장난 아니게 높다고 하던데 별장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라니, 사토시의 말마따나 정말 가문의 위상이란 게 있기는 있구나 싶다.
"그럼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기차를 기다리러 가보죠"
치탄다의 통솔 하에 우리는 플랫폼 안으로 들어가 기차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기차가 도착할 동안 우리들은 플랫폼에 있는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치탄다와 나도 몇몇 이야기를 나누긴 했으나 긴 대화로 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잠시 후 기차가 도착하고 나서야 대화는 끝이 났다. 우리
는 기차에 올라탄 뒤 치탄다를 뒤따라서 좌석을 찾아 갔다.
"와...!"
환호성을 지른 것은 이바라 뿐이었지만 나를 포함한 모두가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요즘 기차도 많은 변화가 이루어 졌다고 하더니만 칸도 따로 나뉜
고급스런 좌석이 있다는 건 듣도 보도 못 했다. 치탄다 마저도 이것은 예상하지 못 했는지 아직도 놀람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일단은 좋은 자리를 마다할 리는 없으니 앉겠다만... 과도한 호의가 부담이 된다는 걸 모를 사람이 아닐텐데...
"치쨩, 이리스 선배... 한테서 다른 일 부탁받은 거 없어?"
너무 큰 보답을 받으니 자연스레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바라가 내가 하려 했던 말을 대신 했기에 난 잠자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로 없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이리스 선배한테는... 다녀오고 나서 감사 인사라도 하러 가야 겠네요"
"일단 표를 무를 수도 없으니 앉아 있는 게 어떨까? 이왕 이렇게 된 거 확실히 즐기자구"
치탄다 마저도 예상하지 못 한 호사에 당황스러워 하고 있는 걸 사토시가 다잡아줌으로서 안정을 시켰다. 하지만 치탄다의 본래 성격이 그렇듯 자리에 앉은 치탄다는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것 같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좀 편하게 앉아 있어"
"아.. 네.."
나라고 마음이 완전 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좌불안석인 치탄다를 보고 있자니 한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치탄다는 그제서야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한결 편한 자세로 자리를 잡았다. 그녀에게 이런 배려의 결과를 예견하고 있었냐 물어보면 그녀는 예전과 같은 무감정한 얼굴로 아니라 대답할 것이 뻔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소파의 허리를 뒤로 젖혀 푹신한 매트리스를 느끼고 있으면... 잠이 온다.
"....."
확실히... 어제 여행 준비한답시고 늦게 자긴 했었지.
그렇게 몇시간이나 흘렀을까
"오레키, 이런 곳에서 까지 네 게으름을 표출해야 겠어?"
"그 쯤 해둬 마야카, 호타로가 낭만을 즐기는 방법은 그런 거야"
"오레키씨 사과 한 조각 드실래요?"
이바라는 잠에서 깬 나를 질책했고 사토시는 날 옹호해주는 것 같으면서도 우회적으로 놀리고 있었다. 그리고 치탄다는 예쁘게 깎은 사과 하나를 꼽은 이쑤시개를 나한테 건네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언제나 느껴왔던 고전부의 분위기였다. 나도 그제서야 제대로 된 편안함을 느끼며 긴장이 풀린 듯한
얇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 고맙다"
치탄다가 건넨 사과를 받았다. 그럼 나도 평소처럼 가져온 문고본이나 좀 읽어 보실까, 아 그 전에 바깥 풍경이나 봐두자. 좀처럼 볼 수 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4.
시라하마 시는 그 명성 만큼이나 더위 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곳으로 보였다. 괜히 일본의 하와이라 불리는 곳이 아니구나라는 걸 새삼 느꼈다. 그래도 역시 감상은 감상일 뿐....
"아직 멀었냐?"
"기다려 봐 호타로, 슬슬 보이는 것 같으니까"
"그 말만 몇번째 하는 건 줄 알아..?!"
가급적이면 볼멘소리를 안 하려고 했지만 땡볕 아래에서 1시간 가량이나 헤매고 있는데 그걸 참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싶다. 처음엔 치탄다가
자신 있게 우리를 별장으로 안내하는 듯 싶었으나 출력해온 지도가 몇년 전의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즈음 길이 지도랑 달라지기 시작했고 당황한
치탄다의 걸음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보다 못 한 사토시와 이바라가 각각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가고 있었으나 좀처럼 별장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정말 죄송해요.."
"아니야 치쨩, 그래도 덕분에 시라하마 구경도 할 수 있고 좋은 걸"
이바라는 풀이 죽은 치탄다를 달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바라는 내게 치탄다의 기를 복돋아 주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난 그 신호를 애써 무시했다. 지금 내 상황이 몹시 빠듯한 지라 이런 상황에서 나오는 말이 오히려 성의 없게 드려 다른 사람을 상처받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기..! 저거 아닌가?!"
잠시 후 한참을 걸은 우리는 사토시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곳엔 여러 개인주택들이 있었는데 사토시의 손가락 끝이 향한 곳은 척 보기에도 다른 개인 주택들과는 다르게 생긴 주택이었다. 사막에서 오아시를 발견한 것 마냥 모두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실례합니다.."
열쇠를 가지고 있는 치탄다가 먼저 조심스레 뜰 안으로 들어온 다음 문 앞에 섰다. 문 앞엔 이리스라 써져 있는 고급스런 명패가 붙어 있었다. 주소를 찾은 것이 확실한 상태에서 치탄다는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아보았다. 이내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생각했던 것 보다 대단한데..."
별장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사토시는 감탄을 내뱉었고 확실히 사토시의 말 대로 정말 생각한 것 이상의 별장이었다. 티비로 밖에 별장을 본 적이 없었기에 현실은 그에 못 미칠 것이라 생각했지만 딱 티비에서 봐왔던 수준이었다. 티비가 커다란 것 부터 시작해 우리 집 침대 보다도 푹신해 보이는 소파에 고급스러운 식기와 가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정말 사람은 출세를 하고 봐야 되는 것 같다.
"저녁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그 와중에 농가의 딸인 치탄다만이 고급의 향연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냉장고에 식재료들을 넣고 있었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게 좋지 않을까? 다들 별장까지 오느라 힘들었으니 말이야"
"그럼 카레가 좋겠군요. 내일 아침도 해결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고 말이에요"
카레가 그렇게 간단한 요리였던가? 어쨌든 내가 만드는 게 아니니 아무래도 괜찮을 일이긴 하다.
"오레키, 너도 도와야해"
귀신 같군.
잠시 후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에 앞서 치탄다와 이바라가 각각 다른 욕실을 사용하고 있는 동안 나와 사토시는 소파에 앉아 티비를 시청했다. 채널은 우리 집 보다도 다양했지만 정작 재밌는 프로그램을 찾지 못 해 리모컨만 계속 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뭐 적당한 표어는 생각해 봤어?"
