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어두움은 깨어난 시체들마저도 잠시 죽음같은 휴식에 들어가도록 했다. 납골당 밖은 아직 어두침침했고 낮에 돌아다니던 시체들의 군대는 보이지 않았다. 묘지에 움직이고 있는 것은 다 쓰러져가는 납골당 앞에 앉은 세명의 걸어다니는 시체들 뿐이었다.
“휴, 나오니까 좀 낫구만. 난 저런 지하바닥은 영 못들어가있겠어. 뭔가 숨도 막히는 것 같고, 저 구석에서 뭐라도 갑자기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란 말이야.”
“남의 작업장을 폄하하지마! 얼마나 편안하고 즐거운 곳인데 그래.”
괴물이든 뭐든 튀어나와봤자 다넬에겐 상대도 안될 것 같은데. 다넬은 보통의 시체보다 키가 두배는 커 보였다. 생전에 전사라도 되었을까? 그런 사람이 어두운 지하를 겁낸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그래, 이제 입장정리가 되었나?”
“네, 뭐 그럭저럭. 제가 한번 죽었다는건 확실히 알겠네요. 억세게 운이 좋다는것도요.”
“그정도라고 받아들였으면 다행이군. 기껏해서 살려놨더니 못받아들이고 다시 죽는 놈들도 있어. 사실 꽤 많아. 마음을 잘 먹은거야.”
계속 살고싶다는 얘긴 안했는데. 세상이 살만해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할것이 아닌가. 남들은 덤으로 얻은 목숨 어떻게든 다시 잘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칠지 모르지만, 어짜피 덤인데 그냥 내팽겨쳐도 그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녀에게 삶이라는 것은 귀찮고 힘든, 굳이 겪어야 할 필요가 없는 과정이었다. 다만 원이라는게 있다면, 어떤 사람을 꼭 다시한번 보고 싶었다. 그 사람만 있다면, 다시 살아볼 생각이 날지도…
“모르도랑은 이야기를 많이 나눴지? 내 소개를 다시 하지. 내 이름은 다넬이다. 죽음경비병이자, 이곳의 징집관을 맡고 있지. 평소에는 새로 살아난 병사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지만, 가끔 특별한 사람을 뽑아서 상부로 올려보내는 일도 하고있어.”
“특별한 사람이요?”
“이따금씩 특수한 부대나 인원을 골라서 임무를 보낼 때가 있거든. 보통은 특별한 전시상황이나, 위급상황에 그런 병력을 뽑아가지.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때야.”
다넬은 품에서 빳빳한 양피지를 꺼냈다. 양피지에는 반쪽 얼굴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침투부대 특별 징집 명령서. 각 징집관들은 아래 조건에 맞는 신병을 브릴로 이송할 것. 조건 첫번째, 체구가 작을 것. 가급적이면 여성을 보낼 것. 조건 두번째, 암살 및 첩보 임무에 특별한 자질을 가질 것. 조건 세번째, 포세이큰과 호드에 대한 충성심이 각별한 자일 것. 이상 조건에 맞는 신병을 골라 이달 말일까지 브릴로 보낼 것. 포세이큰 총 지휘사령부. 벤시여왕님의 이름으로.”
"밴시 여왕? 그게 누구죠?"
"뭐? 실바나스님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나?"
"아, 이 친구는 로데론에서 죽었어, 요즘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게 아무것도 없을껄? 아마 호드가 뭔지도 모를꺼야”
“그럼 설명할게 많아지는데… 지금까지 그런것도 안알려줬단 말이야?”
“아니 뭐… 꼭 그것만 중요한게 아니고 작업도 해야 하고 가족사도 들어봐야 하고…”
모르도가 어물어물 둘러댔다. 그렇게 한시간쯤 지났을까, 로즈는 엄청난 이야기들에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그 왕자가… 언데드의 지도자였다고요? 아니 근데 아까는 여왕이라면서요?”
“그러니까, 언데드가 두종류야. 하나는 원래 네가 생각하던 나쁜 언데드. 하나는 우리, 좋은 언데드. 나쁜놈들 두목이 그 왕자. 근데 얼마전에 뒈졌고, 우리 두목님이 벤시 여왕님. 원래 엘프셨는데 그 왕자한테 죽임당한 다음에 부활하셨지. 그리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어.”
