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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사진주의] 1987년 오대양 집단자살사건.
게시물ID : panic_3848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그림자망토
추천 : 25
조회수 : 3965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11/05 14:18:40


밑에 존스타운 자살사건을 보니 문득 떠올라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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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양 집단 자살사건>


※1987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집단 자살사건. 

일각에서는 자살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면서 집단 변사사건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 사건 이전

사건의 발단은 박순자라는 한 여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박순자는 1974년 횡경막에 병이 생겨 고통을 받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병이 회복된 이후, 

자신의 병을 고친게 신이라고 믿어서였는지 신학교를 다니다가 여호와의 증인 교회에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가 다시 기독교복음침례회, 소위 구원파라 불리는 교파의 교회로 옮겨 다니다가 다시 거기서 이탈했고, 

이탈하면서 아예 추종자들을 모아 나와서 시한부 종말론을 숭상하는 사이비 종교를 직접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대양이었다.


오대양이라는 이름은 박순자가 

"나는 오대양을 지배할 사람으로 앞으로 전세계를 주관하게 될 것이다"

라고 공언한데서 나왔다고 하는데, 어쨌든 박순자는 1984년 공예품 제조회사를 만들면서 회사 이름도 오대양으로 짓게 된다. 

처음 오대양은 대전에 수입품 판매장을 만들면서 사업을 시작했고, 이후 대전과 용인등의 공장을 사들이면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사업을 하는 한편으로 신도들과 신도들의 자녀들을 모아 집단생활을 시켰으며 유치원과 양로원, 고아원 건물을 사들이거나 임대해 

사회사업을 하는 것처럼 꾸미기도 했다. 겉으로는 시설을 당시로선 최신식으로 꾸며 고아들을 잘 키우는 것처럼 위장했지만 

실제 속내는 신도들의 자녀를 세뇌시켜 아이들에게 부모는 없고 너희들은 고아이며 오로지 박순자만이 진짜 어머니라고 유도했다. 

심지어 아이들에게 부모를 찾으면 지옥에 떨어질거라는 소리도 공공연히 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박순자는 1986년 4월, 일본의 전자부품 생산업체와 합작해 당시로선 거액이라고 할 수 있는 7억을 투자해 

전자제품을 만들려고 했으나... 사기를 당한 것으로 드러나 사업은 실패했다. 

이때부터 오대양은 점점 광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박순자는 신도들에게 사채를 많이 끌어오라라고 명하고 신도들을 비인간적으로 통제했다. 

부부들에게는 각방을 쓰고 금욕생활을 강요했으며 밖으로 외출하는 것도 금지했다. 

오로지 2주에 한번씩 그것도 많은 사람들끼리 단체로 외출을 하는것만 허용했으며 외출 이후에는 반드시 

외출시에 같이 나간 상대방이 밖에서 했던 모든 행적을 일일히 보고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매달 한번씩 반성의 시간이란 것을 가졌는데 이때 신도들은 한달동안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실토해야 했고, 만약 규율을 어긴 것이 드러나면 벌을 받는다는 명목으로 

가차없이 집단구타가 행해졌다. 심지어는 딸이 어머니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벌을 내린다면서 어머니를 두들겨 패고, 

어머니는 이를 감사해하는 황당한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박순자가 신도들을 굴려서 끌어모은 사채는 무려 170억여원에 달했다고 하며, 신도들은 자신의 일가친척들에게도 돈을 빌려서 

박순자에게 갖다 바쳤다고 한다. 이런가운데 박순자에게 7억을 빌려준 이상배라는 사람이 자신의 부인과 함께 빌려준 돈을 갚으라고 

독촉하기 위해 오대양 공장을 찾았다가 신도들에게 집단 구타당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상배는 경찰에 오대양을 고소했다. 

다른 채권자들도 경찰에 고소하면서 경찰은 사기혐의로 박순자를 조사하기 시작했고 사회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더이상 엄청난 사채 이자가 감당못할 지경에 이르고 경찰과 언론의 압박까지 계속되자, 박순자는 특별히 사채를 가장 많이 끌어모은 

열성 신도및 자신의 가족 31명과 함께 오대양 용인공장의 식당 천장에 4일간 숨게 되었다. 

그리고...


2.사건 개요

1987년 8월 29일, 오대양의 직원 김모씨는 경기도 용인의 공장에 왔다가 숙소의 천정이 내려앉아 있는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식당쪽으로 갔는데 식당 천정에서 박순자를 포함한 32명이 죽어 있는것을 발견하고 마침 가족을 찾으러 공장에 온 

박순자의 남편에게 알렸다. 

박순자의 남편은 경찰에 오후 4시경에 신고해 집단 변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사건 현장에서는 사망한 사람들이 쓴것으로 보이는 메모들이 발견되었는데 

"사장이 독약과 물을 가지러 갔다" 라거나 

"xx도 지금 매우 고통을 받고 있다", "xx가 꿈을 꿨는데 그곳이 지옥이라고 하더라", 

"남자는 다 잡혀가고 여자들은 다 헤어지고..."

등등의 내용이었다고 한다.