"..뭐?"
사토시의 난데없는 질문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표어 말이야, 이렇게 쉬는 것 같아도 실은 이게 다 제대로 된 표어를 구상하기 위해서라고 치탄다가 그랬었잖아"
"그랬었나..."
"하여튼 간에 뭐 적당히 생각해 둔 거라도 있어?"
"글쎄다. 아직 그렇게 내세울만 한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래?"
뭐지 이 녀석, 묘하게 좋아하고 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왠지 너라면 적당한 표어를 생각해 뒀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런 재능은 없으니 기대하지마"
"알겠어"
"...."
미묘한 대화를 사이에 두고 나와 사토시는 눈싸움을 하듯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그 눈빛은 예전의 승부에 집작하던 시절의 사토시를 보는 듯 했다.
그 사이 이비라가 먼저 샤워를 마치고 나왔기에 난 사토시 보고 먼저 가라는 제스쳐를 취했고 사토시는 이에 응해 갈아입을 옷을 챙긴 다음 욕실로 들어갔다.
"후쿠쨩이랑 무슨 얘기 한 거야?"
"평소에 하던 얘기"
이바라는 의심스런 눈초리를 하며 나를 바라 봤지만 내 얼굴을 바라본다고 해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이바라는 아무런 대답도 얻지 못 한 채 내 얼
굴에서 시선을 떼며 젖은 머리카락의 물기를 수건으로 털어내는데 열중했다. 그렇게 이바라는 2층에 있는 여자 방으로 올라갔고 난 여전히 소파에 앉은 채 티비를 보고 있었다. 한 채널에 진득허니 머무르지 못 하고 철새 마냥 이리 갔다 저리 가기를 반복하다 재밌는 프로그램을 발견해 시청에 열중하고 있던 참에 치탄다가 또다른 욕실 밖에서 나왔다.
"오레키씨, 이제 씻으셔도 괜찮아요"
"잠시만... 기다려줘.."
"....!"
슬슬 하이라이트 부분으로 달아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놓치기가 싫었다. 하지만 치탄다는 내가 한 말을 다른 뜻으로 이해했는지 갑자기 결연한 의지를 세우기라도 한 듯 돌연 티비를 가리며 내 앞에 섰다. 풀어진 생머리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뚝뚝 떨어져 바닥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고 팔이 짧은 옷을 입느라 드러난 뽀얀 살결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딱히 외설적인 광경도 아니건만, 이상하게도 눈을 어디에 둬야 할 지를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씻으러 가봐야겠..."
"잠시만요..!"
이 상황을 이기지 못 하고 돌아서려 한 순간 치탄다의 손이 내 손을 붙잡았다.
"저.. 오레키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드디어 그 순간이 다가온 건가 싶었다. 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겸허함의 뜻으로 침을 삼키며 어떤 고생을 하게 될 지 모를 미래의 나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하려 했다.
"치쨩~! 드라이기 어디 있는지 알아?"
그 순간 2층에서 이바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
"...가봐야 하지 않아?"
"..그렇네요"
그제서야 치탄다는 머뭇거리며 내 손을 놓고 2층으로 올라갔다. 난 어느샌가 관자놀이 부근을 흐르고 있던 식은 땀을 닦아낸 뒤 갈아입을 옷을 챙기고 욕실로 들어갔다.
쏴아아
샤워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차가운 물 줄기가 머리를 비롯한 온 몸을 식혀주었다. 난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긴 다음 본격적으로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표어에 대한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다른 두 가지에 비해 큰 비중을 가지지 못 했다. 사토시는 스스로의 변화를 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본래 매사에 열심히 임하는 녀석이긴 했지만 결론은 내지 않는다는 나름의 한계선을 정한 녀석이었지만 근래에 들어선 마치 그 한계선을 없앤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방금 전 사토시가 나를 보던 도전적인 눈빛은 예전의 호승심 가득하던 사토시를 연상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치탄다가 내게 무엇을 말하려는지 또한 생각을 해봤다. 무엇인가 부탁을 하려고 하는 건 정확한 것 같았다. 치탄다와 나의 사이는 서로의 비밀을 공유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만 이야기 할 게 있다면 그것은 자신은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부탁하려고 하는 걸로 보는 게 옳았다. 지난 1년 간 난 운이 좋게도 치탄다가 해결해 주기를 원한 모든 일을 해내는데 성공해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일은 무엇일까, 내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나츠 마츠리의 표어와 관련된 일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치탄다를 제외한 부원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라곤 시와 고교의 연계 켐페인이란 게 전부 였다. 치탄다는 그 외의 부분에선 말을 해주기가 곤란하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리고 그 말을 해주기 곤란한 부분이 바로 내게 하고 싶은 부탁이고 말이다. 물론 아닐 확률도 존재하긴 했지만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가짓수를 가지고 생각을 하자면 이게 가장 정답에 가까운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을 통한 결론이 내려졌다 해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생각은 없었다. 사토시의 변화야 사토시의 일이니 참견할 필요가 없었고 치탄다의 일은 치탄다가 마음을 세운다면 내게 먼저 다가올 것이었기 때문에 굳이 내가 다가갈 필요가 없었다. 생각이 길어지다 보니 샤워를 끝마쳐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물줄기를 맞고 있었다. 생각을 마친 나는 수도꼭지를 잠근 뒤 수건으로 몸을 닦은 뒤 준비해둔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욕실 밖을 나왔다.
"읏..."
그 사이에 에어컨을 틀어놨는지 실내는 어느새 시원해져 있었고 난 몸이 마르지 않았기에 갑작스레 느껴지는 차가운 바람에 잔뜩 움츠러 들 수 밖에 없
었다.
"뭐 하고 있어 오레키, 저녁 만드는 거 도와"
이바라의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다들 식탁에 앉아 카레에 쓰일 채소 껍질을 벗겨내고 있는 중이었다.
"머리는 말려야 할 거 아니야"
난 그렇게 대꾸하며 남자 방으로 들어갔다. 드라이기는 콘센트에 그대로 꼽혀 있었고 나는 별다른 수고를 들이지 않고 머리를 말릴 수 있었다. 평소에는
대강 하고 말았지만 지금은 왠지 구석구석 말리고 싶은 느낌이 든다. 절대로 농땡이를 부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 그렇게 머리를 말리는데 평소
보다 몇분 더 많은 수고를 쏟고 방 문을 나서니 식탁에는 껍질을 까지 않은 채소 몇개가 올려져 있었다.
"그건 오레키씨 몫이에요"
치탄다의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어투에 난 별 말도 못 해본 채 식탁에 자리를 잡고 채소의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나를 지나치던 이바라는 내 모습을 보고 희미한 조소를 흘렸다. 그래, 게으른 자의 최후를 보고 마음껏 비웃어라.