내가 죽어있던 동안 세상이 미쳐돌아가고 있었던건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구세주나 신의 아들같은 이야기는 빛의 교단에서 약팔려고 만들어내는 이야기였는데? 아니지, 내가 지금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그렇게까지 뻥은 아닌건가? 그녀가 아무리 로데론 빈민가에서 살던 무지랭이였지만 모르도가 방금 지어낸것 같기도 하고 조금은 말이 되는것도 같은 이 이야기는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럼 그분도 시체에요? 그분도 나처럼 얼굴에 썩은 살이 붙어있는 사람인가요?”
“시체라니! 그분은 애초에 인간이 아니고 엘프야, 엘프! 그리고 그분은 그런 썩은 살 같은거 없어! 엄청 아름다우시고, 고귀하시고, 그리고 또…”
“우리하고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죽음에서 깨어나셨지. 그리고 앞으로는 그 이름을 부를때 예를 갖추도록.”
“아, 네… 죄송해요. 그럼 오크가 이제 같은 편이라는 그 얘기는 뭐에요? 오크들은 예전에 악마들이 소환한거 아니었어요?”
“그들도 악마들에게 이용당한 것 뿐이야. 지금은 우리편이지. 우리 동맹을 가르켜 호드라고 부른다. 그정도만 알고 있으면 될꺼야 일단은.”
“...한가지만 더 물어봐도 되요?”
“뭐든지.”
“음… 그럼 저희는 왜 인간 쪽하고는 동맹을 안했나요? 사실 그쪽에 제일 가까운거 아니에요? 그래도 저… 우리 모두 다 인간이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자 다넬이 신경질적으로 피식 웃었다.
“그게 궁금하나? 이제 곧 전장에 나가보면 이유를 알게 될꺼야.”
“아 잠깐잠깐! 이친구 데려가는걸로 확정인거야? 이친구는 너무 겁이 많아서 그렇게 피튀기는 전장에는 안어울릴껀데?”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아나.”
“내가 당연히 알지! 우리가 밤사이에 얼마나 깊고 찐한 얘기를 나눴는데.”
“저기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거….”
“내가 척 보면 알지! 그리고 이게 지금 말이 되나? 여자들만을 뽑아서 암살이랑 첩보 임무를 맡긴다고? 연약한 여자를 아껴 줘야지!”
“명령서에 남자는 안된다는 말은 없다. 이건 활동에 적합하도록 몸집이 작은 자를 뽑기위한거야.”
“그래도 이건 정의롭지 못한 처사야! 여자를 전쟁터에 죽으라고 내모는 거잖아! 이게 그 자네의 잘난 기사도인가? 다넬?”
“포세이큰이 된 이상 누구나 자기 몫을 해야 한다. 여자도 예외가 아니야. 자유가 주어진만큼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질줄 알아야 한다.”
“그래 그건 맞지. 그래서 마련된 자리가 있잖아!”
“그게 무슨… 그게 뭔데요?”
“내 조수.”
“또 게으름을 피우고 싶다는건가. 계속 그런 태도를 보이면 상부에서 좋게 보지 않을텐데.”
“게으름이 아니라고! 정말 미친듯이 바쁘고 일손이 부족하다니까? 아니 그리고 이친구가 바느질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건 또 어떻게 확신하지? 둘이 깊고 찐한 이야기나누는 도중에 그것도 발견하셨나?”
“아니 전 그런 얘기 한적이 없….”
“아이고, 왕년의 성기사 나으리, 한번만 좀 봐달라고.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쪽 조건도 쪼끄만 여자라는 거 빼고는 사실 맞는게 없잖아. 암살이랑 첩보 재능은 뭐 있다는 보장이 있나? 호드도 지금 알았는데 무슨 충성심이 있겠어?”
“그건… 그렇지만…”
다넬이 정곡을 찔린 듯 했다. 틈을 잡았다 싶었는지, 모르도는 비열하게 낄낄거리며 다넬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어짜피 특별징집령이 한두번 내려오는것도 아니고, 자네도 숫자만 적당히 채우면 되잖아. 내가 뒤로 손을 써줄수 있어. 우리끼리 뭐 한두번인가?”
“저기… 저기요…”
두 남자의 논쟁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제 의견도 들어봐주시면… 안될까요…?”
“응?”
“그래도 제가 가는건데… 제 의견도 들어주셨으면 해서요…”
“그래! 그렇지! 역시 본인의 의견이 가장 중요한거라고! 그래, 로즈. 말해봐바. 피튀기는 전장보다는 편안히 납골당에서 사람들을 도와주는게 더 좋지않겠어?”