메모의 내용때문에 처음에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독약을 먹고 죽은게 아닌가 했지만, 경찰의 부검 결과 독극물은 나오지 않고 

대신 하이드라민이라는 신경 안정제 성분이 발견되었다. 직접적인 사인은 목졸려 죽은것으로 나왔기 때문에 

경찰은 멀미약과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목이 졸려 죽은것으로 보았다.


경찰에 의하면 가장 먼저 박순자가 공장장인 이경수에게 자신을 목졸라 죽이게 한뒤 

이어 이경수를 비롯한 남자들이 여자들을 목졸라 죽이고 나서 여자들이 모두 죽은 것이 확인 되자, 

박순자의 두 아들들이 철골 서까래에 줄을 매고 자살한뒤 마지막으로 이경수가 목을 메고 자살한 것으로 결론내렸다.

(그런데 이때 이경수의 시신은 목을 메달아 자살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부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당시 보도 화면에 나왔던 사진을 보면 이경수의 시신은 무릎을 구부린 채 매달려 있었다.)


사망자들의 사망 정황은 드러났다지만 왜 이들이 집단적으로 자살했는지에 대해선 명확하게 드러난바가 없이 

사건은 그렇게 종결되었다. 경찰은 사건의 열쇠를 쥔것으로 보이는 오대양 직원 11명을 공개수배했지만 

이들은 당시에는 잡히지 않았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게 된건 1991년 7월, 사건 당시 수배되었던 오대양 직원들중 6명이 자수하면서 의문점들이 일부 밝혀지게 되었다. 

자수한 이들의 진술로 사건의 중요한 열쇠를 쥔것으로 주목받았던 오대양 총무 노순호, 기숙사 가정부 황숙자, 육아원 보모 조재선등이 

이미 사건 발생전에 반성의 시간에서 규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오대양 직원들에게 살해된뒤 암매장 당한 것이 밝혀졌다.


이들의 자수로 다시 사건이 대전지검에서 재조사되었지만, 검찰 역시 87년 경찰의 수사와 마찬가지로 32명은 집단 자살한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수사를 마무리했다.


3. 오대양 사건은 집단 타살이다?

하지만 당시 세간에는 죽은 이들이 자신의 뜻으로 죽은게 아니라 강제로 죽게되었거나 심지어는 타살 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는 특히 박순자가 한때 몸담았던 구원파와 구원파 성도가 경영하던 모 회사가 사건의 배후라는 의혹이 일면서 

일파만파로 번져나갔다.

   구원파가 사건에 개입되었을것이라 의심한 이들은 박순자는 실은 구원파를 완전히 이탈한것이 아니며, 모종의 이유때문에 

구원파를 이탈한척 하면서 오대양을 차린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순자가 오대양을 차린 모종의 이유는 구원파 성도가 경영하던 

모 회사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고 박순자는 이 회사의 자금을 위해 성도들에게 거액의 사채를 끌어오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오대양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고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구원파나 혹은 모 회사가 박순자와 31명을 살해했다는 것이 

당시 세간에 떠돌던 타살의혹의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구원파와 모회사는 자신들은 박순자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반박했다. 

박순자는 이미 구원파를 떠났고,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 검찰도 이 의혹에 대해 수사했으나 

관련이 없다고 결론내렸다.


일부에서는 죽은 이들이 모처에서 살해된 뒤에 공장 식당의 천정으로 옮겨졌다고 주장했지만,

사건 현장을 감식했던 경관은 현장의 상황상 다른곳에서 살해되었다는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일축했다. 

또한 사망자들중 여성들을 부검해보니 정액 양성반응이 나왔기 때문에 죽기전에 성폭행을 당한게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당시 부검의는 국과수의 정액 양성반응은 오류라고 반박했다.


87년 경찰의 결론대로 32명중 박순자를 포함한 29명은 목이 졸려 살해당했으며, 박순자의 두 아들과 공장장 이경수는 

목을 매 죽은것으로 검찰도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과연 이들이 자의에 의해서 죽었는가, 아니면 타의에 의해서

죽음을 강요받았는가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은채 미스테리로 남게 되었다.


4 기타

당시 사건은 6월 항쟁이후 민주화 작업이 진행되던 와중에 터져나와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박순자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들은 무려 270여명에 달했고, 이들은 이후 5공 특위에 오대양 사건도 조사해달라고 요구해 

국회에서 청문회까지 열리게 되었지만 딱히 새로운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여러모로 가이아나에서 벌어진 인민사원 집단자살사건과 유사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당시 언론에선 사이비 종교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기도 했다.

월간조선, sbs그것이 알고싶다, 시사정경 등의 일부 언론에서는 오대양집단자살 사건은 언론의 지나친 보도경쟁과 

이권에 관련된 제보자들의 편파적 제보, 일부 정치인의 정치적 이용 등이 어우러져 근거없는 추측과 오보의 

대표적인 사례라는 주장도 있다.


사진 맨 마지막부분에 시신사진 있습니다. 보고싶지않으신분은 닫아주세요.



그외...

당시 신문기사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7-08-31&officeId=00020&pageNo=1&printNo=20280&publishType=00020&articleId=1987083100209201004



출처 : 

1) 엔하위키 미러 (원문내용)

2) 미제사건추적-그들은살고싶었다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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