그래도 채소의 껍질을 다 까는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와 사토시가 도와준 것은 딱 거기까지로 나머진 오늘의 요리사인 치탄다와 조수인 이바라의 몫이었다. 치탄다가 가스레인지 앞에서 맛을 보며 여러 조미료를 가져다 줄 것을 부탁했고 이바라는 재빠르게 그것들을 가져다 주었다. 나와 사토시는 티비를 보고 있다가 요리가 다 되었다는 치탄다의 목소리에 식기를 준비하는 등의 허드렛일을 했다.
"냄새 좋다~"
이바라의 말처럼 냄새가 정말 향기롭다. 우리는 전자레인지에 데운 즉석 밥을 접시에 담은 다음 치탄다에게로 접시를 가져갔다. 치탄다는 카레를 국자로 떠서 접시 마다 담아 주었다. 시장해서 그런지 몰라도 카레와 밥이 접시를 양분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감미롭게 보였다.
"저.. 잠시만.."
저녁 식사가 완벽하게 준비되었고 다들 숟가락을 들려던 참에 치탄다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의자에서 일어났다. 난 치탄다의 목소리 마저 의식하지 못 한 채 밥을 한 스푼 뜨려다가 이바라의 강렬한 시선에 데여 숟가락을 얌전히 내려놓고 말았다.
"모두들.. 정말 죄송하고... 고마워요. 제 독단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그 만큼 저를 믿으신다는 것이겠죠... 저도 마야카씨, 후쿠베씨, 오레키씨의 믿음에 보답을 해드리고 싶어요. 그렇기에 전... 이.. 표어를 만드는 일을 해내고 싶어요 보란 듯이.. 자랑할 수 있을 정도로..."
일종의 축사 같은 개념의 말이었는데 긴장을 한 듯 말을 제대로 이어가진 못 했지만 그 결심 만큼은 확연히 드러났다. 단순히 저녁을 즐기려던 자리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자, 치탄다"
"아..! 고맙습니다"
축사를 마친 다음에 행해지는 의례는 뻔한 것이었다. 사토시는 치탄다에게 물잔을 내밀었고 치탄다는 감사히 그것을 받았다. 나도 그 다음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기에 잔을 미리 잡고 있었다.
"고전부의 성공적인 표어 제작을 위하여.. 건배!"
"건배!"
치탄다가 높이 잔을 쳐듬과 동시에 구호를 외쳤고 우리의 목소리가 이를 뒤따랐다. 어째 표어 생각을 다시 하게 되니 식욕이 떨어지는 느낌인데.
그래도 어떻게든 몇 숟가락 입에 넣다 보니 맛에 흠뻑 빠져들어 표어 생각을 잠시나마 잊게 되었다. 누나한테는 조금 미안한 소리긴 하지만 치탄다의 카레는 확실히 누나가 만든 것 보다 대단한 맛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내가 먼저 접시를 비웠고 사토시와 이바라가 그 순서를 이었다. 치탄다는 어릴 때 배웠었던 '음식은 꼭꼭' 이란 구호를 여전히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저녁을 만드는 것은 치탄다와 이바라가 주로 했으니 설거지는 나와 사토시가 하는 것이 옳은 듯 했다. 나와 사토시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수세미에 세제를 묻힌 뒤 식기를 뒤척이기 시작했다.
"다 먹으면 놓고 가"
"예, 고맙습니다"
잠깐 동안 나와 사토시가 식기를 뒤척이는 소리와 치탄다가 숟가락질을 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고 치탄다가 저녁을 다 먹고 나선 나와 사토시가 식기를 뒤척이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저녁도 다 먹었는데 이제 뭐 하면서 놀까?"
"적당히 티비나 봤으면 좋겠는데"
"그럼 다 같이 온 의미가 없잖아?"
"무슨 소리냐, 다 같이서 티비 보는 게 얼마나 재밌는 일인데"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 밖에 없을 걸"
"...뭐 가져온 거라도 있냐?"
"카드?"
사토시 녀석은 퀴즈라도 내듯 말 끝에 물음표를 덧붙였다. 그래봤자 트럼프일 게 뻔한데 말이다. 이런 자리에서 가장 효율적인 카드는 아무래도 트럼프
카드일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카드 뭉치하나로 다양한 게임을 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분위기 메이킹 소도구인가. 예상대로 사토시가 가져온 트럼프 카드는 부원들의 관심을 티비에서 돌리는데 성공했다. 난 안타까운 시선으로 리모컨을 바라 보았으나 나도 게임에 참여하라는 치탄다의 이끔에 하는 수 없이 리모컨에서 시선을 떼었다.
처음에는 도둑잡기였다. 처음엔 술술 풀리는 듯 싶다가 사토시의 패에서 카드를 뽑아오는 차례에서 사토시의 포커 페이스에 말려 꽝 카드를 뽑아 버리
고 말았다. 이 때 사토시는 은근한 미소를 드러내어 내가 꽝 카드를 가지고 있다는 힌트를 모두에게 흘렸다. 난 애초에 게임의 승패에 집착을 가지지 않았기에 항상 같은 표정을 유지했지만 단순히 운이 없어 꽝 카드만을 남기고 말았다.
벌칙은 단순한 딱밤이었기 때문에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 악! 사토시 이 녀석 은근 손이 맵다. 이마를 만지면서 사토시를 노려보니 샐쭉 웃을 뿐이었다. 좋아,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난 본래 호승심이란 것이 없었지만 저렇게 약을 올린 녀석을 가만 둘 정도로 느긋한 성격도 아니었다. 그 다음 게임인 원카드에서 나와 사토시는 나름의 결전을 벌였다. 치탄다와 이바라의 존재는 크게 의식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해야 사토시 녀석의 손패를 불릴 수 있을지를 계산해 카드를 놓았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달리 오히려 내가 사토시의 노림수에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게임의 진짜 패자는 시작부터 손패가 크게 말린 치탄다였다. 모두들 신사적으로 치탄다의 이마에 때리는 시늉만 하고 나서 빠르게 다음 게임을 시작했다.
"포커 어떨까?"
사토시는 다음 게임으로 포커를 제안했다. 호불호를 떠나서, 나야 룰을 알고 있다지만 치탄다와 이바라는 룰을 모를텐데, 일단은 대개 어른들이 많이 하는 게임이니 말이다.
"집안 어른들이 가끔씩 하시는 걸 보긴 했는데... 저희가 하기엔 이르지 않을까요?"
과연 치탄다스러운 걱정이다. 하지만 사토시는 돈을 놓고 하는 일이 아니니 딱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말해주었다. 나도 그 부분은 동의했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러는 한 편으론 치탄다와 이바라가 룰을 모르는 것을 지적했다.