솔직히 말하면, 그럴 것 같았다. 그녀도 전쟁터에 뛰어들어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는 곳에서 불안함에 떨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어쩌면 약간의 책임감? 양심? 같은 감정들이 로즈가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저는… 물론 편안히 지내는 것도 좋지만, 누가 저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불러준다면, 그리고 그게 좀 중요한 일이라면… 한번쯤 의무를 다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이 멍청아! 무슨 소릴 하는거야! 전쟁터에 나가서 죽겠다고?”
“하지만… 사실 저도 제가 전쟁에 도움이 될지도 잘 모르겠고… 첩보같은 잘 숨어다니는건 자신있지만, 암살같은건, 사실 뭘 죽여본 적도 잘 없고…”
“그런건 괜찮다. 훈련소에서 기본적인 훈련은 받을 수 있을테니까. 내가 보고싶은건 싸울 의지가 있느냐 뿐이야.”
“어… 그래서 말인데요. 조금씩만 맛배기로 해보면 안될까요?”
“그게 무슨소리야?”
“저도 살려면 뭔가 의무를 다해야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아요.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면 신세지는 것 같아서 죄송하고요. 단지 저한테 다 잘맞는게 뭔지 좀 알고 싶어서 그래요. 장의사도 좀 해보고, 그 첩보? 뭐, 그런것도 조금 해보고 나서 뭘 할지 결정해도 되지 않을까요?”
그럴듯한 생각이었다. 어짜피 병사를 찾지 못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되는것은 아니었다. 적당히 조건을 맞춰 아무나 보내면 되니까. 퇴짜를 맞는다고 해도 그가 손해를 볼 일은 없었다. 정말 전투에 소질이 있는지 확인해보고, 그 뒤에 장의사를 시키든 요원으로 만들기 위해 브릴로 보내든 하면 될 것 같았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이번 달 말에 작전을 하나 수행해야 하는데, 그때 널 데리고 가겠어. 가서 소질이 있는지 살펴보자고. 그동안 기본적인 훈련을 받도록 해줄께. 몇일은 훈련을 받고, 몇일은 여기 납골당에 와서 모르도에게 일을 배우는거야. 그 후에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건 어떤가?”
“저는 괜찮을 것 같아요.”
“뭐야 결국은 데리고 간다는 소리잖아! 그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럼 그것도 이녀석의 운명이겠지. 전투에서 살아남는 것도 소질이다. 그래도 너무 걱정은 하지마. 너무 위험하게는 하지 않을테니.”
“죽으면 나만 괜히 손해볼 것 같은데. 나중에 보상해줄텐가?”
“애초에 네것도 아니었는데 내가 왜 보상을 해줘야하나?”
“저기, 두분다 그만 하세요…”
두사람의 논쟁은 점점 격해져갔다. 원래 친한 사이인줄 알았는데. 중간에 끼인 꼴이 된 로즈가 필사적으로 말려서 더 시끄러워지는것만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그만하세요…. 제발 이제…”
“그래. 알았어. 맘대로 하라고!”
“걱정마세요. 모르도씨. 안죽을테니까.”
“그래 우리 이쁜이 절대 죽으면 안돼?”
“그런식으로 말하진 마요!”
로즈가 당황한 듯 얼굴을 살짝 붉혔다. 아니, 얼굴이 조금 더 창백해졌다.
“눈꼴 시리구만. 진짜 둘이 밤에 찐한 이야기라도 나누셨나?”
“그런거 아니에요!”
“그래 뭐가됐든. 일단 오늘 밤은 마을로 내려가자고. 모르도, 여긴 지금 자네밖에 잘 자리가 없겠지? 이친구는 오늘 마을 여관에서 재우겠어.”
“아니 자리야 굳이 만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데…”
“축축한 납골당 바닥보다는 여관방이 훨씬 나을꺼야. 그게 훈련소로 가기도 쉽고.”
“쳇. 뭐 그래 알았어. 훈련 쉴때 잘 보내기나 하라고.”
“내일 잠깐 다시 오도록 하지. 휘익, 흰둥아 이리 온.”
다넬이 휘파람을 불자 깊은 어둠에서 큰 형체가 하나 나타났다. 거대한… 뼈로 만들어진 말이었다. 다넬도 덩치가 큰 편에 속했지만 이 말은 다넬을 태울 수 있을 만큼 훨씬 더 컸다. 다넬은 먼저 올라탄 뒤 로즈를 번쩍 들어 올렸다. 마치 짐짝이 되어버린듯 한 기분이었지만 말에 올라타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기분은 꽤 신기했다.
“그럼 내일 다시 뵐께요.”
“그래 잘 들어가라고.”
“이랴, 흰둥아 가자!”
거대한 해골로 된 말이 콧김을 뿜으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갈기를 꽉 붙잡지 않으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로즈는 처음 말을 타고 질주하는 그 경험에 내심 신이 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를 달려가니 어둠 저 너머에서 불빛이 보였다.
“진짜 죽음의 종소리 마을에 온것을 환영한다. 신병.”
그들이 도착한 곳은 작은 산골 마을이었다. 이미 다 무너져버린듯 한 외형에 생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모양이었지만, 그 생기 대신 무언가 자연의 섭리 자체를 거부하는 듯한 이질적인 기운이 마을 전체에 흐르고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죽음의 기운이랄까. 마을을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생기라는 것, 예를 들면 웃는 얼굴과 같은 감정을 찾아볼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전체가 기계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한밤중인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탓인지도 몰랐다. 다넬과 로즈를 태운 해골마는 마을 중심부에 있는 커다란 건물로 향했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면 될꺼야. 모르도네 지저분한 납골당보다는 훨신 나을거라고."
로즈는 힘겹게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다넬이 말을 마구간에 집어넣는동안, 마을을 휘 둘러보았다. 역시 이상한 마을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이상하게 보인것은 성당 건물이었다. 본래 빛의 교단에서 사용했을법한 건물이었지만, 다 낡고 금이 간데다가 반쪽얼굴 인장까지 걸어놓으니 빛은 무슨 빛 할아버지가 와도 어둠에 굴복할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이상하게 생겼지? 저 성당건물이 이 마을의 중심 사령부다. 내일 저기서 등록을 하고 훈련을 받으면 될거야."
두 사람은 이상하게 생긴 성당을 뒤로하고 여관건물로 들어갔다. 말이 여관이었지, 사실 병영이라고 해도 무방한 모습이었다. 원래는 여관이었을테지만, 포세이큰이 마을을 사용하게 되면서 모든 것을 군사시설로 바꿔놓은 듯 했다.
"안녕하시오, 주인장. 빈 방 있습니까?"
"아, 다넬이군. 미안해서 어쩌지? 오늘은 빈 자리가 없는데. 병력 이송 일이 다가오고 있어서 꽉 차있어."
"그렇습니까?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이 근처에선 쉴곳을 구하기가 어려울꺼야. 뒤에 여자는 신병인가?"
"그렇습니다. 좀 특별한 인원이지요."
"흠, 그런가. 어쨌든 난 지금 도움을 줄 수가 없겠구만. 다른데 빈자리가 있기를 빌겠네."
두 사람은 다시 거리로 나올수밖에 없었다.
"미안하게 되었구만. 저기가 제일 괜찮은 곳이었는데."
"괜찮아요. 다른데 좋은데 찾아보면 되죠."
그러나 두 사람은 한참을 돌아본 뒤에도 빈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모두 5군데의 여관을 돌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같았다.
"이거 큰일인데. 이 정도로 병력이 많이 모였을줄은 미처 몰랐어. 이렇게 많이 모이는건 흔한 일이 아닌데. 정말 전쟁이라도 나려나?"
"이제 다른 곳은 없는 건가요? 그럼 차라리 모르도네 납골당으로 잠시 돌아가도…"
"아니야.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모르도는 생각보다 못믿을만한 놈이라고. 출신도 알 수 없고, 뒤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음침한 놈이야.”
“그렇게 나쁜분 같아 보이진 않던데… 좀 주책스럽긴 하지만.”
“몰라. 그냥 내가 놈을 맘에들어하지 않는거일수도 있어. 난 그런 입만 살은 놈들이 싫거든.”
“모르도는 자기가 로데론에서 죽었다고 했어요.”
“그래. 그건 나도 들어본 적 있어. 꽤 잘나갔었다고 들었는데. 그 저주받은 왕자가 로데론으로 돌아왔던 날에 죽었다고 하더군.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솔직히 진짠지도 좀 의심스러워. 그 친구가 살아난건 죽은지 얼마 안되었을때인데, 여기 온건 그렇게 또 오래되지 않았거든. 그동안 뭘 하던 인간이었는지도 불명이고… 아무튼 난 놈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아. 일 때문에 얼굴만 보는 사이지.”
“그럼 다넬도 로데론 출신인가요?”