"그럼 예시로 몇판 보여주기식으로 해보는 게 어떨까?"
"...맘대로 해라"
그렇게 까지 하고 싶다니 받아 주는 수 밖에.
누나가 말해주기를, 포커는 운도 운이지만 상대의 표정을 읽어내는 능력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능력이 중요하다 했다. 뭐, 포커 페이스 정도야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상대방의 표정을 읽어내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방금 전 도둑잡기 게임에서 사토시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예전 같이 승리에 무조건적으로 집착하는 게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중요한 순간 마다 표정을 굳혀 차분하게 승리를 쟁취해 갔다.
"...네가 이겼다"
결국 어렴풋이 예상한 대로 나랑 사토시의 승부에서 승리를 가져간 것은 사토시가 되었다. 물론 보여주기식 게임이니 서로가 진심을 다 하진 않았을 테지만 아쉬운 느낌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오레키씨 정도라면 저도 이길 수 있겠는 걸요"
가당찮은 소리, 여기서 감정 표현에 가장 솔직한 게 누군지를 생각해 보시지.
그렇게 포커는 본 게임으로 들어갔고 몇 번의 공방 끝에 패자는 다시 한번 치탄다가 되었다. 비기너스 럭인지 몰라도 패는 비교적 잘 풀린 편이었으나 워낙 감정 표현에 충실한 나머지 매 반응을 일일이 가르쳐 주니 다른 이들이 뺄 때와 들어갈 때를 구분짓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도 치탄다는 초심자였기
에 딱히 슬퍼하는 기색 없이 담담히 패배를 받아 들였다.
"포커.. 어려운 게임이었군요"
"처음엔 원래 어려운 법이야. 자, 그럼 계속 이어서 가볼까?"
사토시의 주도 하에 몇시간이 지나도록 게임은 계속 되었으며 잘 때가 되어서야 판이 내려갔다. 사토시는 트럼프 카드르 곽에 넣은 다음 어울려줘서 고맙단 말과 잘 자란 말을 (이 때 이바라와 깊은 눈빛을 나누었다) 같이 한 다음 나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벌써 자는 거냐?"
"내일이면 바다에 나가서 놀텐데 일찍 자는 게 좋지 않겠어?"
"내가 그런 걸 좋아할 성 싶냐?"
"그리고 결정적으로 호타로 네가 지금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잖아? 할 일 없으면 자는 게 제일 좋아"
"....맞는 말이다"
사토시의 말에 동의하며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누웠다. 침대는 2인용이라 사토시와 한 침대를 같이 써야 했는데 이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워낙 피곤했던 모양인지 잠은 금방 쏟아졌고 침대에 누운지 몇분도 채 되지 않아 눈꺼풀 셧터가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기 호타로"
"....뭐"
사토시의 부름에 놓을락 말락하고 있던 정신을 붙잡았다. 바깥 쪽으로 누워 있었기에 사토시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지는 알 수 가 없었지만 아마 사토시도 나처럼 바깥 쪽으로 누워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내가 바뀌었다던가 하는 느낌이 든 적 있어?"
"...몇번 있긴 하다만"
"헤.. 그렇구나"
사토시는 기분 좋게 코웃음을 흘렸다.
"역시 너라면 눈치챌 줄 알았어"
"....무슨 이유 때문에 바뀌기로 한 거냐?"
다른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계기가 사토시를 변화시켜 가고 있는 지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내가 예전에 말했었지 호타로. 데이터 베이스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고"
"그랬었지"
"난... 그게 일종의 도피였다고 생각해. 그저 실패할 내 자신의 모습이 두려워 일부러 한발짝 떨어져 구경꾼이 되고 싶어 했어"
짧게 끝날 말이 아닐 것 같았기에 호응해주는 소리 없이 잠자코 사토시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러 일 들을 겪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어. 일단.. 호타로 네가 여러 사건들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욕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 한 걸 깨닫게 된 거야. 그리고... 올 해 마야카에게 일어났던 일이 결정적이었어"
"...만연부 일 말이냐"
"맞아. 마야카는 그저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을 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는 얘기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 마야카는 만연부에 늘 혼자였었고 그것
때문에 계속 아파했어. 마야카가 만연부를 나오게 된 이유에는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던 것도 있을지 모르지만 일방적인 괴롭힘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생각해"
"....총무 부위원장으로서 손 쓸 방법이 없었던 거냐?"
"그건 월권 행위인 걸. 게다가... 마땅한 물증도 없었어. 괜히 내가 나서봤자 마야카만 더 곤란했을 거야"
"그럼 너 이바라를...."
고작 그런 이유로 이바라의 마음을 받아들인 것이라면 이바라 본인이 아닌 나일지라도 약간은 화가 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사토시는 내가 하려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는 듯 부인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마야카를 받아들이는 건 오히려 마야카를 비참하게 만들 뿐이야. 나라고 고민을 안 한 게 아닌 걸"
사토시는 생각을 정리하는 듯 약간의 뜸을 들였다.
"솔직히 마야카를 동정하기도 한 건 사실이야. 나 마저도 계속 마야카의 마음을 피해 다닌다면 그건 마야카에게 큰 슬픔이 될 것 같았어.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도망쳐 봤자 남는 건 아쉬움과 슬픔 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야. 그래서 더 이상... 마야카의 사랑을 피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어.
난 더 이상 마야카의 마음을 부담스러워 하지 않아. 마야카를 정말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리고 호타로, 난 이제 더 이상 결론을 내리는 걸 너한테 맡기지 않을 거야"
"예전의 너로 돌아가겠다는 거냐?"
"단지 열의를 올리겠다는 것 뿐이야. 집착하지는 않아"
"....."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진심을 터놓고 이야기하니 왠지 모르게 낯이 간지러웠다. 난 이불을 끌어당긴 다음 최대한 자보려는 노력을 했다. 사토시도 나와 비슷한 마음인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은 채 조용히 누워 있을 뿐이었다.
5.
마음 속에 달아놓았던 기우 인형이 무색하게 역시나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맘 같아선 에어컨 바람이나 쏘이면서 별장 안에 틀어박혀 있고 싶었지만 다른 부원들이 그걸 곱게 지켜봐 줄리가 만무했다. 나는 결국 수영복 한 벌을 챙겨들고선 뜨거운 모래사장으로 끌려나오게 됐다. 아직 정오도
지나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제법 많은 편이었다. 이게 관광 명소란 거겠지.
"저기 들어갈 생각만 해도 시원하지 않나요?"
"더워..."
미안하지만 생각하는 것 만으로는 시원해지지 않아.
"그럼 갈아입고 이 곳에서 다시 만나죠"
해변 앞에 마련된 샤워실의 남/녀로 갈라진 탈의실로 부원들은 갈라졌다. 나와 사토시는 수영복으로 갈아 입으면서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어제 나눈 대화에서 딱히 날을 세우거나 한 것은 없었지만 묘한 긴장감이 형성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걸로 정말 표어를 잘 쓸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하냐?"
난 침묵을 깨기 위해 대충 생각나는 말을 던져 보았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도 있잖아?"
"그 건강한 정신으로 해결 할 수 있으면 다행이겠군"
"뭐, 적어도 집에 쳐박혀 더위에 찌들어 있는 것 보다야 낫겠지"
찌릿.
"아니 아니 뭐, 그거야 개인 차이긴 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그렇다는 거지"
"됐어. 다 입었으면 나가자"
나와 사토시는 서로를 보며 피식 웃은 다음 탈의실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만담 비스무리한 이야기가 통하는 걸 보면 하룻밤 사이에 내가 아는 사토시가 사라진 게 아니란 걸 확인했다. 그렇게 몇분 간을 더 떠드면서 치탄다와 이바라를 기다렸다.
"먼저 나와 계셨군요..! 저희가 좀 늦었나요?"
"...딱히"
수영복일 뿐인데 왜인지 모르게 또 눈을 어디다 둬야 할 지를 모르겠다. 치탄다와 이바라의 수영복 차림은 그제서야 이 둘도 이성이라는 것을 자각시켜 주는 것 같았다. 특히 이바라 같은 경우는 사랑에 빠지면 예뻐진다는 속설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할 정도로 여성스러워 보였다. 갑자기 사토시 녀석에게
이바라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저희도 이제 가볼까요?"
뭔가 놀기를 결심한 여고생치고는 참으로 공손한 말투다. 어쨌든 치탄다의 말을 시작으로 다들 모래사장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든 다음 푸르디 푸른 바다로 뛰어들었다. 나? 적당한 곳에 대여한 파라솔을 꼽고선 돗자리를 피고 있는 중이다. 다들 더우면 물에 몸을 적시려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좋지 않은 습관이다. 이렇게 그늘을 만든 다음 누워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촤악
"호타로~! 그렇게 있으면 재미 없다고~?"
물론 이렇게 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나는 방금 전의 복수를 하기 위해 사토시를 쫓아 바다로 뛰어 들었다. 한 번 참는 걸로는 끝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당하자마자 반격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이렇게 될 걸 예상 못 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결국 육지동물 치고는 오랜 시간 동안 물에 머물러 있었다. 이바라가 가져온 고무공으로 다 같이 공놀이를 하는 가 하면 미리 가져왔던 튜브로 부유를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햇볕을 오래받는 것도 오랜간만이었기 때문에 금새 지쳐 파라솔로 피신하고 말았다.
"그러고보니 벌써 점심 때 네요"
옆에 있던 치탄다가 모래 묻은 손을 털고 핸드폰을 조심스럽게 만지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그런 참인가 하는 사이 배꼽시계가 울리는 바람에 치탄다의 웃음을 자아내고 말았다. 정말 사람의 몸은 정확하단 말이야.
"저희끼리 점심 거리라도 사올까요?"
"...그러는 게 좋겠다"
사토시와 이바라는 그 또래의 커플답게 제법 눈꼴시린 작태를 부리고 있었고 치탄다는 그것을 매우 반짝이는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나야 뭐
평소의 그 눈빛으로, 그래도 지금 둘 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난 치탄다의 뒤를 따라 노점이 즐비한 시장가로
향했다.
"오레키씨, 왜 제 옆에서 걷지 않고 뒤에서 걸으시고 계세요?"
"...네 그림자에 있으면 햇빛을 덜 받아서 그래"
"그런가요? 제가 그렇게 크단 생각은 안 해봤는데..."
역시 사람의 말을 너무 정직하게 받아 들인다. 굳이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하자면... 주제 넘을지도 모르지만 연인으로 오해받기 싫어서? 주위에 아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 부류의 오해는 낯이 간지러워서 싫어하는 편이다.
"오레키씨는 뭐가 드시고 싶나요?"
"다 맛있어 보이는데"
"사실은 저도 그래요"
"...그러면 좀 둘러보다 고르지 뭐"
딱히 선택권이 내게 있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치탄다는 이 대답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활짝 웃으면서 나를 이 곳 저 곳 으로 끌고 다녔다. 마치 대형마트 장난감 코너에 아이를 데려온 부모가 된 기분이다. 그래도 치탄다는 먹을 걸 고를 때는 돌연 주부의 모습으로 돌아와 가격과 품질을 따졌다. 심지어
흥정을 하기 까지 했는데, 난 이 장면에서 잠시 눈을 돌리고 있었다.
결국 치탄다의 부단한 노력 끝에 점심거리들을 비교적 싼 가격에 살 수 있었다. 뭐, 나쁜 건 아닌데..
"이런 관광지는 한철 장산데 너무 배려심이 없었던 거 아니냐"
"그, 그런가요? 지금이라도 원래 가격으로 드리고 올까요?"
치탄다는 그건 생각하지 못 한 듯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 보았다. 난 그런 치탄다를 제지하면서 대신 남은 돈으로 다른 걸 사자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
다. 덕분에 돌아오는 길이 덜 심심하게 나와 치탄다는 각자의 손에 돌아오는 동안 마실 생과일 주스를 들게 되었다. 난 딸기맛이었는데, 뭔가 더 여름
느낌이 나는 열대과일로 고를 껄 하는 후회를 하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잠깐만, 어째 하늘 색깔이.."
투둑 투두둑 투두두둑..
말을 하기가 무섭게 빗방울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여러 갈래로 흩어지며 비를 피하기 위해 여러 장소로 숨어 들었고 나와 치탄다 또한 문을 닫은 폐점의
처마 밑으로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이미 바다에 몸을 한번 적셨기에 굳이 비를 피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했지만 음식들은 비를 맞으면 곤란한 것들 뿐이었기도 하고 워낙 빗발이 거셌기에 함부로 비를 맞을 수가 없다는 걸 금새 깨달았다.
"이상하네요. 오늘 일기예보는 분명 맑음이었었는데.."
"뭐, 일기예보가 항상 옳은 건 아니니까"
마음 속에 달아 놓았던 기우 인형이 이제서야 효과를 발휘한 건가.
그래봤자 소나기이려니 하고 십분 정도 기다려 봤지만 빗발은 약해질 생각도 않은 채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다른 사람들
은 결국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속속들이 빗속을 뚫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계속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어느샌가 시장 상인들도 오늘 장사는 글렀다며
하나 둘 씩 점포의 문을 닫기 시작했다.
이 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나와 치탄다 이 두명으로 점점 한정 되어 가고 있었다.
"우리도 이제 그만 가는 게.."
"자, 잠시만요..!"