"난 원래부터 이쪽 근방 출신이야. 여기서 태어나고, 죽었고, 다시 살아났지. 그나저나 이거 이런식이면 남은 여관이 한군데 밖에 없는데…"
"그럼 그리로 가죠."
"흠… 거긴 웬만하면 안가고 싶거든… 거기만 가면 짜증이 나서…"
하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었던 둘은 방향을 정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마을 중심에서 벗어나 마을 외각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작고 초라한, 죽음이 만연한 마을에서도 유달리 허름하고 무너질 듯 보이는 작은 여관이 하나 있었다. 문 위에는 '꿈틀대는 애벌레'라고 적인 간판이 옆으로 살짝 기울어져서 매달려 있었다.
"내가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도 좀 이해해 주길 바래. 난 여긴 정말 오기 싫어하는 곳이거든."
"여기 괜찮은데 맞죠?"
"괜찮기는 하지. 여관이 사실 거기서 거기잖아. 그냥 개인적인 이유가 좀 있어서 그런데…"
그때 작은 여관의 문이 조용히 열리면서 누군가가 밖으로 나왔다.
"아이고 어서 오십쇼! 헉, 나으리 오셨습니까?"
뚱뚱한 체형에 수염이 길게 달린 시체가 걸어나왔다. 살아있었다면 꽤 푸근한 할아버지였을 듯한 인상이었다. 다행히 시체가 되어버린것이 그 인상을 크게 바꿔버리지는 못한 듯 했다. 말이 우스웠지만, 지금까지 본 시체들 중에 가장 '인간적인' 인상이 드는 시체였다. 다넬이 한참 날카로운 눈으로 여관주인을 쏘아보더니 내뱉듯이 입을 열었다.
"네놈 얼굴은 언제봐도 기분이 더럽구나. 이 역겨운 놈아."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다넬을 안것이 얼마되지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항상 예의바르게 말하던 다넬이었는데 이렇게 싸늘하게 말하는 건 처음 들어보았다.
"죄...죄송합니다. 나으리. 뭐 필요한거라도 있으신지요?"
"빈 방. 이 친구가 앞으로 묵을것이다."
"예, 예 있습죠. 가장 좋은 곳으로 드리겠습니다."
"선심쓰는 척 하지마라. 너같이 입만 살은 놈하고는 상대도 하고 싶지 않아. 마을이 군사들 때문에 꽉 차지만 않았다면 이쪽으로 오지도 않았을꺼야."
"다넬, 그렇게 말할것까진 없잖아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나으리. 제가 버릇없이 입을 놀렸습니다. 들어오시지요. 방을 드리겠습니다."
다넬은 잠시 주인을 쏘아보더니 말을 데리고 발길을 돌렸다. 마구간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자리에 남겨진 로즈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쩔줄 몰랐다.
"어… 저기… 죄송해요. 제 친구가 말이 좀 심했죠?"
"아닙니다. 저는 그래도 싼 놈이니까요. 어서 들어오시죠, 아가씨."
"네. 감사합니다."
"이리 오세요. 벽난로에 너무 가까이 붙지는 마시고요. 시체가 말라붙으면 불에 잘 탄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좋은 분이시네요."
"아니요, 아닙니다. 저는 그냥 늙어서 썩어가는 시체일 뿐이에요.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죠. 윗방을 좀 치우고 오겠습니다."
노인이 잠시 윗층으로 올라가고 나서 로즈는 여관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여관은 언데드의 것이라고 쳐도 확실히 낡고 오래되어 보였다. 외곽에 위치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모양이었다. 현관 옆에는 위층으로 가는 계단이 위치해 있었고 안쪽에는 주방과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모양이었다. 작은 벽난로에 조용히 타고 있는 불을 보니 몸과 마음이 한번에 따듯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쉬고 있을 때, 다넬이 들어왔다.
"그렉은 위로 올라갔나 보구만. 여관은 맘에 드나?"
"여관이 맘에 드느냐의 문제가 아닌것 같은데요, 다넬. 말을 그렇게 험하게 하면 어떡해요?"
"아까 말했잖아.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늙으신 분에게 말이 너무 심했어요."
"늙으신 분이라니. 죽은자에게 겉으로 보이는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 언제 죽었느냐를 말해주는 요소일 뿐이라고. 내가 저놈보다 몇달은 더 일찍 죽었어."
"그래도… 적어도 예의는 갖춰야죠. 기분 상하셨으면 어떡해요."
"그러라고 한거야."
"방이 준비 되었습니다. 이쪽으로 올라오실까요?"