이런 고요한 분위기가 형성되는 게 두려워 발을 빼고 싶었지만 치탄다 또한 우리 둘 밖에 남지 않은 이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먼저 선수를 쳤다. 난 치탄다의 말을 무시하고 한발자국 앞으로 내딛었지만 치탄다가 이에 뒤따라 주스를 떨어 뜨리면서 까지 나의 손을 붙잡았기에 난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아깝지 않냐"
"...오레키씨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같잖은 농담으로 주제를 흐리려 했지만 그런 잔수작이 치탄다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나는 이제서야 치탄다의 말을 들어주었을 때가 왔음을 느끼며 치탄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눈을 마주치진 않았지만 분명 결연한 의지를 담은 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단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면 해서..."
거짓말,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면 대체 왜 그렇게 망설였던 거냐.
"...알겠으니까 이 손은 놓고 얘기해줄래"
치탄다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억지로 풀기에도 곤란한 처지였다. 치탄다는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며 죄송하다 말했고 나는 그런 치탄다에게 괜찮다 말하며 하고 싶은 얘기를 해달라 부탁했다.
"...."
치탄다는 아직까지도 마음의 준비가 덜 됐는지 입으로 짧게 숨을 내쉬고 뱉은 다음 본격적인 이야기를 할 준비를 끝마쳤다.
"나츠 마츠리의 표어에 관한 이야기를 드리고 싶어요"
일단은 예상한 대로니 고개를 끄덕.
"전.. 모두에게 표어에 관한 제대로 된 답변을 해드리지 못 했어요. 대답해 드리기 어렵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말이에요... 하지만 적어도 당장은... 오레
키씨에게 말씀 드리고 싶어요. 이 일을 어째서 맡게 되었는지..."
"이 일을 맡게 된 이유를 말하는 거냐?"
치탄다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내 질문에 대한 긍정을 표시했다.
"오레키씨, 저희가 작년 카미야마제 때 냈었던 문집의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죠?"
"기억하다마다. <빙과> 였잖냐"
작년 카미야마제 때 고전부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문집이 바로 이전 고전부 선배들이 발간했었던 문집의 이름을 빌린 <빙과>였다. 문집의 주요 이야기는 카미야마제의 또다른 이름인 '칸야제'의 유래에 대해서 였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작년 봄에 밝혀냈었던 진실이었다. 우리는 치탄다의 외숙부인 '세키타니 쥰' 그의 희생으로 지켜냈던 카미야마제를 우리는 마치 그를 조롱하는 듯한 (의도치는 않았지만) '칸야제' 라 부르고 있었고 그렇기에
'칸야제' 라는 단어의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말을 문집에 실었고 일련의 소동으로 인해 문집이 예상치 보다 몇배는 많이 팔려 생각 이상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현재에 이르러선 입소문을 타서 그런지 카미야마제를 칸야제라 부르는 학생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 작년의 일이 올해 있을 나츠 마츠리의 표어 만드는 일과 관련이 있다니 대체 무슨 얘기인 것일까.
"정말 운이 좋게도.. 저희가 발간한 문집 <빙과>의 이야기는 학교 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 까지 퍼지게 되었어요"
"우리 문집에 대한 이야기가 시청에 까지 퍼진 거냐?"
"네.. 그런 셈이죠"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계기가 문집이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 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우리한테 표어 제작 제의까지 오게 된 거냐?"
"...그게 지금부터 할 이야기에요"
치탄다는 이미 시작해버린 이야기에 다시 한번 뜸을 들였다. 이런 태도로 보아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정말 중요한 부분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세키타니 쥰.. 제 외숙부를 기억하고 계시나요?"
"...잊을 리가 없잖아"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문집 얘기가 나온 이상 그와 관련 되어 있을 거란 예상은 했다. 하지만 대체...
"시의 관광 부서의 부장이신 분이 그 당시 외숙부와 함께 하셨던 분이었어요"
당장 이 말만 들어선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치탄다는 내 얼굴을 보고선 자신의 의사가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음을 알고 다시 한번 내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 분은 그 당시 카미야마제 폐지 반대 운동의 지도부셨던 분이에요"
"....아"
이제 좀 이해가 간다. 몇십년 전 카미야마 고교는 진학에 초점을 두기 위해 카미야마제를 폐지하려 했지만 학생들의 반대는 거셌고 급기야 반대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반대 운동의 지도부는 대표로 누군가를 내세워야 했었지만 자신이 책임을 지게 될 것을 두려워해 아무도 이름을 올리
지 않았고 결국 치탄다의 외숙부인 세키타니 쥰의 이름을 빌려 그를 이름뿐인 대표로 올리게 되었다. 결국 반대 운동은 성공으로 끝이 났지만 집회를 하던 도중 옛 무도관을 불태워 버리는, 선을 넘은 행동을 저질렀고, 그렇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이름 뿐이었을 지라도 대표로 이름을 올린 그가 아무런 저항 없이 스스로 학교를 나오는 것으로 모든 일이 끝이 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뒷맛이 쓴 이야기이다. 게다가 방금 치탄다가 한 이야기는...
"부장이란 사람은 그가 네 외숙부였다는 걸 알고 있냐?"
"...예"
"그렇다면... 그 부장, 그 일에 대해서 사과를 했냐?"
".....유감스런 일이었다고 했었어요"
"너의 얼굴을 보며 직접 고개를 숙였어?"
"그 분의 얼굴을 뵌 적은 없어요. 그저 전화로..."
"그렇다면 그 부장은 왜 우리한테 이 일을 맡긴 거지?"
"원래 시와 고교의 연계 켐페인이 있을 예정이었다고 해요. 겸사겸사 과거의 일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우리에게 이 일을..."
"기만이군"
기만이다. 타인에게 사과를 할 때엔 자신의 진심이 내비쳐져야 한다. 그래야 또다른 오해를 낳지 않고 그나마 좋은 결말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경우는 오해를 낳을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 부장이란 사람이 그저 반대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이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는 그 당시 반대운동의 지도부 중 한명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그는 세키타니 쥰의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말이 되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행동이 아닌 말로서만, 그것도 유감이란 단어로 간단히 압축시켜 버렸다. 그것도 남인 사람이 아닌 친인척인 치탄다한테 말이다. 그리고선
사과랍시고 자신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를 내던졌다. 이것은 단지 그 작자의 나이와 지위를 내세운 강요에 불과한 것이었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치탄다 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일을 받아들인 거냐?"
그 작자에 대한 화를 뒤로 미루고, 당장은 눈 앞에 있는 치탄다에게 이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오레키씨... 하지만 전... 이 일을 거절 할 수 없었어요..."
치탄다는 자존심도 없냐는 뜻으로 물었던 내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다.
"저도 처음에는... 화가 났어요. 너무나도 무례한 말들 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고 나서.. 전 이 일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 분 께선 겉으로나마 일지는 몰라도 사과의 의미로 이 일을 맡기셨던 것이었으니까요. 제가 이 일을 거절하게 되면... 전 그 분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은 게 되는 거에요. 물론 진심없는 사과를 받아봤자 의미가 없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도망칠 수 없었어요. 이미 그 사건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흘러 버렸어요. 그리고 제 외숙부의 일로 사과를 하는 사람은 그 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생각해요.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어요"
가뜩이나 도망이란 단어에 민감해져 있는데 그걸 굳이 도망이라고 했어야 하나 싶다. 하지만 방금 전의 말로 치탄다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치탄다 본인의 느낌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치탄다의 외숙부, 세키타니 쥰은 치탄다에게 있어 중요한 사람 중 한명인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왔는데 그것을 거절해 버린다면 그것은 치탄다에게 큰 마음의 짐으로 남게 될 것이었다.
나는 그건 도망이 아니라 말해주며 치탄다를 위로해주려 했지만 이미 치탄다의 감정은 수용량의 한계에 다다랐는지 치탄다의 뺨을 타고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니 이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난 음식 봉지에 담겨 있던 티슈를 꺼내 치탄다에게 건네주었다.
"죄송해요... 울고 싶지 않았는데..."
울음을 그친 치탄다는 눈물 자국을 팔로 쓱쓱 닦아낸 다음 내가 건네준 티슈로 양 눈의 끝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아니, 나야말로 미안하다. 가장 힘들었던 건 너였을 텐데... 네 처지를 배려하지 못 했어"
"아니에요. 저도 오레키씨의 마음이 이해가 가는 걸요.."
그렇게 한동안의 침묵이 이어졌다. 치탄다는 시큰해진 코를 진정시키고 있었고 난 치탄다를 몰아붙인 것을 후회하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이미 비는 그쳐 있었고 먹구름들도 하나 둘 씩 사라져 그 틈을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식어버린 땅을 다시 한번 가열시키려 들었다. 난 발목에 닿은 햇살의 감촉에 고개를 돌렸다.
"이제 슬슬 가보는 게 어떨까"
"...그럴까요. 그러고보니 후쿠베씨랑 마야카씨가 기다리고 계신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네요"
"뭐, 그 둘은 걱정하고 있을 필요가 없겠지"
"그런가요 후훗"
언제 그렇게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었냐는 듯 나와 치탄다는 간단한 농담들을 주고 받으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문득문득 방금 전 나누었던 이야기를 섞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왜 나한테만 알려주는 거냐?"
"그러게요.. 이건 오레키씨에게 뭔가를 부탁하려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이젠 아예 대놓고 일꾼 취급이거냐.
"아마도.. 모두에게 가르쳐 주기엔 부담스러웠던 것 같아요. 그러니 제가 믿을 수 있는 분에게 먼저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 같아요"
읏... 내가 믿을 만한 녀석이라는 건가, 그런 말은 좀 더 생각을 하고 말하란 말이야. 쓸데없는 오해를 해버리게 된다고.
"네 마음이 편하다면 다행이다. 그런데 사토시하고 이바라한테는 말 할 생각이냐?"
"...오레키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 네가 그 둘을 믿고 있느냐에 따라 달린 얘기겠지"
"...그렇다면 지금 얘기해 드려야 겠네요"
치탄다는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눈물을 마구 흘렸던 사람이 이렇게 큰 웃음을 보여줄 수 있나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치탄다는 드디어 결심을 굳힌 듯 저기 멀리 사토시와 이바라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나보다 먼저 앞서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 또한 치탄다와
같이 속력을 맞추려고 했으나 이내 그만두며 잠자코 웃으며 치탄다의 뒤를 바라봤다. 더워서 움직이기 싫기도 했고 무엇 보다 나란히 서서 가게 되면
연인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그게 싫다.
6.
어느새 시간은 흐르고 흘러 그 날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나름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니었고 그 당시만 하더라도 꽤 자신있는 결과물이 나왔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적잖게 겁이 났다. 허나 도망갈 여지가 있을 리도 없거니와 끝까지 맞서서 결과를 확인해보고 싶다는 마음 또한
격하게 샘솟았기 때문이다. 이게 다 사토시와 치탄다 때문이다. 그 놈의 도망이 뭐길래 나까지 이렇게 됐냔 말이야.
"어때?"
유카타를 다 입고 나온 누나는 어디 패션 잡지에서나 나올 법한 포즈를 어느 정도 따라 하면서 내게 평가를 부탁했다. 뭐, 자세는 그럴싸 하다지만...
"그래봤자 제작년에 입은 거잖아"
"누가 그걸 모르니? 느낌 마저 제작년과 똑같진 않을 테니까 물어본 거잖아"
"어... 잘 어울려"
이게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찬사인 것 같다.
"그런 칭찬을 할 때는 성의있게 말하렴"
누나는 내게 핀잔을 주며 현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 또한 누나를 뒤따라 현관으로 간 뒤 바깥으로 나왔다. 여름의 끝물이라 생각했더니, 밖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들고 나온 부채가 쉴 일이 없을 정도로 더운 날씨였다. 이런 날씨에 유카타를 고집하는 누나의 집념에 감탄하며 누나의 표정을 흘겨보니
생각했던 대로 얼굴엔 웃음기가 떠나지 않았다. 역시 강적이다.
우리 집에서 나츠 마츠리가 벌어지고 있는 장소와는 제법 먼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다. 딱히 올해 마츠리와 관련된 포스터 같은 건 보지도 않았지만 십몇년 동안 바뀌지 않았던 장소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딱 하나 내가 알고 있는 정보라곤 올해 나츠 마츠리가 카미야마 고교와 연계되어 몇몇 동아리가 마츠리에서 공연이나 노점같은 것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누나에게 말을 하진 않았는데, 그렇게 되면 누나는 고전부는 하는 일이 없냐고 물어올 것이 당연했고 나는 누나 앞에서 그런 부류의 거짓말을 잘 못 하기에 그냥 그 부분에 대해선 입을
다물어 버리기로 했다.
"그러고보니 호타로, 저번에 갔던 여행은 어땠어?"
뭐, 가는 길이 먼 만큼 이 정도의 질문을 할 것이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대로 괜찮았어"
대강이 아니었다. 이건 내 진심이었다.
"밖에 나가서 놀기는 했어?"
"그럼 뭣 하러 시라하마까지 갔겠어"
"의외인 걸.."
신랄했지만 수긍이 갔다. 에너지 절약주의를 부르짖으며 집에서 뒹굴기를 즐기던 동생 녀석이 더워빠진 날시에 갑자기 먼 시라하마까지 여행을 가서 바다에 몸을 담그기까지 했다는 게 누나 입장에선 신기할 만도 했다. 내 자신도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의아했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그러고보니 그 때엔 무슨 뜻으로 한 말이었어?"