여관주인이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심한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이었다. 보통은 죽은 시체가 저런 미소를 지으면 소름이 끼칠텐데, 이 늙은이의 미소에서는 왠지 모를 따스함과 푸근함, 씁쓸함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로즈와 다넬은 주인을 따라 계단을 올라 이층으로 향했다.
"이 방입니다. 저희 집에서 가장 좋은 방이죠. 사실 지금 손님이 아가씨밖에 없거든요. 편하게 쉬다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방은 혼자 쓰기에 너무 좋다고 할 정도로 큰 방이었다. 방 중심에는 커튼이 달린 커다란 침대가 있었고, 그 바로 옆에는 낡았지만 한때 화려했을 거울과 화장대가 있었다. 그 맞은편으로는 커다란 책장에 먼지가 잔뜩 쌓인 책들이 가득 꽃혀 있었다. 한때 귀족부인이 쓰기라도 했을 방이었다. 로즈는 기뻐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정말 예뻐요… 전 이런 방에는 살아 생전에도 한번도 들어와보지 못했어요…"
"많이 낡아서 지금은 볼품없어졌지만, 한때는 정말 아름다웠던 가구들이랍니다. 침대도 아직 푹신푹신하고요. 부디 머무는 동안 편히 쉬다 가시지요."
"오늘은 여기서 쉬라고.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오겠다."
"그래요, 다넬, 그럼 내일 보도록 해요. 아, 여관비는 어떻게 드려야 되죠? 제가 지금 깨어나서 돈이 없는데 일하는 걸로 지불해도 될까요?"
"다시 말하지만, 난 네놈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엮이고 싶지 않아. 신세도 지기 싫고. 돈은 내일 데리러 올때 내가 지불하겠다. 난 이만 가도록하지. 내일 보자고 로즈."
다넬은 그렇게 말하고 쿵쾅대며 방을 나가버렸다. 그렉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기운 빠진 노인의 얼굴에서 슬픔이 느껴졌다. 로즈가 어쩔줄 몰라하며 말을 걸었다.
"괜찮으세요?"
노인이 너스레를 떨듯 말했다.
"그럼요, 그럼요… 전 괜찮습니다. 이렇게 꾸중 듣는거 하루이틀일도 아닌데요. 그게 다 이 늙은이가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런거랍니다. 신경쓰지 마세요. 본래 저런 분이 아니시랍니다."
"원래 알던 사이셨나보네요."
"그렇죠. 한때 제가 모시던 분이셨습니다. 오늘 일로 나으리를 안좋게 보시지는 말으셨으면 좋겠네요. 원래 참 상냥하신 분이시랍니다. 그러고 보니 제 소개를 아직 하지 않았군요. 전 그렉이라고 합니다. 이 '꿈틀대는 애벌레' 여관의 주인이죠. 작고 볼품없는 여관이지만 편히 쉬시다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배가 고프시면 아래층으로 내려오시면 됩니다. 간단한 음식이나, 술도 준비되어 있답니다. 잠이 잘 안오시면 간단하게 포도주라도 한잔 가져다 드릴까요?"
"감사해요. 음… 근데 지금은 괜찮을 것 같네요. 좀 누워있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옷은 방 밖에 있는 바구니에 넣어두시면 제가 세탁해드리도록 하지요. 필요한게 있으실땐 침대 옆에 있는 줄을 당기시면 됩니다. 그럼 아래층에 있는 저에게 신호가 오니까 제가 바로 올라오도록 하지요. 그럼 편안한 밤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친절한 분이시네요."
"별말씀을요.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아가씨."
그렉은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졌다. 로즈는 천천히 옷을 벗어 방문 밖의 바구니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침대에 천천히 누웠다. 그리고 오늘 벌어진 일들을 조용히 생각해보았다. 오늘, 그녀는 새로운 삶을 얻었다. 그녀가 죽은 후로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세상은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어지러운 곳인 것 같았다. 귀찮고 지겨운, 힘들기만 한 삶이 또다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괴로웠지만, 혹시나 또 몰라, 살아있을 때와는 또 다른 살만한 가치가 느껴지는 삶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올리버는 다시 살아났을까?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걸까? 그러고 보니 나도 모르게 전쟁에 나가겠다고 말해버린 것 같은데.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한걸까. 그냥 납골당에서 시체나 꿰메는게 나에게 어울리는 일 아닐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던 로즈는 이내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창 밖에 떠있는 달은 만월이었다. 티리스팔 숲의 어두침침한 기운과 섞인 음산한 달빛이 차갑게 방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