이번엔 내가 누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집을 떠났던 당일 누나가 나를 보내며 남겼던 말은 여전히 머릿 속을 멤돌고 있었다.
"뭐가 말이야?"
"...도망치는 버릇은 좋지 않다는 거 말이야"
"...."
내가 대답한 이후 한동안 누나는 말이 없었다. 아예 대답을 하지 않는 성격이 아니란 것을 알기에 이렇게까지 뜸을 들이는 것은 분명 진의를 알려주냐 감추느냐를 선택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잠시 후 누나는 내게 대답을 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수고스런 동작을 하기까지 했다.
"설거지 말이야. 네가 먹은 건 네가 해야지"
"...알겠어"
결국 누나는 진의를 감추는 것을 선택했고 나는 그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어차피 알아봐야 골머리만 썩힐 그런 주제일 것 같다는 쪽으로 생각을 해버리는 게 편할 것 같았다. 도망치지 않는다라... 이 의문을 해결하지 않는 채로 두는 것도 도망이라 해야할까, 나는 잘 모르겠다. 애초에 도망을 쳐서 남는
게 그런 부정적인 잔재물 밖에 없는 것일까.
그나저나 그런 것까지 생각해낸 게 대단할 따름이다. 내가 먹은 거 설거지 안 하는 게 사실이긴 하니 말이다.
그 이후 나와 누나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로 한창 나츠 마츠리가 진행되고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느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는 게
정말 세월을 무시한 느낌이 신기하게 다가왔다. 딱히 달라진 점을 꼽자면 내 또래가 많이 보인다는 것 정도? 아마 마츠리에 참여하는 동아리에 있는
녀석들이 친구들을 부른 모양인 것 같았다. 그렇게 보면 시의 목표는 어느 정도 이루어진 셈이었다. 나름 혜안이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걸까.
"어디 가?"
"안내 데스크"
"....!"
한동안의 운명을 결정지을 순간이 다가왔다. 온갖 볼거리와 먹을거리들은 마츠리에 막 도착한 누나의 오감을 자극하지 못 했다. 항상 그래왔듯 누나는 먼저 안내 데스크로 가 홍보 팜플렛을 뽑아왔다. 어렸을 때 부터 그 이유가 궁금했었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누나는 표어 하나만으로
그 해의 나츠 마츠리를 평가하는 것 같았다.
"....."
드디어 누나의 두 눈이 팜플렛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난 시라하마를 다녀온 이후 사토시와 치탄다에게서 받은 느낌으로 현재의 표어의 초안을 내놓았고 만장일치로 내 표어가 초안으로 받아 들여졌다.
사토시는 자신이 생각한 표어가 초안으로 받아 들여지지 않은 것을 아쉬워 했지만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표어를 다듬는 것에 참여하면서 정말 예전의 녀석이 아님을 실감케 했다. 표어의 초안을 낼 때 이바라의 눈치를 보긴 했지만 이바라는 단순히 느낌이 좋다라는 말만을 남겼고 이후에도 열심히 표어를 다듬는 일에 참여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토시와 이바라가 데이트 비스무리한 이유로 먼저 부실을 나가고 난 뒤 어쩔 수 없이 치탄다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치탄다는 내게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를 표했다. 또다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면서, 오레키씨에겐 큰 빚을 졌다면서 말이다.
그리고 난 그 감사의 인사를 거절했다. 그리고 난 이런 식으로 대답했다. '감사는 내가 아닌 너 자신에게 해라. 네가 물러서지 않은 모습을 생각해낸
문장이니까, 난 그저 네 모습을 본떴을 뿐이다', 치탄다는 그 대답을 듣고선 온화하게 웃으며 정말 고맙다고 답하며 그래도 자신에겐 새로운 빚이
생겼다며, 내게 진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하냐고 물어 보았다. 그리고 난 그런 치탄다에게 "그런 빚엔 도망치는 게 좋아" 라고 답해주었다.
어쨌든 우리 고전부 전원이 힘을 합세해 만들어낸 표어인 것은 정확했다. 누나가 워낙에 깐깐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게까지 큰 노력을 쏟아부은 만큼 반응도 그에 비례하기를 바라는 것도 사치가 아니라 생각했다.
"...뭐야 이게. 애들 만화 홍보문구도 아니고"
누나는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팜플렛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뭐.. 최악의 경우는 아니었다. 정말 수준 이하의 표어였다면 누나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바로 시청에 항의 전화를 넣었을테니 말이다. 그래도 그 동안에 있었던 과정들이 '뭐야 이게' 란 말로 정리가 되어버리는 것에 대해선 입맛이 쓸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최악을 면했다는 거에서 감사를 해야 하나.
"그래도 마음엔 드네"
그렇게 말하며 누나는 팜플렛을 든 채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숨이 새어나왔다. 안도의 의미이기도 했고, 갑자기 밀려드는 공허한 느낌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전에는 누나의 평가에 죽자사자 매달렸지만 막상 좋
게 끝난 지금에서야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과정을 생각해보니 누나의 평가 따위 신경 쓸 것도 없었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호타로, 거기서 뭐 하고 있어?"
누나는 이미 저만치나 걸어가고 나서야 내가 생각났는지 우두커니 생각에 잠겨 있던 나를 불렀고 나는 그제서야 현실로 돌아와 누나와 발을 맞추기 위해 뛰어갔다.
뛰어가는 동안 잠깐 생각을 해보았다. 주어진 문제에 맞서는 것이 최선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최선으로 여길 테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선 물음표를 찍고 싶다. 문제에 맞서는 것이 정의란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다만 그건 허울좋은 이야기일 뿐이다. 맞서는 것은 아프고 힘든 것이다. 실제로 마야카는 감정의 소모를 견디다 못 해 스스로가 떠나기를 택했고 치탄다 또한 자신의 감정을 엄청나게 소모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에 맞선 결과는 바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아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누나의 손에 들린 팜플렛에 큼지막하게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늦기 전에 맞서라'
...확실히 누나의 말이 옳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도 우리가 쓴 건데 별 수 있나, 사랑해 줘야지. 나는 금방 누나를 따라잡았고 누나는 그런 내게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누나에게...
"그 표어 말인데.."
이걸 굳이 맞선다라고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 사토시와 치탄다가 내게 보여준 것이 있는 만큼 나도 이 정도 나서는 게 예의인 것 같이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이것도 여름의 변덕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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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랬듯 팬픽은 자기만족의 용도이기 때문에 퀄리티는 항상 그닥입니다.
게다가 이번 건 제목도 마땅히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냥 제목 없이 올립니다.
그리고 너무 길어서 많이 보시진 않으실 테지만.. 혹시라도 끝까지 보실 분들을 위해 말씀드립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